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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4일 오후 3시 15분]


▲ 유시춘 6월항쟁20년추진위 공동집행위원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유시춘(57) 6월항쟁 20년추진위 공동집행위원장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이력에서 금방 드러난다.

80년대 두 아이의 엄마로 운동판에 뛰어들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상임집행위원,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총무 등을 역임했다.

한결같이 고달픈 '감투'였지만, 덕분에 유시춘 선생은 운동권 사이에서 '누나'로 통한다. 물론 유시민 장관의 누나로 '본의 아닌' 지명도까지 '덤'으로 얻었다. 세월이 좋아졌어도(?) 그를 찾는 곳이 줄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최근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6월 항쟁 20년 사업추진위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하루, 아니 사흘

덕분에 관련 기사가 너무 많아, 알려질 내용은 거의 알려진 상태. 그럼, 차라리 단 하루 이야기만 전하면 어떨까.

유시춘 선생에게 87년 뜨거웠던 날들 중에 단 하루만 짚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대뜸 "6월 10일"이라고 답했다. 덜 알려진 조금 다른 날을 기대했건만, 솔직히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치고 1987년 6월 10일자 신문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그날까지도 잠실체육관에서 '꽃바람'을 일으키며 '쇼를 하던' 민정당(민주정의당이란다)의 모습이 충성스런 보도 덕분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처럼 코미디 같은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성당을 겹겹이 포위한 경찰들이 내려다보이는 종탑에 섰던 선생의 심정을 그래서 조금 알 것 같았다. 유시춘 선생(이하 호칭 생략)의 눈에 각인된 비둘기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시춘의 6월 10일'을 더욱더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루는 '동생이자 동지'인 유시민이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경찰에 강제 연행당한 날이요, 또 하루는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첫 재판이 열렸던 날이다.

[1984년 9월 30일] 아줌마 일어서다 "의를 구하는 자는 죄인입니까"

▲ 유시민 장관의 1984년 9월.
ⓒ usimin.net
먼저 1984년 9월 30일, 누나 집에 머무르던 동생이 잡혀갔던 그날, 33살 아줌마 유시춘으로 돌아가 보자.

"프락치 사건 얘기를 동생에게 물었더니 '누나, 나와 관계없어' 그래서, 그러려니 했죠. 아마 그만큼 우리가 순진했던 것 같아요. 동생이 잡혀가고 '야, 이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대자보를 써서 학교에 갖다 붙였어요. 명색이 작가니까 잘 쓰지 않았겠습니까?(웃음)

'유시민 가족'이라고 밝히고, '의를 구하는 자는 죄인입니까?'란 제목으로 '구속이 부당하다', 그리고 막 선동했죠. 지금 군사독재에 대항할 수 있는 기본 동력은 학생밖에 없다, 이렇게 '구라'를 풀어 가지고(웃음)…. 학생들이 막 몰려들더라구요."


유시춘의 '성명 1호'였던 셈이다. 당시 그는 두 아이를 둔 엄마이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선생님이었다. 또 등단 작가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밑그림 역시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눈이 뒤집힌" 이유가 동생의 구속 때문만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상수 선배(현 노동부 장관)와 학교 다닐 때 독서 서클을 같이 했어요. 졸업하고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정적 빚이 있었죠. 헌데 전두환 체제가 들어서고는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어요. 살인 집단이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도무지 수용이 되지 않더라구요. 사회는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있고, 제자들은 싸우고 있는데…, 가르치는 자로서 더 이상 침묵하고 있지 못하겠더라구요."

[1985년 7월 15일] 대형사고 쳤다, 헌정사상 첫 대법정 농성

참을 만큼 참은 결과는 이듬해에 곧 나타났다. 1985년에 일어난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구속된 자식들에게 "반성문을 쓰면 석방될 것"이라 호소하는 엄마들, 그들에게 "소용없는 일"이라고 입이 아프게 설득하던 유시춘.

결국 그의 노력은 마침내 민가협의 모태가 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결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결성 5일 만에 '협의회'는 대형 사고를 터뜨린다. 미문화원 사건 재판이 열린 대법정을 일순간에 반독재 시위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

"굉장히 더웠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날씬했거든요(웃음). 광목을 몸에 칭칭 매고 법정에 들어갔어요. 들어가자마자 광목을 풀어 머리띠를 만들었죠.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외친 거죠. '애국학생 용공으로 몰지 말라, 군사독재 하수인 언론은 각성하라'. 150명 들어가는 자리에 한 300명이 들어갔으니…. 법정 안이 완전 용광로였어요. 전두환 집권에 대한 책임을 따져야겠다, 미국 대사관까지 가야겠다고. 광화문 지하도에서 몽땅 종로경찰서로 잡혀갔죠. 처음 경찰서에 들어간 날이었어요. 뭐- 그 다음에는 수시로 들어갔지만(웃음)."

유시춘은 그 날, 당시 민청련 정책실장이었던 장기표(새정치연대 대표)의 놀란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 1985년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가족들이 농성하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용수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김석휘 법무부 장관이 법정 소란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고, 서울대 총장은 구속 학생 제명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다. 또 이건개 공안부장은 법정대처 불충분에 대한 인책성 인사로 인해 고등검찰청으로 전보된다.

