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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택 앞의 늙은 은행나무. 녹우당의 역사를 암시한다.
ⓒ 정윤섭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나라에는 많은 명문가가 있었지만 집안의 전통과 가계(家系)를 오래도록 이어간 집안은 그리 많지 않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 시조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고산 윤선도를 대표로 하는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조선왕조의 시작과 함께 5백 년의 역사를 함께 하며 일제 하와 6·25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그 맥을 온전히 이어오고 있다. 이런 오랜 가계의 이어짐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고산의 5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이곳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에 뿌리를 내린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학문과 예술 등을 통해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이는 쉼 없는 변화에 대한 도전과 창조정신,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에 부딪히며 살아갔던 한 가문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녹우당에 남아있는 국보 1점, 보물 3점 등 문화재 가치가 있는 수십 점을 비롯, 현재 남아있는 수천 점의 문화유산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많은 유산이 잘 남아있다는 것은 문중 나름대로 독특한 학문과 예술을 추구한 가풍의 전승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은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룬 곳을 찾아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택하였던 것을 보면 주거공간의 터 자체가 자연친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도 가장 좋은 터라고 소문난 녹우당은 생태환경적 주거 공간으로서도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히 '녹색(綠色)의 장원(莊園)'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러한 녹우당 해남윤씨 인물 중에 자연을 가장 잘 경영한 인물은 고산 윤선도다. 그의 문학세계가 이미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남겨놓은 자취들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의 공간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연재 글은 자연과의 일치된 공간을 추구하며 이러한 장원의 공간에 학문과 예술의 뿌리를 내린 해남윤씨가의 5백 년 역사 속으로 떠나가는 여로이다.


▲ 고택 후원의 동백나무
ⓒ 정윤섭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터 '녹우당'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남도의 끝자락 땅끝 해남. 지난 겨울 무던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던 탓인지 봄이 오는 소리가 약간 더딘 것 같다. 정원에 심은 매화가 한두 그루 이미 피어있을 때이지만 아직 꽃 몽우리만 부풀리고 있다.

하지만 경칩이 찾아온 땅끝의 들녘은 벌써 봄이 실려와 있다. 이때쯤은 겨울 속에 내내 웅크리듯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먼 남도 길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때이다.

해남읍을 지나 빈 들판을 약 5분쯤 달리다 보면 '녹우당'을 듬직하게 받치고 있는 덕음산(德陰山)이 나온다. 덕음산의 '덕(德)' 자는 해남윤씨가의 유거지에는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어 눈여겨 볼만 하다. 덕은 베푼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유교 윤리에서도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남윤씨가의 가풍 속에서도 실천윤리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어서 지명을 통해서도 이러한 덕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덕음산은 산의 이름처럼 멀리서 봐도 덕스럽게 보인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좌우로 마을을 감싸 안은 채 산세를 뻗치고 있어 어머니의 품 같은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풍수가들이 이곳을 최고의 길지로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가로수 대신 전봇대가 대신하고 있는 아스팔트 길로 덕음산을 향해 가면 녹우당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 녹우당으로 가는 길목의 차밭도 푸르다.
ⓒ 정윤섭
관광 비수기면 그렇듯 녹우당 또한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 뜸하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곳이 관광지가 되고 나서 생긴 식당 1곳과 조립식 임시건물로 들어선 전기회사만 아니면 모두 농사짓는 사람들뿐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선 이들 건물은 아마 전체적인 마을의 공간 속에서 매우 이질적인 건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안에 소득작물로 심어진 참다래(키위)밭은 이 마을의 농업환경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이 다래 밭은 해남지역에서도 연조가 있는 곳이지만 참다래의 품질향상을 위해 쳐 놓은 그물망은 경관을 해치는 작용도 하고 있다.

