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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존 케리가 에드워즈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하기 몇 시간 전, '특종'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인 일간지 하나가 뉴욕의 신문가판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케리의 선택." 첫 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큰 활자로 쓰여진 두 글자 뒤에는 다음과 같은 표제가 따르고 있었다.

"민주당, 게파트를 부통령감으로 지명하다."

7월 5일 저녁에 발간된 이 <뉴욕포스트>는 케리가 에드워즈를 지목하지 않은 이유를 '심층보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게파트가 너무 오랜 정치연륜으로 신선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가 외무경험이 턱없이 부족해 '테러와의 전쟁'을 이끌어갈 지도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뉴욕포스트>는 더 나아가 케리의 '결단'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남부에서 많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파트를 선택한 것은 결국 케리가 남부를 포기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케리는 쏟아지는 색종이와 갈채 속에서 에드워즈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이로써 <뉴욕포스트>는 1948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듀이, 트루먼 누르고 대통령 당선"이라고 보도했던 것과 더불어 미국언론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오보를 기록하게 되었다.

<뉴욕포스트>사는 부랴부랴 이 석간판을 거두어들였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게 될 이 신문은 현재 인터넷 경매사이트인 이베이에서 수백 배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이 신문은 다음날 곧바로 사과문과 정정보도를 내보냈지만, 이 오보를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사가 있지도 않은 사건을 보도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논평까지 한 상황이 당사자들을 적잖이 당혹스럽게 하고 있지만, 그보다 그 신문사를 더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내부 제보를 통해서 드러난 오보의 배경이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뉴욕포스트>는 마감 직전 이미 케리의 선택과 관련해 보도된 것과는 다른 내용의 기사를 써 놓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원래의 기사는 "7월 6일 화요일에 케리가 러닝메이트를 지명할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추측이나 논평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밤 10시가 넘어 편집부로 걸려 전화 한 통이 일면 기사의 내용을 바꾸었다는 것이 내부제보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전화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뉴욕포스트>의 사주인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었다는 것이다.

7월 9일자 <뉴욕타임즈>가 인터뷰한 그 제보자는 끝까지 자신을 익명으로 처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오보사건과 관련해 어떤 식의 정보라도 외부에 제공하는 사원은 누구든지 해고하겠다는 편집부의 협박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업미디어의 두 축: 선정성과 보수성

▲ 루퍼트 머독 소유의 언론사들
ⓒ News Corp.
미국의 언론재벌인 루퍼트 머독은 뉴스의 상품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상업언론의 선구자였다.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신문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에게 언론은 사회적 공익을 실천하는 도구라기보다는 지속적 부가가치를 보장하는 '잘 팔리는' 상품의 하나였을 뿐이다.

애초에 호주와 영국의 신문사들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던 머독은 미국의 거대한 언론시장에 매력을 갖게 되면서 매체의 종류를 다각화 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신문, 잡지, 출판, 영화, 텔레비전, 케이블, 위성방송, 인터넷 등 가능한 모든 매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 머독은 사업분야뿐 아니라 미디어 영향력의 범위도 지속적으로 넓혀감으로써 유럽과 북미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 미치는 거대한 미디어망을 건설했다.

머독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으로부터 중국의 텔레비전방송과 미국의 위성방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에 다양한 매체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의 경영철학은 지역을 막론하고 모두 동일하다. '팔릴만한' 미디어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선정성과 보수성을 축으로 건설된 머독의 미디어 제국은 끊임없는 비난에 직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추구'라는 상업언론 본래의 목적에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제 몫을 해냈다.

그가 1985년 호주국적을 버리고 미국시민권을 얻은 것은 여러 모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주된 이유는 미국 방송네트워크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에게 가해지는 미디어 소유제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었으나, 철저하게 상업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언론환경은 그에게는 이미 고향 이상으로 친숙한 곳이었다. 처음부터 언론을 이윤추구의 장으로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그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루퍼트 머독의 신념체계는 그의 경영방식 뿐 아니라 정치의식에도 드러난다. '미국적 가치'를 표방하는 보수정당인 공화당을 지지하는 그는 부시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후원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누구나 나름의 인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언론사 사주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문제는 그의 가치관과 정치의식이 개인의 신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업언론의 '저널리즘과의 전쟁'

2003년 3월, 미국 부시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공습을 결정했을 때, 머독 소유의 뉴스채널 '폭스뉴스'는 바그다드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보여주며 공습을 기다리는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굉음과 화염이 도시를 덮기 시작했을 때, 폭스뉴스는 이 장면을 경쾌한 배경음악에 실어 내보냈다.

