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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첫돌을 맞은 딸과 추억의 복도식 아파트에서
ⓒ 김순희
5년 전 목련이 활짝 필 무렵, 딸아이를 출산하고 친정에서 삼칠일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새로 이사했다는 집으로 옮겨왔다. 시내에서 한참을 들어간 곳이 있는 집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심 속의 시골'이라는 것이 딱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혼자서 집을 구하느라 애를 썼을 남편을 생각해 불평하진 않았다. 대수술을 하신 시아버님이 몸이 불편하신 상태라 장남인 남편이 모셔야 했고 출산을 한 아내를 대신해 이리저리 다니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남편이 그저 안쓰럽게 생각되었을 뿐이었다.

몇 동 안 되는 아파트가 작게 보이기도 했을 테지만 아이가 있고, 나를 좋아하는 시아버님이 계셔서 오히려 더 큰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 같다. 처음 이사한 곳이라 낯설고 아는 사람 없이 혼자 갓난아기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점점 친숙해졌다.

복도식이라 아침이면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옆집 아줌마들의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개구쟁이 아이들 놀이방 보내느라 한바탕 난리 치는 목소리가 현관문을 열어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옆집 아줌마들과의 왕래는 잦아지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서로를 의지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나 역시 아이 키우는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아줌마들을 생각하면 너무 재미나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 내게도 그런 시절이,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구나 싶어진다.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일화는, 그들과 가깝게 사는 맛을 익히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내던 가을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몸이 불편하신 아버님으로 인해 바깥 외출을 할 수 없었고, 아이 키우느라 주위를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내겐 친정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하루 동안의 휴가(?)를 내 주었다.

하루 동안 집을 비울 생각을 하니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버님이었다. 내 손을 제일 필요로 하실 아버님을 두고 집을 비운다는 것이 자꾸만 머뭇거리게 했다. 아이의 짐을 챙기면서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다.

결국 하루인데 싶어 저녁을 챙겨 놓고 아버님께 조목조목 얘기를 했다. 알았으니 얼른 가보라며 손짓을 하셨는데 그 모습이 영 발길을 떼지 못하게 했던 그때….

그래도 한번은 어머니를 봐야겠다 싶어 친정으로 갔다. 저녁에 남편이 일찍 퇴근해 아버님을 돌봐드리기로 약속해 두었고, 아침 역시 남편이 잘 챙겨드리기로 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생각했다.

친정 집에서의 하루는 너무 빨리 지나갔지만 모처럼 친정어머니의 얼굴을 대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늘 막내딸을 안쓰럽게 여기시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난 너무나 잘 알기에 헤어지는 서운함을, 다음에 다시 시간 내서 들르겠다는 말로 대신하고 서둘러 집을 나서야 했다.

떠나기 전, 난 옆집 새댁에게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으응, 6호 새댁, 나야. 해인이.”

“언니, 언제 오는데? 할아버지는 우짜고?”
“응, 해인이 아빠가 잘 챙긴다고 했다 아이가. 점심을 챙겨놓고 가겠지만 행여나 싶어 그라는데 새댁이 좀 가봐라. 어엉?“

“안 그래도 언니가 도착할라커믄 점심 때나 되야 할낀데 싶어 아까 가봤다 아이가.”
“아~, 그랬나? 고맙데이. 나 지금 출발할라카이 까네 그때꺼정 좀 봐래이.”

다행히도 옆집 6호 새댁이 가보았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아이를 업고 몇 번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사람에게 아버님을 맡긴다는 게 영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린 새댁의 마음 씀씀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새댁 뿐만 아니라 그 곳의 5호 언니, 3호 언니, 10호의 아주 젊은 새댁이 다 나의 가까운 자매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몇 호'라는 건 그 아파트의 호수를 딴 것으로, 우리들이 몇 호 언니, 몇 호 새댁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아서 불렀던 것 같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집으로 들어오는 차를 기다리면서도 마음은 벌써 집에 도착한 것 같았다. 영문도 모르고 등에 엎드려 자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이 너무 평온해 그 모습을 보며 아마도 난 더 큰 힘을 얻지 않았나 싶다.

아파트까지 셔틀버스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를 업은 채 뛰고 있는 모습이 아파트 8층에서도 보이는지 이미 8층 식구들이 쭉 나와 내가 뛰는 모습에 박장대소하며 웃고 있었다. 조그마한 아줌마가 아이를 업고 가방을 목에 두르고는 헉헉거리며 뛰는 모습이 얼마나 가관이었겠는가.

“해인아, 천천히 온나. 넘어지겠다. 뭐하러 그리 급하게 오노?”
“7호 언니, 집에 꿀 발라놨나? 해인이 울겠다. 다리도 짧은데 마아 걸어온나.”

뛰어오는 내 모습이 영 아니었는지 다들 한 마디씩 건네 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도착하고 보니 다들 나를 보며 반기는 게 아니라 내 등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딸아이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7호 언니는 오지 말지. 해인이만 보고 싶더라.”
“뭐라꼬, 6호 니가 그럴 수가 있나? 5호 언니는 어땠노?”
“나도 마찬가지다. 해인 에미는 별루고, 우리 며늘아(며느리)만 보고 잡더라.”

7호 앞에 서서 작은방 창문을 열어보니 떠날 때 당부를 잊지 않았던 팔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신 아버님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왔다는 신호로 손을 흔들어 보이자 아버님은 하던 운동을 멈추고 손뼉을 치셨다.

‘왔냐? 잘 갔다 왔어? 보고 싶었다 며늘아가.’
‘나 없으니까 심심했죠? 아니면 잔소리 하는 사람 없어 속 시원했던지….’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대화는 없었지만 아버님의 눈물을 흘리시는 두 눈을 보면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쉽지 않았을텐데 옆집 할아버지의 상을 치워주고, 심심해 하실까봐 몇 마디 건네주며 흐트러진 방 여기저기를 치워주고 나왔다던 나의 사랑하는 이웃 아줌마들이 너무 보고 싶다.

그 곳을 떠나온 지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지금도 만나면 5호 언니, 3호 언니, 6호 새댁이라 부르지만 그때의 어린아이들은 모두 성장하여 학교를 다니고 있다. 새댁들도 모두 한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요즘은 아이 키우느라 바깥출입이 힘들다고 하소연해온다.

그들이 있어 힘들어야 할 시기 행복했고, 부여잡았을 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내 모습이 변해가도 내게 심어준 그들의 정만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언제나 나의 곁에서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자 삶의 의미가 되었던 그때를 되돌아보니 참으로 마음이 풍성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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