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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홍콩의 투자자(쟝즈창, 江志强)가 제작비를 전액 지원하고 6월 5일 한국, 중국, 홍콩에서 동시 개봉된 영화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는 기획단계에서부터 거대 중국 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여친소>는 향후 중국의 문화시장을 공략하는 데 있어 투자, 기획, 배급 방식 등에서 소중한 모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여친소>를 보니, 작품성과 내용면에서 중국과 차별화된 문화콘텐츠를 선보이며 한류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기보다 그간의 성과에 의지하며 한류의 반사이익만을 챙기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 '다오판' 이라는 불법복제 CD로 나온 <여친소>, 예만스제(野蠻師姐)라는 중국제목이 눈에 띈다.
ⓒ 김대오
2000년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중국에서는 <아적야만여우(我的野蠻女友)>라는 이름으로 개봉)가 중국에 한류와 전지현 열풍을 몰고 왔으며, 이를 계기로 수많은 예만(野蠻, 엽기) 시리즈물들이 쏟아지게 한 바 있다.

이 같은 전지현의 유명세와 예만 캐릭터를 등에 업고 싶은 중국투자제작사 에드코필름은 한국제작사의 요청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친소>의 중국 제목을 우리말로 '엽기적인 경찰'쯤에 해당하는 <예만스졔(野蠻師姐)>로 지었다.

▲ 6월 5일 <여친소> 개봉과 함께 베이징 왕부징의 한 의류매장에 전지현을 이용한 광고판이 세워졌다.
ⓒ 김대오
예만 전략의 득(得)과 실(失)

중국어의 예만은 '거칠고 막돼먹은'이라는 함의를 갖고 있는 말로 서커스(雜技)나 특이한 놀이기구 등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취향과 부합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남성우월주의의 유교적 전통이 강한 중국에서 예만 캐릭터의 여성이 보여주는 즉, 귀여우면서도 거침없는 행동과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 '신여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중국제작사의 '예만' 전략은 개봉 초기 적중하는 듯했다. 엽기적인 전지현의 모습을 애타게 기다려 온 수많은 중국 관객들은 <여친소>의 개봉과 동시에 앞다투어 극장을 찾았고, 그 결과 홍콩 개봉 한국영화 첫날 최다관객 기록 갱신으로 나타났다(2002년 <조폭마누라> 58만3천명, <여친소> 61만 명). 또 상영 첫 주 집계에서도 <여친소>는 375만9953달러의 수입을 기록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트로이> 등에 이어 5위에 올랐다.

그러나 중국 관객들이 기대한 <엽기적인 그녀>에서와 같은 예만한 전지현의 모습은 영화 <여친소>에 그리 많지 않다. 전반부에 잠깐 전지현의 예만 장면이 있을 뿐 중후반부는 남자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영화 <사랑과 영혼>의 여주인공 데미 무어 같이 우울하고 슬픈 표정의 전지현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무늬는 예만인 데 반해 내용은 울음을 강요하는 신파극인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화의 내용과는 다른 제목을 전편의 흥행만을 믿고 고집한 중국제작사의 오류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관객률 50%를 넘기던 여친소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관객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중국 관객들은 반응이 그다지 신통치 않다.

'담비 꼬리에 개 꼬리를 이었다'는 혹평에서 '계륵'이라는 평가까지
우다오커우(五道口)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한 여대생은 "기대했던 예만한 영화도 아니고 작품성도 기대 이하"라며"<엽기적인 그녀>는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 다섯 번이나 봤는데, <여친소>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라는 말로 영화에 대한 실망을 표현했다.

중국 내 평론가들의 힐책은 더욱 신랄하고 공격적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편 형식을 취하면서 영화가 전적으로 전지현의 매력과 유명세에만 기대고 있으며, 예술성과 완성도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또한 '내용은 유치하고, 구성이 허술할 뿐만 아니라, 요란한 화면으로 억지 웃음과 억지 눈물을 유발하는 삼류 영화'라는 평가도 있다. '담비꼬리에 억지로 개꼬리를 이어 놓았다(狗尾續貂)'는 말로 <여친소>가 <엽기적인 그녀>의 작품성에 크게 뒤진다는 분위기다.

한 평론가는 중국의 관객들이 전지현의 매력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가 엉성하고 억지스런 스토리 전개에 분노하며 극장문을 나섰다며 유치하다며 "보자니 유치하고 버리자니 전지현의 매력이 아깝다"며 '계륵(鷄肋)'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류의 방향과 전략 재검검 필요

지난 6월 5일 <여친소> 홍보를 위해 베이징 호텔에서 곽재용 감독과 전지현, 장혁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중국에서의 유명세를 반영하듯 전지현에게 기자들의 집중적인 취재 세례와 조명이 쏟아졌다. 그에 못지않게 장혁에게도 수많은 중국 여성팬들이 몰려와 서툰 우리말로 '오빠 사랑해요!'를 외치며 꽃다발과 선물을 전하는 모습이나 왕부징(王府井)에서 열린 팬사인회에 몰려든 수많은 관객들의 환호를 볼 때 과연 한류(韓流)를 실감케 하였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나 문화상품이 중국에서 크게 환영 받으며 한류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과도기에 할리우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적 유사성이 많고, 값이 저렴하다는 점과 중국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화려함이나 몇 명의 스타 명세에 힘입었다기보다 그들과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한국의 범한 이야기들을 탄탄한 구성과 생동감 있는 연기로 재미있게 담아낸 것이 중국인들에게 먹힌 결과로 볼 수 있다.

문화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는 중국시장에서 한류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굽이쳐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적인 정체성과 독창성을 살린 새로운 문화콘텐츠의 지속적인 계발이 필요할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엽기적인 그녀>가 '예만'을 계발한 독창성이 있었다면, <여친소>만의 승부수는 과연 무엇이었나 묻고 싶어진다.

다른 모든 상품이 그러하듯 전세계 다국적기업이 노리는 중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중국보다 좀더 잘 만들면 되겠지'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정말 세계 최고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 영화를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획 과정에서부터 중국 시장을 공력할 의도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면 중국인들의 취향과 시장의 특성을 철저히 분석하고 보다 치밀하고 세심하게 중국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혹평 속에서도 <여친소>의 흥행이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어쩌면 <엽기적인 그녀>의 후광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고 보여진다. "한류가 이렇게 조금씩 전조의 빛을 소진하며 쇠퇴해가고 있다"는 중국 영화평론가들의 지적을 좀 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 6월 5일, 베이징 펜싸인회에 참석한 곽재용감독, 전지현, 장혁. 한류의 남은 빛은 아직 그들에게 화려함을 선사해주고 있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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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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