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2 11:39최종 업데이트 23.12.0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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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기자말]

이관술의 동경고등사범학교사진 동경고등사범은 한중일의 수재가 다닌 학교다 ⓒ 손옥희 제공

   
손옥희는 망설임 끝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조작사건의 유가족을 찾는 호소문"을 쓰기 위해서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생각은 오래 했으나 막상 글로 옮기려니 쉽지 않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하얀 종이와 펜을 꺼냈다. 생각을 글로 풀어내기엔 손글씨가 나을 것 같아서다. 그는 "여러분!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아시나요?"라고 운을 떼었다.

해방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검열위원이며 재정부장이었던 이관술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1946년 11월 무기징역을 받았다. 미군정이 주도하여 수사와 발표가 이뤄진 이 사건은 이관술 등 조선공산당의 핵심간부가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근택빌딩에 있는 조선정판사에서 6회에 걸쳐 200만 원씩 총 1200만 원이나 되는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이다.


손옥희의 할아버지 이관술은 형이 확정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옮겨가서 복역하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1950년 7월 초순 대전 골령골에서 심용현 중위가 이끄는 헌병대 무리에게 학살당했다. 손옥희의 노력으로 이관술은 2006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불법처형' 당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2015년 대법원에서 손해배상 판결도 받았다.

그러나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는 일. 손옥희는 2020년 경주에 있는 보훈처지청에 서훈 신청을 했으나 그해 8·15를 앞두고 '광복 이후의 행적'을 이유로 '탈락'되었다는 공문을 받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제하에서 두 번이나 구속되어 고문으로 몸이 망가지고 해방되는 날까지 수배 상태였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니, 김영삼 정부 이래 일제하 사회주의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포상한다는 것은 정부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할아버지는 1946년에 감옥에 갇혔으니 북한 정권의 수립이나 한국전쟁의 발발에 관여한 바도 없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를 문제 삼아 공훈을 인정하지 않다니 손옥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훈처에서는 서류 보완에 대한 요청도, 공문 외에 추가 설명도 없었다. 그는 문재인정부의 보훈처가 보여주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다. 
 

국가보훈처에서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에게 보낸 공문 광복이후의 행적 때문에 포상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 손옥희 제공

 
사실 손옥희에겐 서훈보다 더 절실한 과제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대가를 바라고 목숨을 바친 게 아니기에 정부의 표창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조작되었고 할아버지가 누명을 썼음을 밝히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손옥희는 2023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할아버지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담당부서가 된 형사21합의부에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사건 관련 기록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검찰은 지난 8월 '경성지방법원 1946형공제2336'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장짜리 답신을 보내왔다. 또 8월 24일 자로 "재심신청이 기각되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밝혔다.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이들 공문을 받아 본 손옥희는 긴 한숨이 나왔다. 쉽지 않으리라 봤지만 공판기록과 판결문 원본이 없다면 재심 개시를 결정하는 데 아무래도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재심이 열려야 무죄를 다툴 수 있을 터인데 답답한 마음이다.

고민 끝에 손옥희가 생각해 낸 방안이 유가족을 모으는 것.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할아버지부터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홍계훈까지 치면 열 명의 구속자 유족이 있으니, 이들을 모아 함께 목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마치 골령골 유족이 함께 모여 이승만 정부의 불법 처형을 밝혀냈듯 70여년 가까이 숨죽이며 살아왔을 이들을 모아 '정판사'사건의 진실을 밝혀낼 작정이다. 그래서 손옥희는 호소문 작성에 나섰고 이 한 장의 글이 메아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집안의 누구도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손옥희가 몇 줄을 더 써내려갔을 때 건넌방에서 손주 울음소리가 들렸다. 손옥희는 잠시 펜을 놓았다. 손주의 꼬물거리는 손을 잡고 젖병을 물린다. 뒤늦게 결혼하여 직장생활하랴 애 키우랴 힘든 딸을 뒷받침하러 포항에서 올라와 주중에는 세종시에 머무른다.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하다. 그 숱한 시련을 겪고도 이렇게 대가 이어지는 게 신기하다. 할아버지 이관술이 이 정경을 보신다면 뭐라 하실까?

