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0회째를 맞는 '세계영화의 만남' 축제가 프랑스 파리의 영상미디어센터 포럼 데지마주에서 지난 2일부터 11일까지 10일 간의 짧은 여정을 시작했다.

세계영화의 만남은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7월 13일까지 열리는 여름 영화축제 '파리 시네마' 행사의 일환으로 이 기간 동안 파리 시내 30개 극장에서 영화 400편이 관객들과 만나게 된다.

▲ 정창화 감독

ⓒ 파리시네마
올해 세계영화의 만남의 주인공은 '한국 액션영화의 아버지' 정창화(75) 감독이다. 지난달 28일자 AFP 통신은 정 감독을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적인 인물로서 70년대 무협영화 대중화의 주인공"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정 감독의 회고전에는 <노다지>(196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 <황혼의 검객>(1967), <천면마녀>(1969), <죽음의 다섯손가락>(1972) 등 총 5편의 영화가 초대됐으며 오는 11일까지 상영된다.

영화 배우 카린 비야르 등과 함께 회고전을 장식한 정 감독의 파리 나들이는 극장내 600여 좌석에 프랑스 관객들을 가득 불러 모으며 성황리에 진행됐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관객과의 만남 시간에 무대에 올라 파리 영화팬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감독의 표정도 상기돼 있었다.

정 감독이 파리를 떠나기 이틀 전인 지난 7월 5일 오후 1시 파리 생 제르멩 데 프레의 한 카페에서 프랑스 언론과의 릴레이 인터뷰에 지친 정 감독을 만났다. 그러나 정 감독은 식사도 마다한 채 이야기 보따리를 한껏 풀어 놓았다. 다음은 정 감독과의 일문일답.

- 지난해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에서 정 감독은 특별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된 후 같은 해 11월말 홍콩에서 그리고 금년에는 파리에서 또 한차례 회고전의 주인공이 됐다.
"처음 부산영화제에서 연락이 왔을 때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내가 영화를 만들 때는 언론에서 그렇게 난도질을 해놓고 지금에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작년에 부산을 방문하고 보니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나는 전후 미국영화에 뺏긴 관객을 되돌리기 위해 멜로드라마, 청춘, 액션 세 가지 장르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러나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얽매인 매스컴이나 평론가들은 내 영화를 싸구려 상업영화로 폄하했다.

'우리 영화 발전을 위해 시야를 넓혀야 된다. 당신들(당시 영화평론가와 매스컴)이 물러나고 세대교체 해야 한다'고 내가 반격을 했는데 이들 감정이 얼마나 상했겠나. 이때부터 내가 영화를 만들 때마다 혹평과 비난이 쏟아졌다. 나는 매스컴에 의해 가려졌지만 하고자 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홍콩으로 갔고 거기서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매스컴이 뒷받침해 줬다. 지금은 세대교체가 돼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지만 그 무렵에는 사사건건 그랬다."

- 홍콩 회고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홍콩영상자료원에서 개최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 촬영소에서 내가 옛날을 추억하는 인터뷰를 했는데 감개무량했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라든가 <노다지>같은 한국에서 촬영한 영화가 소개됐는데 영화가 끝나고 팬사인회에 관객들이 몰려와 인기 좋았다(웃음).

홍콩에서 자신들의 영화를 세계시장으로 진출시킨 사람이 정창화라고 인정했다. 힘이 났다. 매년 10월 10일 그러니까 쌍십절에 영화인들의 잔치가 열리는데 그때마다 나를 초청해 내 업적을 칭찬했다. 같은 아시아권이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후배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오우삼 감독의 첫 데뷔 작품을 한국에서 하도록 해줬다. 여배우 김창숙씨가 출연한 <용호문>이라는 영화가 한중합작으로 나온 배경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노력한 만큼 평가해 준다는 보람이 있었다.

지금은 홍콩영화가 사양길에 있는 반면 우리 영화가 부상하고 있어서 격세지감도 느꼈지만 뿌듯하다. 부산영화제에서도 매스컴이나 영화평론가, 교수들이 세대교체가 돼서 세계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작년에 알게 됐다. 후배들이 좋은 여건에서 영화하는 걸 보니 흐뭇하다. 다행스런 일이다."

