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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씨가 일본잡지 <정론>에 기고했다는 글을 읽어보면 우리 대학들이 왜 국제적 랭킹에서 한참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나는지 금방 이해된다. 이런 사람이 교수로 오랫동안 있을 수 있는 대학이 어떻게 세계적 수준이 될 수 있겠는가? 학자는 객관적 사실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의 글을 보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이해 수준이 초등학생만도 못하다. 많은 사실 중에서 객관적 사실에 눈 감아 버리고 자신의 편의에 따라 주관적으로 취사선택하고 해석하고 있다. 학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능력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학자는 단순한 지식 기능공이 아니다. 확고한 역사관, 가치관, 철학, 그리고 양심을 갖추고 있어야 진정한 학자이다. 한승조씨에게는 오로지 강자의 논리, 힘의 논리만 있을 뿐이다. 기본적인 철학교육, 도덕교육조차 받지 못한 지식기능공 수준이다.

한승조씨의 기고문을 읽어보면 그가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개들은 먹고 있는 먹이를 빼앗으면 주인에게도 달려든다(물론 그렇지 않은 개도 있다. 그래서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도 먹고 있는 음식이나 장난감을 빼앗으면 제 정신을 잃고 난리가 난다. 정신적 능력이 박약한 상태에서는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그것을 빼앗긴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절대적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친일파의 후예, 정권을 강탈한 군인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그러한 후원세력이 몰락한다는 것은 개들에게서 밥그릇을 박탈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문제일 수 있다.

정신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불안 초조감이 극에 달하고 마침내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잃는 단계에 이른다. 한승조씨의 글은 이런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일본 최고의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한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서둘러 치료를 받아볼 것을 권한다.
이런 까닭에 사실 그의 글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일본의 잡지에다 이 글을 썼다. 일본인 중에도 정신병자가 꽤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량한 일본인이 다수이다. 그들이 혹시라도 한국 명문대학의 명예교수가 쓴 글이라는 사실 때문에 헷갈려 할까봐 몇 가지 논리적 오류를 지적한다. (파란색 부분은 한씨의 글.)

친일 반민족행위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단은 좌파세력?

본래 어느 정파보다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에서 공산주의집단을 능가하는 정파는 없었다. 국가 중에서도 일본의 과거청산을 강조하며 일본을 압박하는 것이 중국과 북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日帝가 가장 위험시하고 가혹하게 탄압했던 대상도 공산주의 집단이었다. 가히 불구대천의 원수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終戰후 일제 청산과 친일파숙청에 대하여 시종일관 적극성을 보여 온 것이 북한공산주의와 그 노선을 추종하는 한국의 386세대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다.

나치 독일 역시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나치 패망 후 독일의 우파 정부조차 반세기 동안 나치 전범들을 추적해 처벌했다. 한씨 논리대로라면 기민당 등 독일의 우파정권도 좌파 공산주의여야 한다. 아울러 독일이 패전 후 지나칠 정도로 과거를 청산해 왔음에도 프랑스가 종전기념행사에 독일 총리를 초청한 것은 2004년도가 처음이다. 프랑스의 우파정부 역시 좌파 공산주의 세력이여야 맞다. 이러한 사례들에 눈 감아 버리고 중국 북한의 사례를 들어 일본을 압박하니까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논리는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한씨는 국제정치를 전공한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정치만 공부한 게 틀림없다.

또한 386세력과 노무현 정권이 북한공산주의 노선을 추종하고 있다고 말한다. 추종이라는 말은 어떠한 입장을 맹목적 무비판적으로 따를 때 쓰는 말이다. 기업의 과거 분식을 사면해주고, 미국의 뜻에 따라 이라크에 파병하고, 미군의 주둔을 위해 예산을 지원하는 노무현정권의 행동이 북한과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역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합리적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친일 과거 청산 = 공산주의 = 노무현 정권’이라는 비합리적 선입관에 기초한 주장이다. 이런 논법이라면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고 미국도 핵무기를 갖고 있다, 그러니 미국도 공산주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사실해석 능력조차 보이지 않는 억지다.