그런데 이건개 공안부장 후임으로 들어선 인물이 바로 최환 당시 수석검사였다. '유시춘발 법정 농성'으로 승진된 공안부장이 나중에 박종철 사건 초기 부검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 참 오묘하다고 할 수밖에 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유시춘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시절 묘한 우연과 마주쳤다고 한다.

"어느 날,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보니까 '김석휘 법률사무소'라는 간판이 보이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사람 사무실이 인권위가 있던 건물 4층에 있었더라구요. 나 때문에 쫓겨난 양반이잖아요. 참 세상 인연이 묘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1987년 6월 10일 정오] 푸른 하늘로 '화르르' 흩어지는 비둘기들

▲ 1987년 6월 11일자 <서울신문> 1면. 당시 <서울신문>은 3면에 행사장 사진을 싣고 "헌정상 최초의 평화적 정부 이양을 예고한 6·10 민정당 전당대회의 전경. 체육관을 가득 메운 열기가 이날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고 보도했다.
ⓒ KINDS PDF
이제 '묘한 우연'이 만들어낸 상징들을 머릿 속에 그려 볼 차례다. 바로 1987년 6월 10일 이야기다.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잠실체육관 천정에 매달린 꽃가루통이 터진다. '오색 테이프가 날아다니고, 꽃가루가 휘날려 일순간 꽃바람이 인다'.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순간이다.

같은 시간, 거리에서는 '꽃병'이 날아다니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다. 그리고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린 성공회 대성당 종탑에서는 일제히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독재 시대 종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담은 종소리와 함께 '우연히 비상한 비둘기'를 유시춘은 결코 잊지 못한다.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선언문을 썼어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 독재 승계 절차는 무효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전 국민의 이름으로 반민주적, 반역사적, 반민중적 폭거를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유시춘의 입에서는 막힘 없이 그날의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계훈제 선생(1999년 작고)이 제안하셨어요. 권력 승계 무효화를 선언하고, 분단 독재 세월(42년)을 상징하는 42번의 종을 치자. 그래서 누가 올라가느냐. 지선 스님이 낭독하기로 하고, 내가 따라 올라갔어요. 종루까지 올라가는 통로가 아주 좁았어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올라갔죠.

스피커가 굉장히 성능이 좋았어요. 지선 스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시청과 광화문 일대에 울려 퍼졌죠. 그리고 종을 치니까 종소리에 놀란 비둘기들이 확- 날아올라 방사선으로 흩어지는 거예요. 그 날,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푸른 신록에 쪽빛 하늘. 푸른 하늘을 향해 비둘기들이 '화르르' 흩어지는 모습을 작은 창문을 통해 지켜보면서 '아! 오늘 대회가 성공할지도 모르겠구나'는 느낌을 받았죠.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 순간이 아주 강렬해요."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캄캄한 암흑을 베는 칼날 같은 빛줄기

▲ 대회를 마치고 성공회 대성당을 빠져나오다 경찰과 대치 중인 국본 지도부와 성공회 신부들. 사진 가운데 머리띠를 두른 유시춘 당시 국본 상임집행위원의 모습이 보인다.
ⓒ 유시춘 제공
그리고 오후 6시가 됐다. 힐튼 호텔에서 '민정 연주단'과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노태우의 애창곡 베사메무쵸가 흘러나오던 그 시간, 범국민대회가 열린 성공회 대성당은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에 갇혀 있었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땡노 뉴스'만으로는 바깥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6시 정각이었어요. 애국가 소리와 함께 경적 소리가 막 들리는 거예요. 태평로를 지나가는 차량들이 울렸겠죠. 얼마나 감동이 일렁거렸는지…. 결의문 낭독과 만세 삼창으로 대회를 마치고 '우리도 어떻게든 나가 보자' 해서 지금의 세실 레스토랑 방향으로 나오다가 10분 만에 모두 체포됐죠. 그래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참…, 원 없이 외쳤어요."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유시춘은 '6월 10일'의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남대문경찰서에 갔다가 구로경찰서로 호송될 때까지만 해도 국본 집행부를 어떻게 처리하란 지시가 없는 줄로만 알았다. 구로경찰서 앞마당을 가득 메운 대학생 2000여 명과 마주치고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만 직감했을 뿐이었다.

그는 구로경찰서에서 청량리경찰서로 압송당하는 길에 살짝 열린 문으로 엿본 바깥 풍경을 통해 비로소 승리를 예감했다고 한다.

"마포로 해서 광화문으로, 거기에서 청량리로 가는데…, 글쎄 세상에… 종로통이 완전 전쟁통이더라구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돌멩이들, 그리고 신발들. 뭘 태웠는지 연기가 막 나고 있고, 거리는 물바다고…, 이게 보통으로 성공한 게 아니구나…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라고.

