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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권하는 사회

▲ 미국사회에서 비만은 국민보건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 강인규
현재 미국인의 61%가 과체중이고, 그 가운데 27%가 비만환자로 분류된다. 현재 미국에서 비만은 흡연보다 국민보건에 더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상태다. 비만인 사람은 정상체중보다 심장병과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두 배에 가까운 것으로 조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십년간 미국에서 2종 당뇨병 환자는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2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아동비만은 두 배, 그리고 청소년 비만은 무려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제 소아과 의사들마저 고혈압과 당뇨병 등의 '성인병'을 일상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비만 제국'. 그 동안 미국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국인의 허리둘레를 넓힌 원인은 여러 가지다. 자동차, 텔레비전, 컴퓨터, 비디오 게임에 이르는 기술문화로 인해 육체적 활동이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고열량의 가공식품 중심으로 식생활이 재편되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미국인들의 음식 섭취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미국 농무부(USDA)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15년 전보다 일인당 하루 평균 500㎈ 이상을 더 섭취하고 있다. 활동량은 줄어들었으나 오히려 음식 섭취량은 늘어난 것, 이것이 바로 미국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비만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많이 먹게 되었을까? 미국의 영양학자들은 과식의 원인을 외식산업의 발달에서 찾고 있다. 사람들은 외식할 때 많이 먹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판매용 음식은 가정식보다 대체로 높은 열량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외식을 통한 과다섭취는 상업논리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외식산업이 고객들로 하여금 많이 먹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 한 미국가족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침식사를 주문하고 있다.
ⓒ 강인규
단적인 예로 미국에서 맥도널드가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 흔히 사람들이 한 사람 몫으로 주문하던 햄버거, 감자튀김, 그리고 탄산음료를 모두 더해도 600㎈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날 맥도널드 매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수퍼사이즈(Supersize)' 메뉴로 앞의 세 가지 음식을 주문하면 총열량은 1500㎈를 쉽게 넘어선다.

오늘날 외식업계는 가격 할인을 미끼로 사람들로 하여금 개별 제품보다는 '세트메뉴(value meal)'를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여기에 돈 몇 푼만 더 내면 양을 늘려주는 '수퍼사이즈' 전략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비단 맥도널드뿐 아니라, 버거킹, 웬디스, 케이에프씨 등의 대다수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일반화되어 있다.

비만: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

외식산업의 상업전략은 우직한 '끼워팔기'와 '늘려팔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거리로 발을 옮기거나 신문과 잡지를 펼쳐 들 때, 그리고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켜거나 극장에 들어설 때 우리들의 감각은 끝없이 먹을 것을 권하는 상업적 메시지에 압도된다.

광고는 말할 것도 없고, 언론보도 역시 먹는 것의 문제점보다는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광고주로 성장한 식음료업계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먹을 것을 권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음식섭취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통제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과다한 음식섭취가 단순히 개인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고, 그 원인 역시 개인이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차원이라면, 비만의 책임을 한 개인의 '나태'나 '의지부족'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음식을 먹도록 유도하는 수많은 정교한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가 억지로 먹으라고 했느냐'는 항변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역사 대부분은 궁핍의 시기였다. 수렵과 원시경작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이 자연을 어느 정도 통제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음식을 얻는 일은 결코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음식이 주위에 있을 때 가능한 한 많이 먹어 두어 기아를 면하고 종족 번식을 위한 에너지를 얻으려는 노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본능에 속한다.

그러나 음식의 생산, 보존, 수송수단이 발달하고 누구나 손쉽게 음식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생존의 본능은 오히려 존재를 위협하게 되었다. 더구나 음식의 생산량이 수요를 넘어서게 되면서 시작된 식음료업계간의 치열한 경쟁과 판매촉진 전략은 사람들을 '죽도록 먹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인간의 본능과 환경의 불일치, 그리고 '음식 권하는' 사회적 유혹은 비만을 결코 개인적 선택의 결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뉴욕대학 영양학 교수인 마리언 네슬은 비만의 해법을 개인의 의지가 아닌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는 사회환경의 변화에서 찾는다.