- 한국과 홍콩, 미국, 프랑스 관객을 비교한다면.
"물론, 시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이나 홍콩에서는 영화를 재미로 봤다. 미국 관객도 마찬가지다. 미국 관객들이 슬리퍼를 끌고 팝콘이나 콜라를 들고 극장에 앉아 영화를 오락처럼 즐기는 반면, 프랑스인들에게 영화는 생활의 일부라는 인상이 든다. 영화를 보는데 그치지 않고 깊이 알고 싶어한다. 20년 전 내가 파리에 있었을 때도 느낀 일인데 정장차림의 부부가 극장을 찾는 것을 보고 참 훈훈한 느낌을 받았다."

▲ 왼쪽부터 딸 정연경씨, 부인 정선옥씨, 정창화 감독

ⓒ 박영신
- 본격적인 질문이다. 어떻게 해서 영화를 하게 됐나.
"해방 이듬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독립군의 지하공작에 관한 내용인데 그 영화가 내게는 큰 감명을 주었다. 특히 최 감독의 재치와 기교에 매료되어 어떻게든지 최 감독 밑에서 영화 수업을 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천운이 따랐는지 선친께서 최 감독의 형과 친분이 있어 그 분 소개로 최 감독을 만나게 됐다."

- 전쟁 시기에 들어왔던 미국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영화에 도움을 준 영화들은 어떤 것이었나.
"명장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셰인 Shane>(1953)이라는 영화가 한국에 들어왔다. 소년의 눈으로 본 서사시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서부극으로 몽타주 기법을 백분 살려 서부극으로서는 보기 드문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런 재치있고 박진감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했다."

- 정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은 한국에서 액션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혹자는 <풍운의 궁전>(1957)에서 액션영화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하는데 액션영화로서 큰 의미는 없는 작품이다. 당시 한국은 액션영화의 불모지였는데 본격적으로 빠른 템포 액션영화의 계기가 된 것은 <햇빛…>이었다."

- 1969년 홍콩행을 결정했다. 홍콩으로 가게된 동기가 뭐였나. 그 배경이 궁금하다.
"쇼브라더스의 란란쇼 사장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전문이 날아왔다. 나는 좀더 국제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싶었고 좋은 제작 여건 아래서 작업하고 싶은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전속 계약을 승인했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항상 관객을 염두에 두었다. 얼마나 관객에게 다가가느냐가 흥행의 지표였는데 란란쇼는 바로 그런 영화를 원했던 것이다."

- 당시 한국 감독의 홍콩 진출은 대부분 합작 형태였고 <죽음의 다섯 손가락>(한국에는 <철인>으로 소개됨), <아랑곡>(1970·한국에서는 <아랑곡의 혈투>), <흑야괴객>(1973) 등 정 감독의 영화도 상당수 합작 형태로 한국에 소개됐다.
"쇼브라더스의 전속 감독이 되면서 장차 한국 영화가 동남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길을 트려고 내가 감독하는 영화마다 한국 배우들을 많이 출연시켰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감독과 3인 이상의 한국배우가 출연하면 합작영화로 인정됐다. 중국 영화를 수입하려면 비싼 외화 쿼터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영화가 합작영화로 둔갑해서 한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 60년대 말 전성기를 맞이한 쇼브라더스에는 이한상, 장철, 호금전과 같은 쟁쟁한 홍콩 감독들이 활동했다. 당시 쇼브라더스의 상황과 정 감독의 입지라고나 할까, 어땠나.
"홍콩에서 감독한 첫 작품이 <천면마녀>였다. 당시 홍콩 감독들은 무협영화는 잘 만들었지만 액션영화를 만들 만한 감독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하루 3시간 자면서 그들이 만든 영화를 빠짐없이 보고 연구했다. 또 중국 서적을 보면서 신비한 중국 이야기들을 끌어내 무술영화를 만들면 그들이 시도하지 못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온 것이 바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정창화 감독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임권택, 오우삼 감독의 스승'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됐지만 정작 그 주인공 정창화 감독의 이름은 우리에게 퍽 낯설다.

지난해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 감독을 지목하기 전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1928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 1953년 영화 <최후의 유혹>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은 정 감독은 1960년대 충무로 액션영화의 전성기를 연 장본인이다.

