# 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

1966년 제8회 월드컵 이전까지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은 1950년 브라질 대회부터 참가하기 시작하였는데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고도 세계 정상급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던 영국은, 정작 월드컵에 참가하면서부터 실력을 검증받게 되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잉글랜드를 대표로 하는 영국의 축구가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월드컵에서의 성적은 축구종주국으로서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1950년부터 꾸준히 참가하기 시작한 영국에 소속한 4개의 팀은 4 번의 대회에서 단 한 번도 4강에 들지 못했다. 잉글랜드가 8강 진출에 두 번 성공했고, 북아일랜드와 웨일즈는 한번씩 8강에 진출했지만 스코틀랜드는 한 번도 8강에 진출하지 못했다.

1966년 제8회 월드컵이 잉글랜드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자동 진출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3개의 팀(웨일즈,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은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는데 모두 다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 개최국으로서의 부담감

축구 종주국으로서 월드컵에서 들러리 역할만 해온 잉글랜드로서는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동시에 남미에게 빼앗긴 월드컵을 되찾아오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이전 대회까지 잉글랜드는 물론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가대표를 최정예 군단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국민들은 단기간에 급조된 국가대표 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했던 것이다.

중위권의 실력을 갖고 있는 팀보다 정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팀은 월드컵을 개최할 경우에 반드시 우승을 달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하게 된다. 우리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을 달성하지 못한 브라질이 패배의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이제 월드컵에서 당연시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로서는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우승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변명거리가 있어야 한다. 자국의 팀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최강의 팀이 있어야 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대회 2연패를 달성한 브라질이 여전히 우승후보였는데, 영국의 국민들은 브라질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잉글랜드가 당연이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 하에 잉글랜드의 지휘봉을 잡은 알프 람세 감독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팀을 강력한 팀으로 담금질하고 있었다. 세계 제일의 골키퍼 고든 뱅크스, 수비를 맡은 젊은 주장 보비 무어, 미드필드의 보비 찰튼, 최전방의 지미 그리브스 등은 최고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었다.

# 조별리그

영국 여왕이 관전한 가운데 잉글랜드는 남미의 우루과이와 조별리그 첫 대결(7월 11일)을 가졌으나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고국의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비록 남미의 우루과이가 전통의 강호라고는 하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게 밀리는 실력을 가진 팀으로 여겼기 때문에 실망은 컸다.

잉글랜드의 두 번째 경기는 북중미의 대표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북중미에서는 강자였지만 월드컵 무대에서는 중하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2-0으로 이긴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승 1무를 기록한 잉글랜드는 우루과이에게 패하고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프랑스(1무 1패)와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7월 20일)를 치르게 되었다. 전날 우루과이가 멕시코와 비겼기 때문에 잉글랜드로서는 비겨도 준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헌트(Roger Hunt)가 전 후반에 각각 한 골씩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였고, 골득실에서 우루과이에 앞서 조 1위를 기록하며 준준결승에 진출하였다.

# 결승 토너먼트

세 경기에서 2승 1무(4득점, 무실점)를 기록하며 준준결승에 오른 잉글랜드의 상대는 남미의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그동안의 대회에서 부진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단단히 벼르고 참가했으며 조별리그에서 2승 1무를 기록하고 서독에게 골득실에서 뒤져 2위를 차지한 팀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주심의 편파판정 때문에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였다. 전반에 라틴(Antonio Rattin)이 퇴장당해 10명이 싸우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 끝에 아르헨티나는 후반 잉글랜드의 허스트(Geoff Hurst)에게 한골을 허용해(78분) 0-1로 졌다.

잉글랜드의 준결승 상대는 북한의 돌풍을 5-3으로 잠재우고 올라온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첫 출전에 4강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에우제비오의 활약이 돋보인 팀이었다.

7월 26일에 열린 준결승에서 잉글랜드는 보비 찰튼이 두 골을 넣으며 에우제비오가 한 골을 만회한 포르투갈을 제치고 꿈에도 그리던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 축구종주국 잉글랜드, 마침내 정상에 서다

잉글랜드의 결승 상대는 헝가리와 소련을 격파하고 올라온 서독이었다. 서독 역시 1954년 우승 이후 새롭게 팀을 정비해 정상급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66년 7월 30일 오후 3시에 거행된 결승전에는 9만 5천명 정도가 잉글랜드의 승리를 기원하며 모여들었다. 일방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먼저 골을 터트린 팀은 서독이었다. 그러나 홈 관중의 응원에 힘입어 잉글랜드의 허스트가 동점골을 넣으며 전반전을 1-1로 마무리하였다.

후반전에 피터스(Martin Peters)가 조국 잉글랜드에 한 골을 추가하며 2-1로 앞서나갔고, 종료 직전까지 이 리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종료 직전에 독일의 베버(Wolfgang Weber)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갔다.

연장 전반 10분 경 허스트가 날린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수직으로 떨어진 후 튀어 필드로 되돌아왔다. 주심인 다인스트(Dienst Gottfried)가 휘슬을 불었는데, 서독 선수들이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주심은 부심과 의견을 교환했고 정식으로 득점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허스트가 다시 한골을 추가하며 잉글랜드는 4-2로 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한 번 '월드컵 결승전은 역전승'이라는 전례가 되풀이된 대회가 되었다.

서독은 오늘날까지 결승골이 된 허스트의 골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독의 축구팬들은 비록 패했지만 자국의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오늘날까지 논란이 계속되는 허스트의 골과 함께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는 개최국 잉글랜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어렵게 우승을 차지한 잉글랜드는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었지만 개최국의 이점과 심판의 애매한 판정도 우승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어렵게 차지한 정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자신의 실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6-08 10:5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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