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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폭력의 수준과 별로 다르지 않다.”
“매일 매일이 지옥의 나날이었다.”
“어린애 같은 원한은 집어 치우고 이제 제발 어른이 되어라.”


최근 <뉴질랜드 헤럴드>의 지면을 장식한 헤드라인들이다. 이 헤드라인들은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 사이에 뉴질랜드의 정규군 양성 후보생 학교(이하 '후보생학교')에서 생도들에게 가해진 폭력 행위 및 성적 학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20~40여 년 전에 일어난 해묵은 일에 대한 이 뜨거운 논란은 뉴질랜드 육군에서 통신장교로 복무했던 이안 프레이저(50)가 통신사 스쿠프(Scoop)의 인터넷 웹 사이트에 올린 글이 시발점이 되었다.

1971년 와이오우루 후보생학교의 생도였던 프레이저는 그 글에서 후보생학교 내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과도한 폭력 행위 및 성적 학대가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이 문제를 정부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으며, 이로 인해 지금도 육체적ㆍ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뉴질랜드 헤럴드> 10월 6일자에 실린 만평
ⓒ 뉴질랜드 헤럴드
10월 4일자 <뉴질랜드 헤럴드>는 이러한 그의 주장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실제로 그 기간 동안에 후보생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의 증언이 방송과 신문에 잇달아 소개되면서, 당시 행해진 폭력과 성적 학대의 수준이 정말 과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논란이 뜨거워지자 마크 버튼 국방부장관은 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것을 명령하고, 당시 후보생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증언과 제보를 해줄 것을 당부했다.

후보생학교에서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나?

1973년, 16살의 나이로 후보생학교에 입학했다가 육체적 폭력과 성적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도중하차한 버트 로빈슨(48)은 당시 학교 생활을 ‘지옥의 나날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술회하고 있는 어느 날 밤에 벌어진 일을 들어보자. 그날 밤 어두운 내무반으로 들어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8명의 상급생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바지를 벗기고 고환을 숟가락으로 두들겨댔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다음날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했다. 당시 그의 고환은 작은 럭비공만큼이나 부풀어 올라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 후유증으로 그는 육체적으로 불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우울증을 겪고 과도한 음주벽을 지니게 되어 지금도 정기적으로 정신과의사를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8년에 이 학교를 다녔던 크리스 숀(54)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급생들로부터 잦은 구타를 당했던 그 역시 10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나왔다.

그가 중도하차를 결심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한 동료가 당했던 샤워장에서의 가혹행위. 네 명의 상급생들은 표적이 된 한 신입 후보생도의 머리 위로 아주 뜨거운 물을 틀어놓은 채 마당을 쓰는 빗자루로 피가 나올 정도로 그의 피부를 박박 긁어댔다. 그리고 나서는 찬물을 틀어 몸을 식혔다가 다시 뜨거운 물의 세례 속에 비질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서너 차례 반복했다.

크리스는 그 후로는 이 가혹행위를 당한 학생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도 이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 결국 후보생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생긴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은 그를 술로 이끌었고 마침내는 절도 혐의로 유치장 신세를 지는 전과자로 만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혹시나 누가 한밤중에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대 옆에 손전등을 놓고 잠을 잔다”고 고백한 대릴 나이팅게일 역시 사관학교에서 벌어진 폭력의 희생자다.

1973년에 이 학교의 생도였던 그는 10월 6일자 <뉴질랜드 헤럴드>에 기고한 글을 통하여 자신이 경험한 몇 가지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가혹행위 사례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거의 매일 밤마다 그를 포함하여 갓 들어온 학생들은 벽을 향해 한 손 들고 한 쪽 다리로 꼼짝 안하고 서 있는 기합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상급생들이 다가와 머리를 벽에다 들이박았다.

뿐만 아니라 한밤중에 마스크를 쓴 대여섯 명의 상급생들이 몰려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고 있는 동료 중의 한 명을 집단 구타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그와 나머지 동료들은 마치 깊은 잠이 든 체 하면서 그 비명 소리를 외면해야만 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며칠 후에 그를 둘러싼 상급생들이 그의 고환을 움켜쥐고 다음은 네 차례가 될 거라고 위협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편안한 잠자리를 가져보지 못한 그는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침대 옆에 손전등을 두고 자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후보생학교 출신자들이 자신이 당한 가혹행위 사례들을 제보하고 있는데, 언론에 이름이 공개되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최초로 공개적으로 터뜨린 이안 프레이저에게 자신들의 사례를 전해주고 있다.