1968년 당시 홍콩 최고 영화사 쇼브라더스와 전속계약을 맺고 홍콩으로 건너가 만든 첫 영화 <천면마녀>가 홍콩 영화 사상 첫 유럽 진출 작품으로 기록됐고 이어진 작품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홍콩 영화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해 전미흥행 1위를 차지하는 등 파란을 일으키며 홍콩 영화의 전설이 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에 꼽기도 했던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 무술영화의 고전컬트로 남아 있다.

쇼브라더스를 떠나 골든 하베스트사에 둥지를 튼 정 감독은 특기인 액션물로 성공을 거뒀지만 1977년 영화 <파계>를 마지막으로 홍콩 생활을 마무리한다. 1978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풍영화사를 설립해 제작자로 변신한 정 감독은 1987년 은퇴해 현재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다.

1953년부터 1977년까지 총 53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 박영신


- 1978년 돌연 귀국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감독 생활을 마감하고 제작자로 변신했는데….
"197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특사로 중동 순방을 끝내고 홍콩에 들른 문화공보부 장관 김성진씨가 조찬을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총영사를 통해 전화를 해온 건데… 거기서 김 장관이 내게 '남의 나라에서 감독 할 것이 아니라 귀국해서 우리 영화 발전을 위해 힘 써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영화사 설립이 허가제였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면 귀국하겠다고 대답했다. 1978년에 김 장관이 6개 신규업자의 등록을 허가했다. 그리고 얼마 후 6개 신규업자 중 5개 업자가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유일하게 내 회사(화풍영화사)만 살아남았다. 수십 명을 거느리는 회사 대표로 제작비와 회사 경영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 정 감독은 70년대 한국 액션영화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당시 한국 액션영화는 싸구려 영화로 취급받기도 했다. 총 53편의 영화 중 30편이 액션영화다. 장르영화 특히 액션영화 감독으로 인식되면 인정받기도 힘들던 것이 사실인데 왜 액션영화를 선택했나.
"예를 들어 사악한 정치인이나 악덕 상인이 있다 치자. 실컷 응징해 주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엄연히 법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어른들의 꿈과 공상을 대신해서 실현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액션영화다. 우리나라의 혼란스런 정치나 사회생활에서 오는 욕구불만과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빠른 길이 시원시원한 액션영화라고 생각했다. 대만의 이안 감독이 <와호장룡>(2000)이라는 무술영화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듯이 영화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야한다.“

- 감독이 추구한 액션영화는 어떤 것이었나.
"통쾌하고 의리가 있고 의협심이 있으며 관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 감독이 활동할 당시의 평가를 보면 '액션이 좋다'라는 평가만큼이나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말도 자주 달고 다녔다. 액션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감독이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감독은 당시의 이같은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오직 관객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주위의 여론이나 평가가 내가 하고자 하는 작품활동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 정 감독의 데뷔작은 유현목 감독이 각본을 썼는데 유현목 감독과 어떻게 알게 됐나.
"부산 피난 시절에 유현목 감독이 나를 찾아왔다. 유 감독이 대학에서 실험영화 시나리오를 썼다기에 내가 집필하고 있던 <최후의 유혹>의 각색을 도와 달라고 했다. 영화계 정식 입문을 하게 된 작품인데 내가 제작, 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유 감독이 각본을 쓴 것으로 기록됐다. TV에서 PD로 은퇴한 서석조, 박성복과 함께 유 감독이 <최후의 유혹> <제2의 출발>(1955)의 조감독을 했다."

- 정 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임 감독과의 인연은 어땠나.
"1956년 <장화홍련전> 제작사의 임 사장이라는 분이 내게 10대의 두 젊은이를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켜달라면서 맡겼다. 그 중 한 청년이 바로 임권택 감독이었다. 다른 조감독이 있었으므로 자리가 날 때까지 소품부에서 일하도록 배려했다.

임 감독은 <비련의 섬>(1958)부터 정식 조감독으로 기용됐으며 <사랑이 가기 전에>(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슬픔은 강물처럼>(1960), <지평선>(1961), <노다지> , <장희빈>(1961)을 끝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 최인규 감독 밑에서 정 감독은 신상옥 감독, 홍성기 감독과 함께 공부했다.
"배우 김지미씨의 전 남편이기도 했던 홍성기 감독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별아 내 가슴에>(1958)와 같은 좋은 멜로를 많이 연출했다. 신상옥 감독은 나보다 3개월 후에 입사했으며 배우모집 당시에 배우지망생으로 들어왔으나 최인규 감독이 미술분야의 조감독으로 기용했다. 신 감독은 내가 홍콩에서 활동할 당시 자주 찾아왔으며 서로 친분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작품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을 주고 받은 적은 없다."