옆에 있던 제정구(1999년 작고) 선생님께 '성공했나보다' 말씀드리니까, 선생님이 '그럼 우린 징역 5년이오(웃음)'. 차 안이 완전히 칠흑 같은 암흑이었거든요. 문틈으로 잠깐 빛이 들어오는데…, 뭐랄까요. 칼날 같은 빛줄기가 캄캄한 암흑을 베고 들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내 평생 잊지 못하는 날이죠."


[에필로그 : 2007년 5월 4일]



여기까지 유시춘의 잊지 못할 '사흘'을 살펴봤다. 그 중에서도 6월 10일은 최근 국가 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대한민국이 '평생' 잊지 못할 날로 공식화됐다. 하지만 6월 정신은 오히려 갈수록 퇴색하는 듯하다. '민주(民主)'가 '금주(金主)'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987년 6월이 갈수록 퇴색하는 듯 합니다.
"서구 사회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로 가는 데 수백 년이 걸렸어요. 그런데 우리는 반세기 만에 여기까지 왔죠. '6월'은 돌연변이적 진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래서 6월 항쟁의 가치를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 같아요. 피와 땀과 눈물을.

이제는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해요. 좋은 교육, 평등 임금, 좋은 환경… 사회권에 대한 관심이 높죠. 하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막강한 국가 가용 자원이 필요해요. 그래서 행정부와 국회의 판단과 선택이 필요하겠죠. 점진적 달성이 필요한 문제라고 봐요. 민주주의, 완성태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더 완성시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도록 만들어야 '6월 정신'이 박제가 되지 않을 수 있겠죠."

- 6월 정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역사는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성장이라는 점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6월 항쟁을 통해 확인한 교훈이죠. 생각해봐요. 86년 10월에 건대 사태 있었죠. 천 명이 넘는 학생 운동 세력이 구속됐어요. 운동가들 모두 수배 아니면 구속이었습니다. 활동가들의 손발이 다 묶인 상태였어요. 그 폐허 위에서 6월 항쟁이 성공한 겁니다. 국민들이 일어나 성공시킨 것이 6월 항쟁이예요.

물론 6월 항쟁은 그 출발부터 지도부가 있었다는 점에서 4·19나 5·18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큰 진화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국본은 바짝 마른 짚더미에 작은 불씨 하나 던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확 일어나 버린 거죠. 그 결과 어땠죠? 반동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6월 항쟁을 통해 확인된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거스를 수 없었어요. 87년 이후 민주주의 성장과 남북 평화 공존이란 방향으로 일관되게 진행됐습니다. 집권자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던 거죠."

"산업화 세력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다큐 6월 항쟁> 발간을 앞두고

▲ 2005년 유시춘씨가 펴낸 민주화운동실록 <우리 강물이 되어>.

6월 항쟁 20년을 맞아 유시춘 위원장이 많은 노력을 들인 사업이 바로 당시 항쟁 참여 주역들이 작성한 수기와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한 역사 기록 <다큐 6월 항쟁> 발간이다.

상임편집위원으로 40여명에 이르는 필자 대부분을 일일이 만났다는 유 위원장은 지난 2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관련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아 단편적 기억들을 복원하는 과정이 무척 힘들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 관련 기록이 없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공신력 있는 집단에 의해 정사로 기록할만한 기초자료가 없다는 말이다. 항쟁 참여 주체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결성이 됐고, 어떤 활동을 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역사라는 것이 대부분 지배자의 기록이다. 저항의 기록은 정사로 남아 있기 어렵다."

- 그와 같은 현상은 일반적이지 않나? 6월 항쟁의 중요성을 깨닫는 주체들이 진작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기록 문화의 후진성 아니겠나.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은 수준이다. 물론 수구 세력과의 대치 국면에서 정국을 끌어가기 위한 에너지들이 집중됐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 이번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재야 운동이나 학생운동 경우에 기록이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압수 수색에 시달렸으니까. 메모지 한 장 갖고 있다가도 징역 사는 판국 아니었나. 이쪽의 경우는 오히려 기록 소각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민주통일'이나 '민중의 소리'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통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복원해냈다. 이해찬 전 총리, 김부겸 의원 등이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했다."

- 짧은 시간에 끝날 일 같지 않다.
"물론이다. 굉장히 불완전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미완의 기록이다. 앞으로 보강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라도 해 놓지 않으면, 후세 역사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 발간 후에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산업화 세력이다. 70∼80년대 학번으로서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에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밑둥을 이뤘던 사람들. 나라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 정치권력의 성격이 어떤지 살필 겨를 없이 경제성장을 위해 총력 투쟁했던 그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자신들의 노력만큼이나 정말 천신만고 끝에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다큐 6월 항쟁>은 1차 원고 검토와 집필이 완료된 상태로, 향후 2차 원고 검토를 거쳐 6월에 정식 출판된다. 자료집 3권, 사진집 1권을 포함해 총 4권으로 발간될 예정인 <다큐 6월 항쟁>은 각 학교, 언론사, 연구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을 포함한 5천여 곳 도서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 이정환

덧붙이는 글 | 기사 원문에 있었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총무'로 바로잡습니다.


태그:#유시춘, #6월 항쟁, #6월 10일, #민주화운동, #다큐 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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