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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
ⓒ 민은실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가 "눈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열었다. 눈이다. 올해에 두 번째로 내린 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 언제 봐도 신선한 풍경이다. 특별한 약속도 없고, 나갈 채비를 한 것도 아닌데 그 풍경 속에 있고 싶어졌다.

맞다. 치약이 떨어졌으니 핑계 삼아 슈퍼마켓이나 다녀오자. 잠바를 입고 장갑을 꼈다. 계단에 쌓인 눈 때문에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 했지만 어쨌든 괜찮았다. 여전히 짓눈개비가 흩날리고 눈은 소리 없이 조용히 쌓였다. 가로등 불빛에 비춰진 눈 쌓인 골목길은 적요했다. 살포시 걸으며 자동차에 쌓인 눈으로 눈뭉치를 만들었다.

왼쪽 세 번째 손가락에 구멍이 난 장갑 때문인지 차가운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중학교 3학년 때 첫눈 오던 날 운동장에서 만졌던 그 눈의 감촉이다. 눈은 풍경이자 추억이다. 눈사람이라도 만들까 싶었는데 골목길의 대문 앞에 작은 눈사람 두 개가 나란히 있다.

그 순간 며칠 전에 읽은 <설국>이 떠올랐다. 시마무라가 고마코와 온천에서 만나는 장면, 그녀의 청순한 정열에 감동하는 그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국>은 도쿄 출생인 시마무라가 설국의 기생 고마코에게 끌려서 설국의 온천장을 세 번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고마코를 옆에 두고도 귀애하는 요코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시마무라에게 기묘한 감정을 안겨 주었던 곳, 설원이 펼쳐진 눈의 고장인 그 곳의 배경이 오늘 같은 날과 꼭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움을 오버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인생을 함께 해 온 마누라와 산책하면서 조용히 읊조리는 것 같은 문체다.

담담한 어투로 겨울 풍경과 주인공들의 심리를 섬세한 터치로 표현했다는 것이 <설국>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시마무라가 산책하는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사각사각하는 눈 밟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종종 <설국>이 떠오를 것이다. 적요한 설원과 그 풍경 속에서 가슴 깊이, 치열하게 사랑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안쓰러운 고마코가 말이다. 나는 치약 4개, 우유비누 2개, 물 한 병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콧노래를 불렀다. 덕분에 눈의 감촉도 느껴보고, <설국> 속 주인공에게 동화 되어버리기도 하고…. 자연이 주는 충만한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눈과 <설국>은 지구에서 내게 주는 1월의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싶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민음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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