북한을 보면 민족정기 바로 세우는 게 무의미?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는 북한이며 그러지 못하여 혼탁하며 발전하지 못한 사회가 남한이라고 공산주의자나 좌파들은 일상적으로 주장해왔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하였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지 못하고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다면 그들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한씨는 우선 사실인식 능력의 박약함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과거청산을 말하는 사람들이 친일청산이 되지 않아 우리 사회가 혼탁하고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때, 여기서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청산은 정신의 차원이며 경제발전은 물질적 차원이다.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게 아니다. 역으로 정신은 빈곤한데 잘사는 졸부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발전을 물질적 풍요로만 보는 것은 일차원적 사고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막강한 군사력, 세계적 기업, 세계적 과학자, 이런 것만 갖추고 있으면 진정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진정한 발전이란 여기에 더해 정의가 살아 숨쉬고, 국민들의 정신세계가 넉넉하고, 인류의 미래를 이끌어 갈만한 철학자가 있고, 우수한 문화를 갖춘 사회일 것이다.

과거청산론자들이 말하는 발전이란 이런 것이다. 대학교수까지 했다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 언어이해능력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한씨는 중학생 정도면 다 아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혼동하고 있다(정말 지적능력이 의심된다).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나라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역사가 바로 서면 당연한 귀결로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은 충분조건이다. 과거청산론자들은 필요조건으로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친일청산을 했으니 당연히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씨는 필요조건을 충분조건인 양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북한이 발전하지 못했으니 민족정기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친일도 그 상황에서는 최선?

크게 보아서 친일파라고 지목되는 사람들 중에는 다음 세 가지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부류는 한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뜻있는 좋은 일을 하려다 보니 최소한 일본총독부의 정책에 부응하고 협력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 잡지를 발행하려다 보니 더러는 일본 정책에 유리한 보도나 논평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유지하자니 일본어로 교육해야했고 또 조선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힐책했어야 했을 것이다.

둘째 부류는 일본이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았으니 한국인의 대우 개선과 정치적 참여 또는 자치의 권리라도 얻기 위하여 일본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일본이 원자탄을 얻어맞아 또 떨어뜨리겠다는 협박에 굴복하여 연합국에 무조건항복(無條件降伏)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예측하였던가? 그런 정세를 예측할 수가 있었던들 그처럼 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협조하였겠는가?
사람은 神이 아님으로 수시로 변하는 정세에서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다. 정세 판단 착오는 행동이나 대책선택에 대한 판단착오를 나타내서 잘 하려는 의도가 도리어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마다 그 정세 판단을 잘못한 결정권자를 응징하며 처벌해야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냐 하는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난 친일행위를 반민족 행위로 몰아서 규탄하고 응징하려는 법안을 공정하며 적절한입법이라고 볼 수가 있겠느냐?


이 대목은 한씨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온 사람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사고방식을 일컬어 사람들은 기회주의라고 부른다. 짐승들도 상황판단 능력은 있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게 무엇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정신적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기회주의자들을 역사와 인류가 사람 이하로 취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존경받는 지식인들은 뚜렷한 가치관과 신념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일제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세의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당당한 자주민족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다. 올바른 정신능력을 지닌 이들은 당연히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길을 택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지만 그게 배운 자의 당연한 도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일제가 패망할지 아닐지의 문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전략수립을 위한 상황판단의 문제였다. 한씨 말처럼 어디에 붙는 게 좋을지 처세술을 발휘하기 위한 차원의 상황판단이 아니다.

한씨는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항상 최선의 상황판단을 하느냐, 그 과정에서 판단을 잘못해 한 행위들이 비난받아야 하느냐는 식의 주장을 편다. 그의 논법을 따라보자.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통일할 듯 밀고 내려왔다. 그 상황에서 위의 친일행위자들처럼 공산군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처벌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된다. 결국 그 자신도 북한정권 아래 있었다면 반공을 버리고 친공 행위를 했었을 것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신이 아닌데 북한군이 다시 밀려 올라갈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말하면서.

일본이 더 죽이지 않은 게 다행?

일본은 3.1운동 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수는 천만이 아니라 천명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 같다. 다만 경찰이나 헌병에 의하여 체포되어서 獄苦(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더 많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또 한국농민을 만주의 간도로 이주를 권장하였다고 하나 소련과 같은 강제성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서 한반도가 러시아에 의하여 점거되지 않고 일본에게 합방되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오히려 근대화가 촉진됨으로써 잃은 것에 못지않게 얻은 것이 더 많았음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한씨는 러시아는 최악이라고 가정해두고, 가정을 바탕으로 일본은 차악이며, 차악은 용인될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고 있다. 똑 같은 방식으로 가정을 해보자. 한국전쟁 당시 남이든 북이든 수많은 양민을 죽였다. 만일 국군이 1백만명을 죽였고 북한군이 90만명을 죽였다면 북한의 행위는 전쟁상황에서 정당한 것인가? 그리고 북한군 치하에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최악이든 차악이든 악은 악이다. 악은 용인될 수 없다. 비난받고 응징 받아야 한다. 온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덜 죽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한씨는 또한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주장을 펴야 한다. 일제 강점 하에 학살당하고 고문당하고 핍박당하고 해외를 떠돈 한민족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말을 하라. 일제의 행위가 얼마나 잔학하고 모진 것이었는지 역사책이라도 들춰보고 난 뒤 말을 해야 한다.