네슬은 자신의 저서 <음식의 정치학: 식음료산업이 영양과 보건에 끼친 영향(Food Politics: How the Food Industry Influences Nutrition and Health)>을 통해, 한 개인이 음식에 대한 사회적 유혹을 의지력만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사회적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잉여생산된 음식을 팔기 위해 미국에서만도 매년 300억달러씩 광고비로 쏟아붓는 업체들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배고프지 않아도 먹도록 만들며, 심지어는 포만 상태에도 음식을 찾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사회환경이라는 것이 네슬의 말이다.

"'수퍼사이즈'로 드릴까요?"

▲ 미국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 맥도날드. 간판에 "(전 세계적으로) 900억 이상이 다녀갔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 강인규
이처럼 잉여음식물을 처리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세트메뉴'와 '수퍼사이즈'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체인의 판매촉진 전략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려오던 업계의 관행은 최근 들어 된서리를 맞기 시작했다. 2년 전 비만환자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곤욕을 치렀던 맥도널드가 최근 들어 다시 비만 책임론에 휩싸인 것이다.

패스트푸드의 비만 책임 논쟁에 다시 불을 당긴 것은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다큐멘터리 한 편이었다. <수퍼사이즈 미(Supersize Me)>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 자신이 한 달 동안 맥도널드 음식만으로 생활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는 과정을 익살스럽게 기록한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불러온 반향은 웃어넘길 만큼 가볍지 않다. 이 영화가 공개된 후 맥도널드 측에서는 '수퍼사이즈'를 없애겠다고 발표했고, 샐러드를 중심으로 한 다이어트 상품을 새로이 식단에 추가했다. 더 나아가 맥도널드 측은 샐러드와 생수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걷기 운동용 만보기를 끼워주는 성인용 '해피밀'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런 '다이어트상품'은 다른 패스트푸드업계까지 확산되어가고 있다.

감독 모건 스펄록은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결코 맥도널드사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은 맥도널드를 공격하기는커녕, 맥도널드를 주제로 삼고 있지도 않습니다."

스펄록에 따르면 <수퍼사이즈 미>의 제작 동기는 특정 업계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패스트푸드화되어 가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 패스트푸드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큐멘터리 <수퍼사이즈 미> 포스터
ⓒ The Con
마이클 무어식의 거친 톤으로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조지 리처의 저작을 연상시킨다. 리처는 자신의 저서<사회의 맥도널드화(한역서 제목: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역시 맥도널드 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이 책에서 맥도널드의 경영방식에 의해서 시작된 사회 체계의 합리화 및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있는 불합리화와 비인간화를 분석한다. '맥도널드화(McDonaldization)'라 하는 이 과정은 현재 모든 패스트푸드점과 고급식당 체인, 그리고 더 나아가 기업조직과 정부관료제 등 사회 제반 분야에도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리처의 주장이다.

'효율'과 '통제'를 우선시하는 맥도널드의 시스템은 균질의 음식을 빠른 속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성과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이 합리화는 근로자들의 노동을 획일화시키고 비인간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 과정에서 고객들의 개성과 기호 역시 철저히 무시되었다.

