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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 책 표지
ⓒ 한길사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에 우리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일제 식민지와 해방, 한국전쟁, 군사독재를 거쳐서 문민, 국민의 정부를 넘어서 현 정부, 그리고 핵문제에 직면한 지금의 우리 모습까지. 그속에 한국은 진정 자유민주주의, 아니 완전한 자주 국가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인가. 혹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그런 확신을 할지 모른다.

이런 한국 상황에 여전히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이가 리영희 선생이다. 리영희 선생은 당대의 질곡에서 자유로운 이가 드문 이 시대에 올곧게 살아온 언론계의 사표이자 지성이다. 그는 당대 미국의 치마폭에서 헤매던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실체는 물론이고 북한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준 이다.

2000년 리 선생의 병환소식을 들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서서히 몸을 회복했고, 이제는 공공회견 장소에서 연설할 정도로 회복했으니 우리 지성계로서는 큰 행운이다. 이번에 읽은 리영희 선생의 <대화>는 리영희 선생과 후배 임헌영 선생의 대화를 담은 기록으로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 역시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등의 저서를 통해 한국 현대사에 관한 시야를 바로잡았고, 후배들에게도 이 책을 전달했으니 적잖은 도움을 받은 셈이다. 사실 우리 시대는 리영희 선생을 통해 기존의 치졸한 이데올로기나 정치 현실의 구름을 걷어낼 수 있었다.

<대화>는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는 1929년 공무원 아버지와 지주집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태어난 곳은 금의 고장 평남 운산이지만 아버지를 따라 삭주로 가서 성장한다. 해방(17세), 한국전쟁(22세)을 거쳤으니 현대사의 격류를 고스란히 겪었다. 통역 장교로 일하면서 그는 인생의 가치를 바꾸는 몇 가지 경험을 갖는다. 권총에도 전혀 떨지 않는 기개 있는 기생을 만나서 신분과 권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또 자신을 대신해 죽은 것 같은 후배 장교를 보면서 인생이 '우연의 장난'에 움직이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우연 속에서 필연적인 지성을 무장한다. 지속적인 탐구욕과 일각이라도 낭비하지 않는 자세로 동아시아 및 세계의 흐름을 포착하는 힘을 기른다. 이후 합동통신 및 조선일보 기자 등을 거치면서 탐사보도 특종을 만들어내는 한편 미국 및 군사정권이 감추려는 베일을 하나하나씩 벗겨낸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압력이 가해진다. 기자에서 쫓겨나 얻는 교수라는 직업도 안정을 주지 못했고 양계장도 생각한다.

언론인들이 권력의 주구로 바뀌는 상황에서, 가족조차 부양하기 힘들지만 그의 신념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누옥은 살아있는 지식인들의 현장이었다.

그는 우선 우리나라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국의 실체를 간파한다. 이승만 정권이후 계속되는 정권과의 거래 및 베트남을 비롯해 각지에서 벌이는 전쟁의 실상을 파헤친다. 중국에 대한 관심도 특별한데, 미국 측 정보 등을 확인해 중국의 힘과 변화를 포착해낸 의미 있는 저작들을 쏟아낸다. 또 일본의 실체를 정리하는 한편 무조건적인 질타를 경계하고, 정확한 시각을 강조한다.

가장 관심을 갖는 곳은 북한이다. 한국전쟁 후의 변화와 긴장, 또 방어기제, 군비의 실상 등을 파헤쳐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려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결국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극복한 레드 콤플렉스의 장벽도 리 선생을 비롯한 이들의 노력 때문이다.

리 선생을 보면서 다시금 각성하게 되는 것은 갈수록 퇴조하는 나의 독서욕이다. 정보의 핵심에 있는 자료를 확보해 읽는 한편 인문과 역사, 국제관계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한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언론, 학계, 종교 등의 문제를 포괄적 지성으로 분석해 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본질이 아닌 왜곡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다. 권력의 충견이 되었으면서도 반성하지 못하는 한국 기독교의 실상도 빠짐없이 풀어낸다.

중국에 있는 만큼 리 선생의 중국관에 관심이 갔다. 가장 핵심에 있는 글은 1988년 11월6일자 한겨레신문에 쓴 '당산 시민을 위한 애도사'일 것이다. 이글은 1976년 대지진 당시 도시인 절반이 죽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이성적으로 행동했던 당산시와 몇 달 뒤 12시간 정전으로 연옥의 상태로 빠진 뉴욕을 비교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교인 이 글의 마지막은 투자유치를 위해 한국에 온 당산시 투자 유치단에 대한 쓸쓸한 환영사다. 결국 이제 당산시민들도 뉴요커들과 같은 물신주의에 빠지게 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기자 역시 중국에 살기 때문에 리 선생의 그 글이 갈수록 실제화 되는 중국의 모습을 실감한다.

리영희 선생은 어떤 힘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일관'된 내공을 갖고 있다. 그런 일관된 힘으로 보는 우리의 앞길에도 그는 여전히 충고를 던진다. 11일 급히 부시를 만나러간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워싱턴에 불려가 (북핵문제와 관련해) 엄청난 협박을 받고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조언을 한다. 그가 보는 미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한 충고다.

책에서 보는 그의 답변들에게는 거북스러울 만큼 당당함이 배어 있다. 사실 거북스러움을 넘어서도 좋으니, 이 시대에 그와 같이 공부하고, 실천하는 지성이 좀더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아울러 저토록 위대한 지성들이 떠나면 이 나라 사상계는 누가 채울지 아울러 걱정이 들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북경독서인클럽(http://cafe.naver.com/bjreading)에도 올립니다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한길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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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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