물론 머독 소유의 매체들이 부시행정부에 애정을 과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머독의 방송네트워크인 폭스채널에서는 2000년 대선 당시 개표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부시 승리'를 선언한 바 있으며, 이번에 말썽이 된 일간지 <뉴욕포스트>는 대법원의 결정이 있기도 전에 '부시 대통령'을 1면 기사로 내보낸 바 있다.

▲ 루퍼트 머독의 보수상업언론을 비판한 다큐멘터리
ⓒ Greenwald
그러나 최근 개봉된 한 다큐멘터리는 상업언론에 의한 여론조작의 실태가 그 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로버트 그린월드가 감독, 제작한 <여우처럼 교활한 속임수에 당하다: 루퍼트 머독의 저널리즘과의 전쟁(Outfoxed: Rupert Murdock’s War on Journalism)>이 그것이다. '폭스'와 '테러와의 전쟁'을 동시에 패러디한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언론사주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그들이 소유한 매체에 반영되고 재생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 의해 공개된 폭스방송사의 내부문서들은 사건의 확대 또는 축소보도는 물론, 특정 사건의 보도방식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주문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의 주적이었던 이라크가 아무런 대량학살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테러리스트와의 조직적인 연계도 없었다는 보고서가 공개 되었을 때, 폭스방송의 편집부에 전달된 메모는 "이 사실을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부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폭스방송의 앵커맨을 지냈던 존 더프리는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직원회의를 통해서 나온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신문기자나 방송인으로 섬겨야 할 첫 번째 사람은 대중들이 아니라 바로 회사라는 것입니다. 회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고, 또 직장을 계속 다니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회의시간은 어떤 사건을 보도할지, 그리고 그 사건을 어떻게 회사의 입장에 따라 보도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시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대중'을 시청자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핵심적인 시청자층으로 간주한 사람들은 보수적 정치의식을 가진 남성들이었습니다."

가장 늦게 미국 방송네트워크로 참여한 폭스채널은 현재 방송5사 중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고, 또한 뒤늦게 시작한 머독 소유의 뉴스채널 폭스뉴스는 시앤앤(CNN)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비단 방송만이 아니다. 현란한 상업주의와 보수정치의식으로 무장한 무수히 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일등 방송'이 조성한 여론을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핵심정책을 구성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조작되거나 과장된 정보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자신의 군대가 무고한 양민을 학대하거나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현 정부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업언론에 의한 체계적인 여론형성(혹은 판매) 과정이 있었다.

▲ 상업언론의 여론호도를 비판한 만화. "케리의원, 빛은 파동입니까, 아니면 입자입니까?" "케리: 양자역학에 따르면, 빛은 파동과 입자의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언론: 케리, 분명히 입장을 밝혀라." "대통령, '고양이' 철자를 쓰실 수 있나요?" "이런, 어렵군. '고융이?'" "언론: 거의 맞췄어. 부시는 입장만큼은 분명히 밝히잖아."
ⓒ T.Tomorrow
앞의 다큐멘터리는 머독 소유의 언론들이 부시에 반대하는 입장을 어떻게 부정적으로 의미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폭스방송은 존 케리에 대해 보도할 때 "변절자(flip-flopper)"라는 언어를 의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케리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직'으로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부시를 대체할 건전한 대안세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대안이 없는 유권자들이 기존의 정치세력을 거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폭스는 더 나아가 케리가 '위험한 인물'임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이 방송이 사용하는 방식은 한국의 보수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수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폭스방송은 케리가 "왠지 모르게 프랑스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며, "북한의 김정일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김정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부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시작한 상업언론

언론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것은 현대사회의 상식이다. 그러나 미디어학자인 로버트 맥체즈니에 따르면, 이 상식은 절반만 옳다. 여기에는 '어떤 언론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맥체즈니의 저서 <부자 언론, 빈곤한 민주주의>에 따르면, 지금까지 진리로 통용되는 언론 모델은 현재와는 아주 다른 상황에서 유래한 것이다. "언론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언론"이나 "민주주의의 파수견으로서의 언론"이란 개념은 민주주의가 완성되지도 않았고, 독점 자본주의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 속에서 공공언론의 역할을 제시한 것이었다.

