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2 14:12최종 업데이트 23.08.0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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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1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올해 85세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의 양심'으로 불렸다. 1988년 8월 20일 자 <한겨레> 4면 중간 기사는 도이 다카코 일본 사회당 위원장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한반도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청산해야 한다"라고 발언한 사실을 다루면서 와다 하루키를 거론했다.

기사는 "일본의 양심과 이성을 대변해 온 와다 하루키 교수처럼 일본은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극소수의 일본 지식인 가운데 있었긴 하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인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일본의 양심으로 불려 온 와다 하루키 교수가 강제징용(노동자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최근의 생각을 밝혔다. 저서인 <한국전쟁 전사>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서울을 방문한 그는 지난 1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안에 관해 "위기를 피하기 위해 지혜를 낸 해결책"이라고 호평했다.

노예노동을 강제한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를 대신해 한국 정부가 배상책임을 떠안는 이 방안에 대해 그는 "외교적으로 너무 큰 피해를 회피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피해 해결에 도움을 주는 방안이었다는 의미에서 '지혜로운 해결책'이라고 평한 게 아니라, 일본과의 충돌로 인한 한국 외교의 피해를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안이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평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측에서 뭔가 대응책이 나오기를 당연히 기대했을 것이지만, 기시다 총리는 '마음이 아프다'고 했을 뿐"이라며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만둔다고 할 수는 없다"고 윤 대통령의 처지를 설명했다. 이어 윤 대통령에 대해 그는 "딱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지혜로운 해결책'을 냈다고 평가한 대목과 대비되는 언급이다.

와다 하루키의 착각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 정부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방안이 발표된 지난 3월 6일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피해당사자 양금덕 할머니가 정부안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진 외교부장관이 지난 3월 6일 '제3자 변제'를 선언하기 전에, 와다 교수는 이를 반대하는 성명에 동참했다. 시민운동가·학자·변호사·언론인 94명이 참여한 지난 1월 16일의 공동성명을 통해 "피고 기업이 사과도 하지 않고 보상으로 1엔도 내지 않는 방안은 해결이라고 부를 수 없다"며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과·배상을 촉구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그는 제3자 변제가 관철된 뒤에는 이를 '지혜로운 해결책'으로 평할 뿐 아니라, 징용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는 인식도 함께 표시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피해자가 고령이고 별로 시간은 없다"면서도 "지금 해결을 요구해도 어려울 것"이라며 "긴 안목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문제의 해법은 이미 제시돼 있다. 전범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판결이 2012년에 이어 2018년에도 거듭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 판결대로 하라고 주문하지 않고 '긴 안목'으로 처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와다 교수가 '긴 안목'을 운운하며 제3자 변제를 지지하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발언들이 인터뷰 중에 나왔다. "일본이 너무 완고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방안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는 대목이 그중 하나다. 기시다 내각이 사과는 물론이고 한 푼의 배상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니 그런 일본과 관계를 복원하자면 윤석열 정부처럼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인식을 반영하는 발언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지난 1년여 간의 한일관계를 피상적으로 관찰한 결과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고 아베 신조 총리보다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 아베처럼 극우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외교적 완고함을 유지할 만한 정치적 자원이 충분치 않다. 그런데도 일본 입장에서 볼 때 기시다는 아베보다 많은 외교적 이익을 거뒀다. 그 이유를 와다 교수는 잘못 해석했다.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아베 내각은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지원금 명목으로 10억 엔을 내놓기로 하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물론 이 사과는 한국 국민에 대한 공식 사과가 아닐 뿐 아니라, "어제 일로 모두 끝이니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는 아베의 짜증 섞인 발언이 그달 30일 자 <산케이신문>에 보도되면서 의미가 퇴색되긴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시다와 달리 아베가 그 정도라도 한 데는 한미일 3국 역학관계가 작용했다. 박근혜 정권이 어느 정도 대립각을 세웠고, 이로 인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에 압력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의 결과물이다.

아베 내각을 움직인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압박이지만, 미 행정부가 압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박근혜 정권이 일정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은 문제 해결에 꼭 필요한 사과·배상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지금처럼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윤석열 정권과 차별성을 띤다.

2015년 연말에 아베 신조의 완고함을 억제한 메커니즘이 윤석열 정권 하에서는 작동하지 못했다. 대선운동 때부터 '유사시 일본군의 한국 주둔'을 운운하며 대일 의존적 태도를 보인 윤석열 정권은 징용 문제에서 협상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문제를 하루빨리 끝내는 데만 치중했다. 한국 정부가 이랬기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 역시 일본을 크게 압박할 필요가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외교 전문가이자 위안부합의 당시의 부통령이다. 그런 그가 2015년에 미 행정부가 했던 것만큼 2023년에 하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국 대통령이 일본에 저자세로 나오니, 2015년 수준으로 일본을 압박할 필요성을 느끼기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은 기시다 내각의 완고함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굴욕적 태도에 있다. 윤석열 정부가 자발적으로 허리를 숙이니, 기시다로서는 굳이 양보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더 거만하게 행동한 것이 완고함으로 비쳤을 뿐이다.

한일 합동으로 북한 문제에 집중할 때? 변명일 뿐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2일 지난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와다 교수가 제3자 변제를 지지하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부분은 대북 연대의 필요성에 관한 언급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은)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며 "현 국면에서는 일본의 과거 반성이 부족하다는 문제보다는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7차 핵실험 가능성,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군사정찰위성 발사 문제 등으로 안보 위협이 가중되고 있으니, 지금은 피해자 구제보다는 북한 문제에 집중하는 게 맞다는 발언이다.

한국이 사과·배상을 요구하면 한일 양국의 대북 연대가 약해질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90세 전후의 피해자들에게 1~2억 원 정도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대북 연대를 훼손한다는 주장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북한의 위협이 정말 절실했다면, 두 정부가 징용 문제를 봉합하고자 1년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소비한 이유 역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가중되는 속에서는 역사 문제보다는 북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와다 교수의 주장은 1990년대 이후의 역사적 흐름과도 상치된다.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로 위안부 운동은 1993년 제1차 북핵위기와 2002년 제2차 위기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했다. 지금 이 운동은 한국만의 운동이 아니라 세계적 운동이 되어 있다.

냉전 시대에 억눌렸던 징용 피해자들의 움직임도 1990년 전후의 탈냉전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북한의 핵 무력이 증강되고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속에서도 한일 역사문제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은 핵 문제로 인한 긴장 고조가 역사문제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제3자 변제를 지지하게 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자 와다 교수가 내놓은 근거들은 모두 다 현실에 맞지 않다.

외교나 안보 현실을 과장해서 언급하며,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위한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와다 하루키 교수의 모습은 그가 '일본의 양심'인지 '일본을 위한 양심'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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