-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혹은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피도 눈물도 없이>(2001)처럼 최근에는 한국에도 좋은 액션영화들이 더러 나왔다. 혹시 이런 영화를 본 일이 있나. 또 홍콩 액션영화에 대한 생각을 들려 달라.
"한국에 좋은 감독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내가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에는 한국영화나 비디오를 빌려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유감이다. 오우삼 감독이 만든 홍콩영화 <영웅본색>(1986)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내가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내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인데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 지난 해 부산영화제 때 정 감독은 한국영화를 이끌어나갈 후배 감독으로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을 꼽았다. 두 감독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 공동경비구역 JSA >(2000)를 보고 박 감독이 대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임권택 감독은 이미 커버렸으니(웃음)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내가 닦은 길을 갈 두 사람, 바통을 넘겨받을 사람이 박 감독과 류 감독이란 말이다. 결국 (박 감독은) <올드 보이>(2003)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지 않았나. 그 장면을 미국에서 TV로 보면서 박수를 쳤다."

- 총 5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적은 수가 아닌데.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감독의 작품 중 프린트가 남아있는 작품이 안타깝게도 14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뭔가.
"한국에서 본격 액션을 시도했던 <햇빛쏟아지는 벌판>에 가장 애정이 간다. <지평선>도 아끼는 작품인데 당시 의상이나 도구등 한국적 여건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그리고 대륙을 배경으로 만든 이 영화는 장차 한국 영화계의 흐름을 대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지금 남아있는 작품들은 내 대표작이 아니라 습작들이다.

이번 파리 회고전에서도 대표작들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 당시 영화가 수출이 되면 원본을 그대로 보내는 식이었는데 그 때문에 지금 프린트를 구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햇빛…>과 <지평선>은 반드시 되찾고 싶은 작품으로 프린트가 홍콩에 있다는 말도 있고 미국에 있다는 말도 있다. 현재 김치현 감독이 추적 중이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꼭 되찾고 싶다."

- 감독의 작품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홍콩 제작 영화 최초로 미국에 수출돼, 개봉 첫주 전미흥행 1위를 기록한 화제의 작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에 이 영화를 꼽기도 했는데 실제로 <킬빌>에 인용도 했다.
"알고 있다. 하다못해 <죽음의…>에 나오는 음악, 그러니까 내 영화에서 손바닥이 나오는 장면의 음악까지 사용했더라. 사람들은 모방이 나쁘다고 말하지만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작품세계에 반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타란티노가 한 잡지에서 내 영화를 인용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는데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기술적인 면이나 정치적 상황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을 것 같은데.
"재미라기보다는… 반공영화 <돌무지>(1967) 촬영이 끝날 무렵의 일이다. 솔직히 나는 <돌무지> 안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영화 촬영이랑 병행하고 있었는데 (돌무지 촬영에) 좀 게을리 했겠지. 어느날 오전 7시경에 느닷없이 구급차 한대가 집앞으로 왔고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인터뷰가 진행된 카페 공간을 가리키며) 아마 이 정도 넓이의 방에 의자 하나만 달랑 갖다 놓고 혼자 앉아 있도록 했다. 참 착잡하더라.

잠시 후에 감찰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는데 내 학교 후배여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를 "선배님"도 아니고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왜 협조 안해주냐"고 다그쳤다. 요즘이야 덜 하겠지만 당시에는 '표현의 자유'라는 게 정부 입맛에 따라 바뀌는 거여서 아마 내가 당한 모양인데 딱히 좌경 사상이 있었던 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도 그런 일을 당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나. 참으로 치욕스러운 기억이다."

- 한국영화 보호정책의 일환으로 스크린쿼터제라는 게 있다. 당시 영화제작 현장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분으로서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의견은.
"스크린쿼터제 필요하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스크린쿼터제를) 풀어야 마땅하겠지만 아직은 단계가 아니다. 한국영화가 기반이 단단해지고 자생력이 생길 때 서서히 풀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후배 감독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나.
"영화는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영화라면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문제도 끌어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위대한 거다. 남들이 못하는 걸 해내지 않았나. 마이클 무어 같은 용기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된다."
2004-07-08 16:27ⓒ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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