연동 마을은 '녹우당'을 중심으로 농업기반 속에 살았던 이곳의 생활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곳 연동마을의 공간구성은 3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녹우당 종택을 중심으로 한 맨 위 지역, 연지가 있는 곳을 중심인 중간 지역, 그리고 가장 아래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구성은 녹우당 종택을 중심으로 한 신분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겨울이면 더욱 푸른 녹우당

녹우당은 아직 그 장원의 숲을 느끼기에는 겨울의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겨울 동안도 동백나무, 국활 나무나 대나무는 늘 푸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가지 더는 덕음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241호)으로, 겨울이 되면 오히려 더 빛난다. 여름 동안은 산의 짙은 녹음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비자나무이지만 겨울에는 소나무들 속에서도 독야청청하듯 그 푸른빛이 더 선명하다.

실록이 절정으로 치닫는 5월을 넘어 녹우당을 방문한 사람은 덕음산을 뒤로 울창한 자연의 숲에 자리 잡고 있는 녹우당의 모습에 이곳이 정말 '녹색의 장원(莊園)'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비자나무숲은 웰빙 숲길이다.
ⓒ 정윤섭
녹우당이 있는 마을은 현재 연동(蓮洞)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하얀 연꽃 마을'이라는 뜻의 백연동(白蓮洞)이라 불렀다. 이곳의 고택을 중심으로 한 영역을 보통 '녹우당'이라고 부른다. 이는 건물에 대한 상징적인 명칭의 의미도 있지만 이곳 해남윤씨가의 종택과 그 주변 자연과의 일치된 모습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녹우당(綠雨堂)'은 이곳 종택의 당호(堂號)로 녹우당의 공간적 이미지와 상징적 이미지를 잘 담고 있다. 이 당호는 공재 윤두서(1668~1715)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1662~1723)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옥동 이서는 조선후기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의 형으로 공재와 절친한 사이였던 만큼 아마도 이곳 녹우당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종택의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녹우당 현판
ⓒ 정윤섭
녹우당을 찾는 사람들은 사랑채에 걸린 현판을 보고 한번쯤 당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녹우당을 안내하는 사람들 또한 가장 먼저 이 당호를 통해 녹우당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녹우당의 당호 뜻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는데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고택 앞에 서 있는 늙은 은행나무에서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비처럼 떨어진다 해서 지어졌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녹우(綠雨)가 '푸른 비'라는 뜻이니까 가장 직설적인 해석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고택의 뒤뜰 대나무 숲이나 뒷산 비자나무 숲에서 나는 바람소리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녹우당'이라는 뜻을 가장 잘 해석하고 있는 것은 계절적인 시기에 맞추어 녹우에 내리는 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호는 보통 한 인물의 절개나 기상, 그 집안이 추구했던 이상을 담아내고 있는 것을 볼 때 녹우당은 공재의 철학과 학문적 사유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녹우는 보통 계절적인 이치로 볼 때 봄비인 세우(細雨)에 이어 내리는 비로 초목의 새잎이 연한 초록빛을 띨 무렵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때문에 녹우는 대지의 모든 생물에게 생명의 힘과 성장의 양분을 뿌려주어 대지를 푸르게 해주는 비로 바야흐로 이곳이 '녹색의 장원'으로 물들어 가는 때라고 할 수 있다.

푸르다는 것은 선비의 절개나 지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고산이 오우가를 통해 대상으로 삼은 소나무나 대나무가 그렇듯 자연 사상과 사대부가의 사유의식을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으로 '녹우당'은 이곳 고택에 대한 이미지와 상징성이 매우 잘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푸른 상록수림의 돌담길
ⓒ 정윤섭
녹우당은 덕음산을 배경으로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녹우당 고택 앞으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형국이어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마을 공간배치를 이루고 있다.

녹우당의 앞쪽을 빼고는 주변 숲과 잘 갖추어진 주변 조경이 완성된 하나의 자연공원을 연상케 한다. 5백여 년의 세월동안 고택의 주변은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 속에서 때론 허물어졌다가 다시 복원되기도 하면서 서로 합일된 일치점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연을 잘 경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연을 포용하기보다는 이용하기만 하여 나중에는 그곳이 황폐화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곳 녹우당은 자연의 최고 경영자였던 고산 윤선도가 종손으로 지켜 온 종택이다. 그의 자연경영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덕분에 녹우당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장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잘 이룬 터에서 녹우당은 조선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 500년 역사를 이어온 고산 윤선도 해남 윤씨가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자연친화적인 삶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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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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