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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돌베개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踏雪野中去)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今日我行跡)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遂作後人程)


최근에 읽은 <백범일지>의 권두 사진자료에 보니 위 시는 분단을 전후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가장 즐겨 썼던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라고 소개되어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방은 되었으나 남과 북으로 갈라져 조국이 두동강 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때 김구 선생은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 관계보다도 후손들에게 남겨줄 우리 민족과 조국을 먼저 생각했다. 위의 시에는 그러한 김구 선생의 곧은 역사의식이 그대로 담겨 있어 나는 숙연하기까지 했다. 내가 <백범일지>에서 위 시를 마주치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지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에 걸쳐 <백범일지>를 다 읽고 난 지금까지도 위의 시는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사이에 벌어진 이라크 추가 파병 결의와 그로 인한 김선일씨 납치 피살 소식이 나로 하여금 위 시를 반복해서 다시 읽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에서 과연 무얼 배우고 있는가? 지난 탄핵 사태 때 노 대통령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읽었다던데, 그 소설을 읽으며 그는 지금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이 국민들이 벼리고 갈아서 선물해 준 칼이라는 사실을 정말 깨닫기는 한 것인가?

남의 나라 눈치 보면서 한번 휘두르는 그의 칼질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과연 알고나 있는 것인가? 이제는 다른 나라들도 슬슬 뒷걸음질치는 판에 앞장서서 부시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그는 여기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그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나는 김구 선생이 즐겨 썼다는 위의 시를, 그리고 그 시가 담겨 있는 <백범일지>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백범일지>는 우리의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요, 교육자이던 백범 김구 선생이 우리 역사에 남긴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이다.

그 발자국은 너무나 곧고 뚜렷해서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니 노 대통령이여 그리고 정치인들이여, <칼의 노래>만 읽지 말고 <백범일지>도 읽어라. 그리고 그 책에 수록된 위의 시와 김구 선생의 치열한 삶을 통하여 자신이 지금 남기고 있는 발자국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라.

2.

상ㆍ하권으로 두 번에 걸쳐 나누어 쓴 <백범일지>를 한 권으로 묶어 출간하면서 김구 선생은 출간사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범일지>를 조금만 읽어보면, 김구 선생의 삶은 보통 사람은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파란만장한 생애였음을 알게 된다.

황해도 벽촌의 가난한 상놈 집에서 태어나 천방지축의 개구쟁이로 자라난 그는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아기 접주'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제법 많은 교도들을 거느리기도 했고, 23세에는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21세에 민비 시해사건에 따른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일본인을 살해한 죄로 인천에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을 했으며, 36세에는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중에 일제의 민족주의자 총검거령으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4년 간 모진 옥살이를 당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전국을 유랑하면서 수행한 이러한 종교적 체험과 두 번이나 자살을 꿈꿀 정도로 몹시도 힘들었던 옥살이는 그가 훌륭한 교육자로 그리고 위대한 민족운동가로 다시 태어나는 밑바탕이 되었다.

우리 민족과 나라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28세 때부터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으나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 또한 어렵게 되자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민족해방 운동을 펼치기 위해 44세에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74세에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까지, 30년 동안 아니 전 생애를 그는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그야말로 온몸과 마음을 바쳤으니, 한 사람의 일생이라 칭하기에는 그 굴곡이 너무나 굵고 그 자국이 너무나 뚜렷해서 파란만장이라는 수사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이처럼 <백범일지>가 전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생애는 대하소설을 쓰거나 대작영화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 파란만장하고 감동적이지만, 이러한 자신의 생애를 기록해 나가고 있는 김구 선생의 태도는 너무나 담담하고 솔직하고 겸손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흠모하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3.

하지만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느껴야 할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생생한 감동에만 있지 않다. 좌 아니면 우를 선택하기를 끊임없이 강요당하던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그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제시한 그의 사상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백범일지>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백범 출간사'에서)

'혈통의 조국은 영원하지만 사상의 조국은 일시적이다'라고 했던 김구 선생의 말처럼 이미 모스크바는 석양에 져버린 잊혀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모스크바가 무너진 그 빈자리를 워싱턴이 신속하게 점령하여 전 세계적으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처음에는 그 위세에 눌려 너나 없이 워싱턴을 따르다가 그것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슬슬 발을 빼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한국은 어이없게도 워싱턴을 따라 나서고 있으니, 김구 선생이 지하에서 이를 아시면 얼마나 통곡하실 것인가!

노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백범일지>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침 6월 26일은 김구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지 5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5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가 남긴 <백범일지>와 그 속에 함께 수록한 글 '나의 소원'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후인을 생각해서 발걸음 하나 허투루 떼지 않은 김구 선생이 꿈꾸던 그런 나라는 아직 우리에게 너무 먼 것일까?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의 소원'에서)

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돌베개(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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