근대화가 촉진됨으로써 얻은 게 더 많다는 한씨의 주장은 식민주의 사관에 젖은 인간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한씨는 일제가 철도를 놓고 공장을 지은 것을 근대화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제국주의의 속성은 경제적 수탈이다. 우월한 군사력과 자본력, 생산력을 바탕으로 남의 나라 자원을 빼앗아가기 위해 침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쌀을 빼앗아가기 위한 철도가 필요하고, 자원을 가공하기 위한 공장이 필요해진다. 그것이 한국을 위해 근대화를 촉진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얻은 게 더 많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때의 근거는 일제가 한반도에서 얼마나 수탈해갔는지, 아니면 우리 민족의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기여했는지 구체적인 데이터를 놓고 말해야 한다.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일제가 한반도의 근대화를 촉진했고, 우리가 얻은 게 더 많다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일본의 극우파들이나 할 수 있는 억지주장이다.

일제 덕분에 민족문화가 더 발전 강화되었다?

필자가 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이 不幸중 多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식민통치의 기간을 통해서 더욱 성장 발전 강화되었을망정 소실되거나 약화된 것이 없었다. 한국의 역사나 語文學 등 韓國學(한국학연구)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이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과 그의 한국인 弟子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말에 또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로 받아드리는 객관성을 중시함이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물론 일제가 학교에서 한글교육을 폐지하며 朝鮮語(조선어)의 연구와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1937년부터이며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끝났음으로 한국어문학에 큰 손실을 입은 바가 없었다. 만일 한반도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나 英美 등 서방국가에 의하여 식민지 지배를 받았더라면 그 문화적이 뿌리가 너무 다름으로 인하여 민족문화의 성장이나 심화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 같다.


일제하에서 민족문화가 발전 강화되었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를 갖고 하는 말인가? 한씨가 이해하는 민족문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씨는 일제하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최소한의 한국사 공부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구체적인 사례야 수없이 많겠지만 이 부분의 반박은 국사교과서와 역사가들에게 맡겨두겠다.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이 일본인 학자들이라는 주장 역시 우리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도 갖추지 못한 데서 나온 유치한 주장이다. 그는 서양식 학문체계만이 우위에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였고 그 결과 수많은 학자들이 양산되었다. 퇴계의 성리학은 그 본토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조차 인정하고 연구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대부분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해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학문을 이용했다. 그 결과 그 밑에서 공부한 한승조씨 같은 한인들이 식민사관에 젖어 우리 역사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이러한 암흑기는 60년대까지 이어져 우리 학문의 올바른 발전을 가로막았다. 70년대 이후에야 한국학 연구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닦아놓은 게 아니라 잘못된 길로 왜곡시켰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의 성장 발전의욕을 자극해 문명화에 기여?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영어의 sibling rivalry(어린 자매들 간의 경쟁의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인에 대하여는 무조건 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을 갖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한국인들의 성장 발전의 의욕을 크게 자극하여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솔직히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한씨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고 논산훈련소의 소대장처럼 인분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이와 다를 바 무엇인가? 그러면 그는 더 젊은 나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으로 자극을 받아 “내가 식민주의 사관에 젖어 미친 소리를 해댔구나” 하며 반성하고 분발하여 온전한 정신이 박힌 문명인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고를 갖도록 내가 기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씨의 논리대로라면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일제 지배는 축복이며 고마워할 일?

위와 같은 점을 감안 할 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 해야 할 사유는 될지언정 日政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취급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사의 진상규명 노력도 이런 거시적이며 객관적인 차원에서 또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하여 긍정적인 시각에서 진상을 규명하려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해 반박할 필요가 있을까?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에게는 이 말이 맞다. 그러나 죽임과 고문과 수탈 속에서 노예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아온 수많은 이들이 있다면 이건 차마 할 수 없는 망언이다. 이완용이 살아 돌아와도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잔악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무지한 게 죄이다. 제2의 이완용, 제2의 한승조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한 역사교육을 역사학자들과 교육당국에 당부할 뿐이다.