손옥희는 할아버지 이관술에 대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이름 석 자를 알았을 뿐 청년시절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어머니 이경환은 당신의 아버지 이관술에 대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이관술의 사위이면서 손옥희의 아버지인 손붕익도 마찬가지. 이관술은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비밀창고에 갇힌 존재였다. 집안의 누구도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집 밖에서 불현듯 들려와도 못 들은 척 흘려보낼 뿐. 때문에 손옥희에게 할아버지는 안개 가득한 태화강변을 거니는 흐릿한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존재가 집안에 드리운 상처는 컸다. 당신만이 아니라 할머니 박가야, 세 이모 성옥, 경옥, 정성이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할아버지의 동생 이학술과 사위이며 큰 이모 이정환의 남편인 박동철은 총살을 당했다.

박동철은 울산농고를 나와 착실하게 범서면 면서기를 했으나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 당해 울주군 운화리 대운산골짜기에서 주검이 되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큰이모 정환은 서러워할 틈도 없었고 외로워할 처지도 아니었다. 친정으로 돌아와 유복자 박경희를 낳고 무너진 집을 수습해 농사일에 나섰다. 이정환은 집안은 단정하게 하면서도 집밖에 나갈 때는 남의 눈총을 받을까봐 험한 옷을 입었다. 그런 세월을 살다가 이모는 쉰을 갓 넘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이관술이 감옥살이를 하고 어머니 박가야와 어린 동생들을 전쟁 중에 잃었으니 한평생 가슴에 납덩이가 그득했으리라. 이 비극이 이승만 정부의 집단학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할아버지에 관해 어떤 얘기도 하지 않는 게 하나의 약속이었다.

엄마 이경환도 업보를 지고 살았다. 시집 간 경주 강동면 삽실마을에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누구누구의 딸이어서 이런 골짜기의 가난한 양반한테 시집왔다"라고. 어머니는 한 귀로 흘렸다. 묵묵히 수행하듯 논일과 밭일에 열심이었다. 동네 관혼상제가 있으면 먼저 나서서 일머리를 잡고 설거지까지 도맡았다. 공산당 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위조지폐'를 만든 범죄자란 멍에까지 있으니 어머니 이경환이 시댁 동네에서 이고 가는 짐은 버거웠다. 아픈 가족사다. 이 아픔을 딛고 손주가 고운 모습으로 자라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손옥희는 손주를 다독이고 다시 펜을 들었다. 생각 같아선 한달음에 써내려갈 것 같지만 문장은 어둔 밤을 헤맨다. 내가 이러구서 어떻게 애들에게 작문을 가르쳤담, 자신을 책망하다 손옥희는 책상 한 켠에 붙여놓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의 할아버지 모습이다. 문득 손옥희는 그때 할아버지가 꾸었을 꿈이 궁금하다.
    

이관술의 손녀딸 손옥희 이관술의 생가 앞이다. ⓒ 박만순

 
이관술을 알게 모르게 멀리해 온 손옥희에게 안재성 작가가 쓴 <경성트로이카>(사회평론 2004)는 운명같은 책이었다. 이 책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파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의 삶과 투쟁이 그려져 있다. 한편 이재유와 더불어 도피 생활을 하면서 경성재건그룹에 참여했던 할아버지의 삶도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손옥희는 청년이 되어 할아버지의 삶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존경도 하고 원망도 했다. 울산 태화강변 입암 마을의 그 너른 땅을 가진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제대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왜 고난의 길을 갔을까? 적당히 눈감고 당신의 영광만을 쫒았다면 누구 못지않은 호사를 누렸을 터인데, 일제에 맞서 싸운다면 민족주의를 택해도 될 터인데 왜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받아들였을까?

안타까움과 의문이 많았다. <경성트로이카>는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손옥희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꽉 막힌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손옥희가 <경성트로이카>와 함께 챙겨 읽은 할아버지의 '회상기'에는 당신의 고뇌와 모색이 잘 담겨있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에서 3.1운동 못지않은 호응이 일어날 때 민족교육을 하겠다고 학교를 세운, 교주나 교장이 학생들을 막아서고 휴학조치를 하고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는 처사를 보면서 학교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이 보장될 수 있는 유산자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이 민족해방투쟁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 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경성트로이카>를 읽고 삶이 변했다 

<경성트로이카>를 읽고 손옥희 삶은 변했다. 할아버지의 삶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억울함을 풀어드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전에도 계기는 있었다. <울산매일>의 장성운 편집국장이 1994년부터 14회에 걸쳐서 '이관술의 울산지방야사'를 연재했다. 장 국장은 울산 곳곳을 돌며 어르신의 회고를 들었고 일본까지 건너가 할아버지의 행적을 모았다. 그때 입암마을만이 아니라 울산이 들썩거리고 '이관술'을 기리는 분위기가 드높았다.

