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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신판사 실명공개'와 관련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5일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사과'와 자신의 '용서'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지난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서 "부친께서 하신 일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기 때문에 "응어리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BRI@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용서한 것은 그의 인격적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대통령으로 재직한 기간 동안에도 '복수'를 전혀 꿈꾸지 않았다는 것은 웬만한 인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대통령들은 개인적으로 괘씸한 재벌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돈도 뜯고 큰절도 받곤 했는데, 그런 인물들과 비교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서는 개인적 의도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효과를 산출할 수도 있다. 마치 박근혜 의원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사죄를 한 것처럼 비칠 수도 있고, 또는 말 한마디에 응어리가 풀릴 수 있을 만큼 박정희 정치세력의 죄과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던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은 기본적으로 '유신판사 실명공개'에 대한 야당의 부정적 반응을 겨냥한 것이지만, 자칫하면 과거 유신세력의 죄과를 덮어 주는 엉뚱한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박근혜 의원의 사과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서에 담긴 오류 내지는 모순을 명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3조에서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굳이 이러한 헌법 규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같은 개인주의 혹은 합리주의 시대 하에서는 자식이 부모의 범죄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은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박정희와 박근혜 의원은 전혀 별개의 인격체인데도 한국인들이 그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부녀관계이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연좌제는 헌법에서만 금지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통념상으로도 금지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그 두 부녀를 연결시키는 것은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현재'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박정희의 죄악이 내재되어 있는 정치적 유산(과거의 정치세력과 과거의 사회적 가치관)을 박근혜 의원이 계승 혹은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두 사람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박근혜 의원이 단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게 아니라, 박근혜 의원이 박정희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꼭 정당의 당수가 되어야만 정치적 유산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수 자리에서 물러나 있더라도, 아버지가 남긴 정치세력을 대표하고 그 시대의 사회적 가치나 제도를 복원시키려고 하고 있다면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행위가 내재된 유신시대의 정치적 유산이 아직도 온존하고 있다면, 그 죄과는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의원은 남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신시대의 죄과를 현재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박근혜 의원이 유신시절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는 '유신의 또 다른 장본인'인데, 단지 개인적으로 한마디의 사과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과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한 그 사과에 대한 용서가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진심 어린 사과가 되려면 불법행위의 열매인 그 정치적 유산을 청산해야 하는데, 전임자의 죄과를 여전히 관리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로만 사과한다고 그것을 진정한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유신시대의 잘못을 인정한다면서 유신시대의 정치적 유산을 관리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된 행동일 것이다. 유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유신의 유산을 없애는 것이 옳은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의원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아버지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과거의 부활'을 꿈꾸며 아버지의 유산이 혹여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사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개인적으로도 사과를 전혀 받지 못한 셈이 된다.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의 유산을 청산하지 않는 한, 그가 어떤 말을 하건 간에 그것은 진실 된 사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용서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개인적으로도 전혀 용서한 것이 아닌 셈이 된다. 사과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그 사과가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항상 과거에 매달려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사과하고 또 아무리 용서한다 해도 실질적인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영원히 과거 속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질적인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행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묵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잘못된 과거의 당사자가 진정으로 사죄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행동부터 보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 입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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