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3 12:00최종 업데이트 23.06.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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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러브샷까지 했지만, 지금 그는 결과적으로 '윤석열 패싱'이 될 만한 일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정세의 미묘한 변화에 맞춰 북일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그의 기민한 대응은 다른 분야도 아닌 한반도 문제에서 윤석열 정부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모금 행사 중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독재자로 지칭해 중국이 크게 반발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의 중국 방문은 양국 간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성과를 낳았다.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19일 블링컨 장관이 시 주석을 만난 뒤에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솔직하고 실질적이며 건설적인 대화"가 있었다고 브리핑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한 지난달 21일, 그곳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미중 관계가) 아주 조만간 해빙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전망을 내놓았다. 이 발언과 블링컨 방중 성과의 관계를 묻는 기자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장-피에르 대변인이 위와 같이 발언했다.

장-피에르 대변인은 "블링컨 장관의 매우 중요한 메시지는 (충돌을 초래할) 오판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모든 범위의 이슈에 관해 열린 대화 채널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서 "미국은 활기차게 (중국과) 경쟁할 것이지만 책임감 있게 경쟁을 관리하여 관계가 갈등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점을 (시진핑 앞에서) 분명히 했다"라고 밝혔다.

최근 들어 미국은 이란과의 대결 국면도 누그러트리고 있다. 지난 10일, 이라크 외교부 고위 관리는 자국에 동결돼 있는 이란 자금 27억 6000만 달러(3조 5000억 원)가 미국 승인하에 동결 해제됐다고 <로이터통신>에 밝혔다. 이라크가 가스 및 전기 수입대금을 이란에 지급할 수 있도록 미국이 허용해 준 것이다. 이어 14일과 16일에는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을 다시 진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러시아가 서방세계의 제재 속에서도 경제를 유지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중국과 이란의 협력이다. 지금 미국은 두 나라와의 긴장을 누그러트리는 방식으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다.

김정은이 북일정상회담 받아들일 가능성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면, 미국의 구상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북·중·러의 밀착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커지면 3국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져 미국이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힘들어진다.

미국이 북한과의 긴장 지수를 더 크게 올리지 않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떨어트리리라는 전망을 낳는 이런 상황에 대해 민첩하게 대응하는 쪽이 바로 기시다 일본 총리다. 지난달 27일 도쿄에서 열린 납북자 귀환 촉구대회 때 북일정상회담을 위한 고위급 협의를 제안한 그는 지난 8일 참의원 재정금융위원회에서도 똑같은 발언을 했다.

북한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제안을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분명히 공식 표명하라'로 해석될 만한 메시지를 내보냈다. 5월 29일 박상길 외무성 부상의 담화문에 "그가 이를 통하여 실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있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킬 목적으로 정상회담을 이용하려는 건지, 정말로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건지 분명하지 않으니 좀 더 명확하게 공식 입장을 밝히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상길 부상은 "만일 일본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된 국제적 흐름과 시대에 걸맞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대국적 견지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고 관계 개선의 출로를 모색하려 한다면 조·일 두 나라가 만나지 못할 리유가 없다는 것이 공화국 정부의 립장"이라고 밝혔다.

외무성 부상이 김정은 위원장의 승인 없이 북일정상회담의 성사 조건을 발표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담화는 기시다의 제안에 김정은이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총리가 북일정상회담에서 납치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북한도 알고 있으므로, 기시다 내각이 북일수교 문제와 납치 문제의 비중을 적절히 안배해 구체적 제안을 하면 김정은이 정상회담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기시다 총리가 근래 들어 북일정상회담을 더욱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북한이 외무성 부상 담화를 통해 조건부 호응을 표시한 것은 양측이 물밑 접촉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미일동맹이 한층 밀착돼 있는 지금의 정세를 감안하면, 기시다 총리가 백악관과 교감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북한과 미국의 접촉이 활발했던 2018년에 아베 신조 내각은 이런 상황에서 소외돼 '재팬 패싱'이라는 비웃음을 초래했다. 지금 기시다 총리는 대북관계에서 한국과 미국을 앞서가려 하므로 그가 시도하는 것이 '재팬 패싱'의 극복 이상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국익 훼손하는 중대 국면 될 수도
 

1990년 9월 29일 자 <한겨레> 기사 "북한-일본 조기수교 공동선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윤석열 대통령은 정세 변화와 상관없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러시아와도 대립각을 높이고, 기시다 총리는 분위기가 누그러진 틈을 활용해 북한에 다가서려 하고 있다. 남북한과 일본의 현대사에 비춰보면 꽤 이례적인 현상이다.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에 활발했던 북·일 수교 교섭은 남북관계와 보조를 맞춰 진행됐다. 1989년 1월 23일 금강산 남북공동개발의정서가 체결되고, 3월 27일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이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발표하고, 12월 22일 베이징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이 열렸다.

제9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열린 1990년 5월 24일, 김일성은 '조국통일 5개 방침'을 발표해 한반도 긴장 완화 및 평화, 자유왕래 및 전면 개방,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제환경 조성, 통일을 위한 대화의 발전, 전민족적 통일전선 형성을 제안했다.

이렇게 남북한의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때인 그해 9월 24일,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와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수교 교섭의 물꼬를 텄다. 그달 29일 <한겨레>는 "북한 노동당과 일본 자민·사회당 합동대표단은 28일 양국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국교를 수립하며,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전후 45년간 북한에 끼친 손해에 대해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북·일 수교회담은 1992년 11월 5일 제8차 수교교섭 본회담을 계기로 수면 밑으로 내려갔다가 2000년 4월 4일 제9차 본회담을 계기로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다. 1990년 전후의 세계적 탈냉전 때 실현되지 못한 양국 수교가, 1998년 11월 12일 윌리엄 페리 대북조정관 임명을 계기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부드러워지던 시점에 재추진됐던 것이다.

이 시기의 북일관계 역시 남북관계와 보조를 맞췄다. 2000년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자유대학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통일을 제안했고(베를린 선언)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됐다. 이런 가운데 제9차 북·일 수교교섭 본회담이 열렸다.

베트남전쟁에 발이 묶인 미국이 1969년 7월 25일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긴장을 이완시킨 뒤로 동북아에 데탕트(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시기에 미·일은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거나 수교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박정희 정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박 정권은 1972년 7·4남북공동선언을 성사시키는 제한적인 성과를 거뒀고 일본은 북일관계에서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1990년대 초반, 2000년 전후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은 적어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에서만큼은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보수정권이든 아니든, 이런 패턴이 유지됐다. 이는 남북관계가 극도로 냉각된 상태에서 일본이 북한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것이 남북한과 일본의 현대사에서 이례적임을 보여준다.

지금 상황을 이대로 방치하면, 위의 패턴이 깨지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글로벌 정세 변화에 관계없이 대결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사이에 일본이 북한에 신속히 접근하면, 한국이 한반도 문제에서마저 일본에 뒤지게 된다. 김정은과 기시다가 러브샷이라도 하게 되면, 윤석열 패싱이 문제가 아니라 코리아 패싱이 한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중대 국면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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