그때 손옥희는 30대 중반, 국어교사로 경주 안강여중고에 근무하고 있었다. 시부모에 시조부까지 모시고 있는 처지. 8시 30분까지 출근하려면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아이들 학교 준비시키고 몸단장을 해야 한다. 포항 흥해읍에서 출근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 시내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정류장까지 가서 대구·영천 방면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갈아타고 안강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

수업이 끝나면 허겁지겁 돌아와 두 아이의 하교를 챙기고 시어른이 편안하셨는지 여쭙고 퇴근하고 돌아올 남편의 저녁상을 준비해야 했다. 도저히 할아버지의 신원(伸冤)을 위해 뛸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니 이경환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여전히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와도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보다도 혹시나 가족들이 또 고초를 겪을까 마음 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관술은 1941년 경성콤그룹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1943년, 3개월의 병보석을 받고 고향마을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일본 경찰이 민족해방운동의 핵심 지도자를 감옥 밖으로 내보낼 정도면 당시 이관술의 몸상태는 아마 죽음을 넘나드는 정도였을 것이다. 1932년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그는 심한 고문으로 폐병을 앓았다. 1941년에 구속되었을 때도 "박헌영의 소재지를 대라"고 6개월이나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기간 동안 서대문서의 요시오카 경부가 이관술을 직접 취조하며 남긴 신문조서가 27회나 되었으니 얼마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

제자이며 누이인 이순금은 "오빠가 단 하나의 동지도 내어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니 이관술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 터. 10분 거리의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은 매일 이관술의 집에 들러 그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드디어 병보석이 끝나는 1944년 3월 31일 일제는 이관술에게 재수감 명령을 내린다.
 

경성콤그룹사건으로 체포되어 받은 신문조서 이관술은 6개월동안 고문을 받고 몸이 망가진다. ⓒ 임경석

 
이관술은 전날 밤 딸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아내 박가야가 싸준 주먹밥을 품은 채 뒷마당의 담장을 넘었다. 폐병으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는 떠났다. 그날 태화강은 거칠게 선바위를 돌아나가고 강변을 따라 늘어선 대숲은 큰바람을 일으켜 일경의 주의를 흐트러뜨렸으리라.

조선공산당의 거물을 놓친 일경은 즉각 포위망을 펼치고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실패했다. 입암마을에선 이관술이 축지법을 써 피신했다고 믿고 있다. 울산경찰서는 아내 박가야는 물론 동네 사람 아홉 명을 끌고 갔고 이웃 망성마을 사람 여럿도 끌려갔다. 심지어는 임신으로 배가 잔뜩 부른 부산의 사촌동생까지 잡아가 모질게 고문했다. 이경환에게 그런 기억이 몸 곳곳에 새겨 있기에 언제나 손옥희의 손을 잡고 다짐을 받았다. 할아버지 이관술은 잊어야 한다고. 

그것은 해방조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성운 국장의 기사로 고향에서 이관술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올라오자 유족은 이를 반겼다. 1996년 이관술의 사촌형제인 이수은이 운영하는 주유소 터에 '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를 세웠다. 울산시내도 아니고 터미널 같은 공공장소도 아니고 선바위를 등지고 선 태화강변이어서 사람들 눈에 그리 띄지 않는 편이었다. 시신을 찾을 길 없으니 묘소를 대신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공적비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지역의 반공 보수단체가 들고 일어났다. 온갖 욕지기가 쏟아졌다. 경찰도 압력을 가했고 비문을 쓴 장성운 국장은 안기부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결국 집안에서는 더 큰 화가 닥칠까 유적비를 철거해 이관술의 생가 앞에 깊이 묻어버렸다. 철거하는 날까지도 보수단체회원이 몰려와 망치를 휘둘러 유적비의 몸돌이 깨져나가고 곳곳에 상처가 남았다.