이안 프레이저가 확보한 300명이 넘는 피해자들의 사례에는 상급생으로부터 집단적으로 강간을 당했다는 것도 있고 또한 그러한 일을 당하고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연 보상금을 노리고 실패자들이 벌인 일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안 프레이저와 같은 해에 후보생학교를 다닌 현 국회의원인 론 마크는 라디오 방송의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분명 폭력은 있었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선 수준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은 한 번도 그러한 폭력으로 육체적 고통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가 경험한 후보생학교 내에서의 폭력은 당시 기숙학교에서 벌어지던 폭력과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안 프레이저는 지난 40년 동안에 있었던 폭력적인 사례들을 한 다발로 함께 묶어서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마치 그런 일들이 그가 후보생학교에 다녔던 그 해에 모두 일어났던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은 실제 벌어진 일과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955~58년 사이에 뉴질랜드 국가대표 럭비팀의 선수로도 활약했던 스탠 힐(77)도 론 마크의 이런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스탠 힐은 와이오우루 후보생학교에서 1963~66년 사이에 생도들의 훈련 및 내무반 생활에 대한 책임을 맡은 주임상사였는데, 당시 학교를 다녔던 한 생도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교관이었다.

와이오우루 후보생 학교란

정식 이름이 정규군 양성 후보생학교(Regular Force Cadet School)인 와이오우루 후보생학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에 정예 병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육군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18세에 군에 입대하기를 원하는 15세~17세까지의 소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제공하는 이 학교의 교육 기간은 1년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후보생도가 된 경우에는 1년 이상을 학교에 머물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이런 상급생들을 조교로 활용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보직을 받아 군대에 배치되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기초 훈련을 받아야 하는 사관생도도 있었다.

뉴질랜드의 정예 육군 병력의 산실로 40여 년간 약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낸 이 학교는 1991년에 정부의 지원 예산 삭감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문을 닫았다. / 정철용
그는 몇몇 상급생들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은 다소 있었지만 교관들은 군대의 기준과 당시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에 의해서 엄격하지만 공정하게 생도들을 다루었다고 말했다.

“그건 그들에게 몹시 힘들었겠지만 그들은 그걸 이겨냈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뉴질랜드 헤럴드>에 고정적으로 글을 기고 있는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가스 조지도 10월 7일자 칼럼을 통하여, “이번 논란은 당시 군대 및 사회가 요구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자 또는 낙오자들이 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91년 폐교될 때까지 후보생학교를 졸업한 인원은 약 5천명에 달하는데, 지금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그 중의 10%인 50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30년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 적용되는 기준과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한 실패자들이 3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뒤늦게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오로지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타내기 위한 의도 말고는 없다고 단언했다.

은폐된 총기 사고의 진실은 밝혀질까?

그러나 이렇게 이안 프레이저의 주장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사람들도 쉽게 부인하기 힘든 것은 상급생이 쏜 총에 맞아 죽은 한 생도의 사망 사건에 대한 축소 및 은폐 의혹이다.

1981년 2월 13일, 육군 사관학교의 내무반에서는 2년차 생도였던 17살의 앤드류 윌리엄 리드 상병이 하급생이었던 동갑내기 그란트 베인을 M16 소총으로 쏴서 죽게 하는 총기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즉시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사고 발생 후 6시간 만에 모든 조사를 마쳤다. 그러나 사고 발생 14시간 만에 법정에 서서 유죄를 인정한 리드 상병에게는 사망 사고를 유발한 총기조작 부주의 혐의로 200달러의 벌금 및 200시간의 사회봉사 처분이 내려졌다. 그게 전부였다.

10월 9일자 <뉴질랜드 헤럴드>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이 사건의 조사를 담당했던 피어스 헌트 경사는 리드에게 살인혐의를 걸 것을 주장했으나 그의 상사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리드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경미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방대원으로서 총기 사고 발생 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앤디 카일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 번도 조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 경찰이 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경찰의 조사와는 별도로 육군도 자체적으로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당시 조사의 책임자였던 그레이엄 베디 소령 역시 당시 조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베디 소령은 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이 단순한 총기 사고가 아니라 감독인원 부족과 폭력적인 학교 분위기가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건임을 밝혀냈으나 군법 재판소가 “우리가 이 일을 다룰 것이니 내버려 두라”고 명령해서, 더 이상의 조사를 진행시킬 수 없었다고 언론보도를 통해 밝혔다.

이처럼 당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서둘러 종결되고 만 이 사건이 23년이 지난 지금, 후보생학교의 육체적 폭력 및 성적 학대 논란과 함께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자, 경찰민원국(Police Complaints Authority)은 10월 13일에 이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앤드류 윌리엄 리드가 1989년 숲에서 벌목 사고로 사망한 상태여서 진상 규명이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편 국방부는 오는 10월 18일에 조사 위원들을 임명하여 그란트 베인의 총격 사망 사건을 포함하여 와이오우루 정규군 양성 후보생학교 내에서 벌어진 육체적 폭력 및 성적 학대 등 가혹행위 사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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