왕정과 맞선 공화정 수립이 민주주의의 핵심이었던 시대에는 정부가 독점하고 있던 정보를 국민들과 공유하는 것이 언론이 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독립언론'이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민간주도의 언론이었다. 당시 지역적으로 죽순처럼 일어난 영세언론들은 다양한 의견이 자유로이 교환되는 공론장(Public Sphere)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초기자본주의시대에 존재했던 이 '사상의 공개시장(Marketplace of Ideas)'은 독점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언론은 민주주의를 위해 정보를 교류하는 공공의 기관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해 정보를 통제하는 개인적 치부의 수단이 되었다.

▲ 로버트 맥체즈니의 <부자언론, 빈곤한 민주주의>
ⓒ New Press
오늘의 언론은 더 이상 과거의 언론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극대화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파수꾼'이라는 고전적 언론의 신화는 변함없이 살아 남아 우리의 판단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 맥체즈니의 지적이다.

민주주의가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한 현대사회에서 언론의 독립성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정치권력이 아닌 상업논리다.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에서 미국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로 "독립언론의 부재"를 지적한 것처럼, 소수재벌에 의해 운영되는 언론기업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저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맥체즈니가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많은 사회가 상업언론을 자본주의 발전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언론의 '시장방임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장 시스템이든 정부의 정책과 규제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고, 시장방임이 다양성과 상호경쟁을 낳기보다는 오히려 독점과 담합을 낳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요구는 온당치 않다.

시민사회, 상업언론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다

지난달 말경, '프리프레스(FreePree.net)'와 '무브온(MoveOn.org)' 등의 시민단체에서는 수백만의 회원들에게 환희가 가득 담긴 축하 편지를 발송했다. 언론사의 소유합병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미국 방송통신위원회(FCC)의 결정이 법원에 의해서 뒤집혔기 때문이다. 법원의 이러한 결정이 있기 전, 시민단체는 상업언론의 규제완화가 가져 올 결과를 우려하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었다.

회원귀하,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귀하께서 속한 주의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힘든 싸움의 과정이지만, 우리들은 의회가 연방통신위원회의 언론소유규제 완화 결정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공화당 상원 및 하원의원들, 그리고 부시행정부는 우리들의 이런 노력을 무력화 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전화나 이메일로 항의의 뜻을 표했고,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상원에서는 연방통신위에 지급되는 정부지출금을 삭감하는 법안과 신문과 방송의 교차소유를 허용하도록 한 결정을 막기 위한 표결을 할 예정입니다. 연방통신위의 결정은 사실상 언론사의 독점을 허용하는 것으로,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래의 의원들은 아직 어느 곳에 표를 던질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니 만큼, 여러분들의 전화는 상황의 반전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국민들의 반대여론을 직접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서 알게 된 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졌고, 결국 법원에서도 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소유규제 완화의 직접적 수혜자인 재벌 언론사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고, 국민들은 언론의 침묵 속에서 직접 당사자에게 목소리를 전한 것이다. 이는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할 때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다.

상업언론이 자화자찬처럼 내세우는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은 자기 기만적 환상일 뿐이다. 오늘 날의 언론은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정치권력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언론과 보수정치권의 결합은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상업언론과 보수정치세력은 '현상유지'라는 지점에서 이해관계를 나누기 마련이다. 기존의 질서가 이윤과 권력을 재생산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상업언론과 보수정치권이 '개혁'이라는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이윤추구를 지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해야 하는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언론기업 만큼은 타 업종과 달라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시민들에게는 있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언론사는 언론이 아닌 다른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언론사에게 베푸는 사회적 혜택과 존경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사회에 맞는 민주주의 언론모델에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언론이 이윤추구를 공공의 이익과 맞바꾸지 않도록 감시하는 동시에, 상업논리에 지배 받지 않고 시민사회를 위한 건전한 정보를 생산, 유통할 수 있도록 탄탄한 공공언론을 길러내는 것이다.

'왜곡되지 않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면에서 언론의 문제까지 맹목적인 '시장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민주세력'뿐 아니라 그 무시무시한 '체제전복세력'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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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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