사회의 패스트푸드 체인화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정확히 움직여야 한다. 냉동되어 공급되는 동일한 재료를 전자레인지나 기름에 넣고 정확한 시간 뒤에 꺼내야 하고, 여기에 정확한 양의 양념이나 야채를 얹어서 내놓아야 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노동자상은 창의력이나 능동성을 최소화하고 매뉴얼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 리처의 저서 <사회의 맥도날드화>
ⓒ Pine Forge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받는 근로자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 리처에 따르면 이처럼 '단순직화'된 패스프푸드업계의 근로자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전세계 어디서나 간단한 교육만으로 균질화된 상품을 내놓을 수 있는 대량생산 및 판매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를 통한 근로자들의 효율적인 통제다. 매뉴얼만 따르면 누구나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한 이 관료체제는 근로자들의 고용 및 해고를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업무를 '단순직종화'함으로써 근로자에 대한 저임금 정책을 고수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정해진 수칙을 엄격하게 따르는 일은 결코 '단순'한 업무가 아니다.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자기 통제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입장에서 패스트푸드 체인점은 '주는 대로 받아먹는 곳'이다. 어떤 고객이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고 생각해 보자.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기는 저지방으로 해 주시고, 양파를 빼는 대신에 절이지 않은 오이를 넣어주세요. 참, 그리고 체다 대신 스위스 치즈를 얹어 주시겠어요?" 입맛에 음식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입맛을 맞추는 곳, 그곳이 바로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이처럼 원하지 않는 음식을, 그것도 다 먹지 못할 만큼 주문하도록 요구받는 곳이 패스트푸드 체인이라면 그 놀라운 인기와 대중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패스트푸드 매장이 푸아그라용 거위 사육장 같은 곳이라면 어느 누가 그곳을 즐겁게 드나들겠는가?

이 모순에 대한 리처의 설명은 '착각의 조장'이다. 우리들은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식사를 한 후 '아주 싼 값에,' '간편하게'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고 만족스러워한다. 그러나 리처에 따르면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우리들이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한 끼 식사로 지불하는 비용은 가정 요리와 비교해 볼 때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간편'하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길을 나서 식당까지 가야 하는 수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랫동안 서서 주문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불편한 좌석, 그리고 소란한 실내는 객관적인 의미의 즐거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패스트푸드의 '다양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 회사 포드가 20세기 초에 고안해 낸 "어느 색깔이든 고르실 수 있습니다. 단 검은 색에 한해서"라는 표어는 이제 패스트푸드 업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어느 음식이든 고르실 수 있습니다. 단 햄버거에 한해서."

▲ 패스트푸드 매장에 설치된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놀고있다.
ⓒ 강인규
이처럼 좋아하기 어려운 식품을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패스트푸드 산업이 사용하는 전략은 '즐거움'에 대한 환상이다. 많은 체인점들이 화려한 실내장식과 만화 캐릭터 등을 통해 식당을 '놀이공원화'하는 경향이 있다. 각 패스트푸드 업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광고용 캐릭터를 개발하거나 모델을 고용함으로써 고객으로 하여금 신뢰와 친근감을 갖게 한다.

획일화된 상품은 대량판매를 통한 막대한 이익을 가능케 해주지만, 차별화되기 어려운 상품의 한계로 인해 질이 아닌 양에 대한 강조를 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은 사회적 비만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현대의 합리화 제도가 야기한 비합리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패스트푸드에 의한 비만이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식 합리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육체적인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효율'이 지배하게 된 사회에서 학교 급식마저 간단히 데워서 내놓을 수 있는 반조리 음식으로 대체되고 있고, 교육 방식마저 효율적으로 '인적자원'을 '배출'하는 생산라인으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네슬이나 리처, 그리고 필자 가운데 누구도 패스트푸드점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식음료업계도 의도적으로 고객의 비만을 조장하거나 건강에 해가 되는 음식을 고의로 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논리에 편입된 식음료업계는 대중의 건강과 이익이 대치될 때 결국 이윤추구를 선택하게 될 공산이 크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포화지방 함량과, 대량으로 첨가된 설탕은 소비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가의 주머니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네슬이 말한 '사회환경의 개혁'이 필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 부분은 '비만 햄버거'로 동요하고 있는 미국이나 '불량 만두' 사건으로 들끓고 있는 한국사회 어디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국민보건은 기업가의 손에만 맡겨 놓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어제 밤에 먹은 음식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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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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