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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환 교수가 1972년에 우리 말로 옮긴 <은자의 황혼>(서문당)입니다. 이 책은 2000년에 다시 펴내면서 책이름을 <숨은이의 저녁노을>로 고쳤습니다.
얼마 앞서 새로 나온 데스먼드 모리스의 <육안으로 본 털없는 원숭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은 재밌게 읽는데 책이름이 좀 아쉽습니다. '육안(肉眼)'이란 다름아닌 '맨눈'이란 말이거든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보는 눈"이 '맨눈'입니다. 그래서 "사물을 겉으로만 보는 눈"을 가리키기도 해요.

육안으로 본 털없는 원숭이
=> 맨눈으로 본 털없는 원숭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니가 쓴 작품 가운데 '삐삐'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겠죠? '삐삐' 이야기를 정식으로 계약해서 펴낸 곳에서는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왜 '롱(long) 스타킹(stocking)'이어야 할까요? 실제로 1970년대에 우리 말로 옮겨져 나온 책 가운데 <긴 양말을 신은 피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롱 스타킹'은 우리 말 '긴 양말'로 고쳐서 써야 알맞다는 이야기예요.

삐삐 롱스타킹
=> 긴 양말(을 신은) 삐삐 / 삐삐의 긴 양말


연암 박지원 선생이 지은 책 가운데 '호질(虎叱)'은 무척 이름난 작품입니다. 간도 쓸개도 없고 더러워 빠진 양반들을 '호랑이가 꾸짖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호질(虎叱)'입니다. '호질(虎叱)'을 읽으려면 옛날 한문이 아닌 요새 우리 말로 옮긴 글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작품 <호질>은 우리 말로 줄거리를 옮기면서 글이름까지 우리 말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호질
=> 범이 꾸짖다 / 범이 꾸짖음 / 범이 꾸짖은 이야기 / 범에게 꾸지람 듣다


얼마 앞서 헌책방에서 <가와바따 야스나리 전집>(신구문화사. 1969)을 찾아서 보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가와바따 야스나리이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설국(雪國)>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느 서점에서 팔리는 책도 거의 다 <설국>입니다.

지난 밤입니다. 잠자기 앞서 가와바따 야스나리 짧은소설을 읽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엇, 그런데 왜 '설국'이지?" 하고요. '雪國'이란 이름은 일본사람이 써서 일본에서 읽히는 소설 이름이 아니냐는 거지요.

'레이먼드 브리그즈'가 그린,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 그림책은 영어권 나라에서는 'Snowman'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읽힙니다. 1997년에 우리 말로 옮긴 출판사에서는 그 책을 <눈사람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옮겨서 팝니다.

고유명사로 쓰는 이름이라면 그 이름을 그대로 살려서 씁니다. 말괄량이 '삐삐'도 그렇고 '앤'도 그렇지요. 하지만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라면 마땅히 우리 말로 옮겨야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설국' 또한 일반명사인 만큼 우리 문화에 알맞는 이름으로 고쳤어야 옳겠고요.

설국
=> 눈나라 / 눈세계 / 눈누리 / 눈바다


꽃이 가득한 곳을 '꽃누리 / 꽃나라 / 꽃천지 / 꽃세계 / 꽃바다'라고 합니다. '-나라'라는 말은 "어떤 낱말이 나타내는 사물의 세상이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러니 "눈이 가득 덮힌 그런 곳"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눈나라'라고 해야 가장 자연스럽고 알맞은 말이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은 '설국'이라는 이름에 길들여지고, 가와바따 야스나리 하면 '설국'이 곧바로 튀어나오겠지만, 앞으로는 책이름을 고쳐야지 싶습니다. 원작 이름은 '雪國'이지만 대한민국이란 나라안에서는 '눈나라'로 말이죠.

지난날에는 역사 시간에 '타제석기(打製石器)'를 배웠지만 지금은 '뗀석기'만을 배워요. '타제석기' 같은 말은 쓸만한 말이 아니기에 바꾼 거지요.

한 번 자리잡힌 말을 바꾸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바꿔야 알맞고 옳다면, 힘들고 어려운 징검돌을 거치는 가운데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은 '잘못된 말'에 길들여졌어도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은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 하니까요.

▲ 1960년에 나온 왕학수의 <세계 교육명저총서 (1)>에 실린 목차. 여기에는 "숨은이의 저녁 때"라고 옮겨놓았습니다.
ⓒ 최종규
책이름은 한 번 굳으면 그야말로 고쳐지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책이름도 '고침판'을 낼 때는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 좋은 본보기로 페스탈로치의 <숨은이의 저녁노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교육학자 김정환 교수가 <은자의 황혼>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에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은자의 황혼>은 일본식 책이름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일찌기 1950년대에는 왕학수 씨나 다른 분들이 페스탈로치가 지은 책을 소개하며 이미 <숨은이의 저녁때>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책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기는 <은자(隱者)의 황혼(黃昏)>으로 되어 버린 거죠.

은자의 황혼
=> 숨은이의 저녁노을(놀) / 숨은이의 저녁때


이렇게 제대로 바로잡는 일은 어렵습니다. <숨은이의 저녁때>였다가 <은자의 황혼>으로 바뀌어 널리 알려졌다가, 얼마 앞서 다시 <숨은이의 저녁노을>로 자기 이름을 되찾았거든요.

<설국>을 <눈나라>로 바로잡는 일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雪國>이라는 이름은 한국사람이 한국 땅에서 읽을 만한 알맞은 책이름이 아닌 만큼 언제가 되더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민음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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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우리말 꾸러미 사전》《우리말 글쓰기 사전》《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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