한국인은 막가는 나라의 민초?

어질고 고상한 사람들이나 '잘난 국민'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과거지사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를 골몰하여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한국국민은 이미 오랜 시일이 흘러가 버린 일제시대나 해방 후의 이념 대립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더 우려먹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과거지사에 신경을 집중하노라고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며 한시 바삐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막가는 나라의 民草(민초)들임을 보여준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해도 막 가는 정신질환자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므로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외국인 배척하는 저질-사악한 한국민?

'못난 국민'성 이 과거사 왜곡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부추겨 왔다. 잘난 국민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두드러진 개방성과 포용력 그리고 세계성에 있다. 이 말은 한국국민이 타 국민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악의적이며 좁은 민족주의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못난 국민, 저질 사악한 국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 중국에서 온 조선족을 무시하대하고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이며 미국인들에 대하여 오만 불손하게 대하는 경향도 빗나간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소산이다. 이렇게 외국인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위대한 조선민족'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조선족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등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하루빨리 개선해야만 일등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한국민만 갖고 있는 저질스런 습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 편견의 소산이다. 일본은 일제 시대에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한국민이나 중국인들에게 배타적인 행동을 해왔다. 재일 한국인들이 겪은 말도 못하는 차별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씨는 반공의 보루인 미국을 숭상하는 모양인데 그들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게 저지르는 편견과 차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민족에 대한 이런 배타적 감정과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민뿐 아니라 한씨가 높이 평가하는 듯한 미국인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구 상 모든 민족이 저질이고 사악하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민만이 그런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떤 근거를 토대로 한 것인가? 한씨 개인의 편견일 뿐이다.

종군 위안부눈 성의 혁명무기화?

수준 이하의 좌파적인 心性(심성) 중에는 일본상대의 종군위안부의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性(성)도 혁명의 武器(무기)로 활용하라는 말이 있다. 태평양전쟁 중에 한국인 여성이 挺身隊(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性的(성적)인 위안물로 이용되었다 하여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는 모습은 일본을 나락에 밀어 떨어뜨리려다가 자신들이 먼저 떨어지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들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일본이 한국여성을 전쟁 중에 그렇게 이용했다는 것도 전쟁 중의 일시적이면서도 예외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런 정책의 희생자가 수천, 수만 명이 된다면 六何原則에 따르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어서 정식으로 거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 많았던 수도 아니었는데 그런 봉변을 당했다고 진술하는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노파를 끌고 다니면서 과장된 사실을 믿게 해줄 만한 명백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듭 배상금을 요구하며 그나마 이미 받은 것 이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몇 십년 동안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은 고상한 민족의 행동거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정말 정신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신병자라도 한국 사람이라면 이렇게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차마 반박할 필요조차 못 느끼지만 사실관계만 적겠다.
첫 째, 사죄와 보상을 계속 요구한다고 하는데, 일본은 이 문제에 관해 한 번도 공식 사죄한 적이 없다. 사죄를 정중하게 했는데 또 요구한다면 ‘계속’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한씨의 주장은 사죄를 요구할 일이 아니니 요구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일제가 전쟁 중에 종군위안부를 이용한 게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일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당사자들의 증언과 기록 등을 살펴보고 하는 말인가?
셋째, 그리 많은 수도 아니고 사실도 과장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당사자들의 증언을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반박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넷째, 한씨는 이미 받은 것 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몇십년 동안 물고늘어져왔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는 물론이고 한 푼도 보상한 점이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자체를 왜곡하면 거기에 기반을 둔 논리와 주장은 허구가 된다.

상생적이며 상극적인 한일관계?