분하고 아팠다. 집안의 땅에 내 돈을 들여 조상의 민족해방투쟁 업적을 기록하고 뜻을 이어받겠다고 세웠는데 봉변을 당하고 땅에 묻혀야 하다니. 일제강점기 시절에 느꼈던 한보다 더 큰 한이 가슴을 후볐다. 할아버지가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죽어서도 당신이 편히 누울 자리가 없다는 게 서러웠다. 당시 현장에 있던 어머니 이경환은 분하기도 하거니와 일가 집안이 또 아버지 이관술 때문에 화를 입을까 몸을 떨었다. 손옥희는 그런 어머니가 몸져 누울까 발을 동동 굴렀다.
  

이관술의 유적비 보수단체의 항의로 철거되어 땅에 묻혔다가 이관술의 종질 이일환씨 집앞에 놓였다. ⓒ 장호철 제공


그런데 어머니 이경환이 <경성트로이카>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칠순이 넘은 나이 몸은 더 약해지고 무너져내렸건만 가슴 한켠 아버지 이관술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갈망은 절절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경성트로이카>의 내용을 듣고 무슨 열병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손옥희도 마침 2005년 무렵은 여유가 있었다. 교사로서 학교에서 자리도 잡았고 자식들도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었다. 시어른도 세월 덕에 며느리 하는 일은 존중하는 터. 손옥희는 어머니 이경환을 모시고 할아버지를 향한 길로 들어섰다. 그는 당장 <경성트로이카>를 펴낸 사회평론으로 전화해서 안재성 작가의 연락처를 물었다. 어렵게 연결된 작가와 할아버지의 동덕여고 제자이며 동지였던 이효정 선생의 부천 집에서 함께 보기로 했다.

이효정은 이관술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로 부임한 동덕여고에서 만난 제자다. 이효정은 동덕여고의 이순금, 박진홍과 함께 광주학생의거에 동조해 연대 투쟁을 벌였던 인물. 그는 1933년 서울에서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 때 지원활동을 했고 1935년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해 활동했다. 이효정은 이런 투쟁으로 여러차례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3개월이나 옥살이를 했었다. 그는 이관술의 권유로 울산에 보성학교가 세워질 때 교사로 간 인연으로 어머니 이경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이 이어지던 터였다.

안재성 작가와 이효정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포항에서 경주로 가서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역까지 가 지하철 인천선으로 바꿔 타고 가는 길, 그날따라 KTX는 완행열차 같았다. 손옥희는 부천으로 가면서 할아버지 이관술의 유품, 큰이모 이정환이 마룻장 밑에 구덩이를 파고 꼭꼭 숨겼던 동경고등사범학교와 동덕여고의 앨범을 챙겨갔다.

큰이모가 돌아가실 때 손옥희는 대학 1학년, 할아버지에 대해 희미한 앎뿐이었으나 다른 것은 제쳐두고 할아버지의 앨범과 몇몇 책, 손편지를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덕분에 이관술이 동덕여고 교무실 난롯가에 앉아 있는 사진이나 딸 성옥에게 보내는 손편지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동덕여고 교무실에서 이관술 왼쪽부터 세번째가 이관술이다. ⓒ 손옥희 제공

 
이 만남은 안재성 작가에게도 큰 기쁨이고 자극이 되었다. 경성트로이카를 넘어 '이관술 평전'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경환과 손옥희는 혹시 안재성 작가가 장성운 국장처럼 고초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정성껏 도왔다.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울산의 여기저기를 함께 다니며 문중과 지역 어르신의 기억을 모으고, 해방 후 이관술에 대해 나온 신문기사를 타이핑해 안 작가의 집필을 도왔다. 힘내라고 포항 과메기나 영덕 대게를 선물하기도 했다.

마침내 2006년 8월 15일에 맞춰 할아버지의 평전 <1902~1905 이관술>(사회평론 2006)이 나왔다. 할아버지가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과정이 선명하게 복원되었다. 48년의 생애에서 20여년 동안 세 번 감옥에 가고 오랜 세월 수배 상태에 처했던 할아버지의 아픔, 절망, 꿈이 담겼다. 이관술 평전을 보며 손옥희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할아버지의 이름 석자를 되찾겠다고, '위조지폐'사건의 주모자란 누명, '위조지폐' 사건이 날조되었고 민족 해방을 위해 헌신한 독립지사임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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