한일관계는 그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발생하고 지속되어 오던 관계였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양국관계 속에는 시혜적 상생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해악적인 상극관계도 混在해왔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난 2천여년 동안 줄곧 일본에 문물을 전하면서 시혜적 관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은 고려 때부터 끊이지 않았던 왜구의 노략질, 조선시대의 2차례 왜란,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35년 강점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말 못할 해악을 저질러왔다. 우리의 많은 문화재도 훔쳐갔다. 고려시대의 미술사를 연구하려면 일본에 가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침략과 도둑질로 일관한 일본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살인강도범과 피해자가족을 두고 서로 간에 상생과 상극의 관계가 혼재하는 것이니 미래지향적으로 잘해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근본적 논리의 오류는 한씨가 역사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한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이완용이 애국자로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親日行爲는 산업화 단계 내지 민족주의 시대에는 罪惡視(죄악시)되며 반민족행위로 지목되어 비판 규탄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탈 산업사회(post industrial society)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에 와서는 친일행위가 도리어 애국애족행위로 인식되고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사회를 맞이하게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젊은 세대를 좌경화의 추세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또 반일교육을 받아 온 세대도 점진적으로나마 인식의 전환 및 태도변화로 유도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노력해야만 할 분야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일제의 죄악이다. 그들은 수많은 우리 겨레를 죽이고 고문하고 착취했다. 우리 문화와 말까지 말살하려 했다. 수많은 동포를 전쟁터와 공장으로 끌고 갔다. 심지어 우리의 젊은 여성들을 끌고 가 일본군의 노리개로 삼았다. 이러한 행위는 산업사회건 탈산업사회건 평가가 달라질 수 없는 범죄행위다. 범죄행위가 시대가 달라진다고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주범이라면 그에 빌붙어 협조한 조선인들은 공범이다.

주범과 공범은 모두 역사의 평가와 단죄를 받아야 한다. 탈산업사회가 되면 이런 행위가 환영받게 될 것이라는 한씨의 주장은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데서 나온 것이다. 한씨의 논리대로라면 이완용과 송병준도 머지않아 애국자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선악에 대한 최소한의 가치판단 능력조차 상실한 자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승조씨의 기고문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지적하려 애썼다. 감정적으로 흥분하기보다 무엇이 문제인지 조목조목 따져보려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다.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격분할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파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 사관으로 한국사를 본다. 그 논리와 주장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첫째, 한국과 일본은 부리가 같다는 동근론. 원래 인종과 조상이 같은 하나였으므로 일제 강점은 갈라졌던 둘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니 잘못이 아니다.
둘째, 조선 미개론. 구한말의 조선은 일본의 천년 전 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미개했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통해 한국의 사회발전 상태를 천년이나 끌어올렸다.
셋째, 외세의존론. 한국은 역사를 통해 늘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다. 고조선은 한나라에, 삼국통일 후 북쪽은 당나라에, 고려 때는 원나라에, 조선 때는 청나라에. 역사를 통해 보듯 한국은 외세지배에 익숙해있고 독립국가를 끌어갈 능력이 없다. 그러니 일본이 청나라를 대신해 한반도를 지배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서구 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같은 뿌리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게 훨씬 나았다.
넷째, 근대화 기여론. 일본은 식민지배를 통해 한반도에 공장과 철도를 건설하는 등 근대화에 기여했다. 일제의 기여가 있었기에 한국이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식민주의 사관은 일본학자들이 만들어내고 일제하에서 수십 동안 한국인들을 세뇌시켰다. 일제 때 공부한 사람들이 후세의 교육을 맡았던 60년대까지도 이런 논리를 앵무새처럼 되 내는 교육자들이 많았다. 민족주의 사관을 통해 이처럼 잘못된 역사인식과 교육을 바로잡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한승조씨의 기고문을 보면 이런 식민주의 사관의 전형이다. 일제하에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테니 이런 주장을 펼 만도 하다. 아쉬운 것은 명색이 교수를 했다는 사람이 학교에서 배우지는 못했더라도 스스로 얼마든지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이런 식의 글을 버젓이 쓰지는 않았으리라.

한씨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그가 거의 정신병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논리도 엉망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조차 박약하다. 객관적 사실조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씨의 글에 격분하다가 이제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교수까지 지낸 사람을 이런 수준으로 떨어뜨린 것은 그 만의 잘못은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한씨 같은 정신지환 수준의 사람이 그 뿐이겠는가? 많지는 않더라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

더 큰 잘못은 그들보다 우리 사회에 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능력은 떨어지는 식민주의자들에게는 해방 후 철저한 재교육이 필요했다. 강제로라도 우리 역사를 바로 알도록 교육을 시켰다면 이렇게 불행하게 평생을 살아온 이들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온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저렇게 인생을 마감할 사람들이 측은하기도 하다. 그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의 기회만 제공했더라면 제대로 인생을 살다갈 수도 있었을 텐데.

역사는 중요하다. 나는 역사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일제가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온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역사를 바로 알아야 막연한 분노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죄악을 저지르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 그리고 한승조씨 같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한승조씨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너무 경멸하지 말자. 다만 측은해하고 안타까워하자. 그리고 제2의 한승조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한 역사교육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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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97 : 한국일보 사회부/편집부 기자, 런던특파원, 뉴미디어 총괄팀장 소비자주주협동조합 http://cresum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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