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2 19:53최종 업데이트 23.01.2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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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동 외교부 1차관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12일 공개토론회에서 윤석열 정부는 배상은 물론 사과도 받지 않는 선에서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를 마무리하고 한국 정부가 책임을 떠안는 방안을 제시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5일 기자회견에서 "일한관계를 건전한 모습으로 되돌리고, 나아가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와 계속해서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도모해 가고 싶다"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1945년 이후의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가장 바람직하게 평가하는 시점은 식민지배 문제 해결 없이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킨 1965년이다. 이때 박정희 정부와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청구권협정 포함)은 해방 이전의 일반 민사채권을 정리하는 데 그쳤다.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등의 불법적 전쟁범죄는 다뤄지지 않았다.


일본 측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1965년은 지금의 강제징용 협상에서 일본 측의 무기가 되고 있다.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통칭되는 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이 체결된 1965년 이 해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때 제공된 경제협력자금이 마치 식민지배 처리 자금이었던 듯이 하면서,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데는 한·일 양국을 압박해 문제를 봉합시킨 미국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고, 협정 체결에 대한 한국민들의 저항이 거센 것을 지켜보면서도 박 정권을 부추긴 일본의 책임도 크지만, 자신이 피해자국 대통령임을 망각하고 문제를 봉합한 박정희의 책임도 매우 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금의 일본 정부가 1965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하도록 만든 주요 장본인이다.

박정희는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1940년 4월부터 제국주의의 밥을 먹고 살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된 1942년 10월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1944년 7월에는 육군 소위로 임관, 중국 내 항일세력을 토벌하는 데 가담했다. 이듬해 7월에는 중위로 진급했다. 이런 상태로 1945년 8월까지 활동했으니, 62년 인생 중 5년간은 일본 밥을 먹거나 친일재산을 축적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제국주의 덕분에 획득한 이익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여타 친일파들의 수익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5년간의 숙식 혜택과 1년간의 봉급 수령과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이익이 그의 수중에 별도로 들어갔다.

경협 자금을 정치자금으로 쓴 박정희
 

1961년 11월 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 정권 말기인 1978년 10월 31일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위원장 도널드 프레이저)가 발간한 <한미관계 조사>는 식민지배 문제가 박정희에게 어떻게 금전적 이익이 됐는지를 보여준다. <한미관계 보고서> 혹은 <프레이저 보고서>로도 불리는 이 문건은 1965년 청구권협정 체결의 결과로 한국에 유입된 경협자금을 언급하면서 "일부 자금은 민주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라고 고발한다.

박정희는 징용·위안부·징병 등에 대한 배상청구를 거론하지 않는 한편, 무상 3억 달러 외에 유상 2억 달러 및 상업차관 3억 달러로 구성된 경협자금을 받았다. 청구권자금으로 불린 이 돈은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분할 방식으로 들어왔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가 그 돈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한국인들의 식민지배 배상청구를 굴욕적으로 봉합해주고 받은 이 자금의 일부를 박정희가 정치자금으로 썼던 것이다

박정희는 차관 명목의 자금을 빌려 쓰게 될 한국 기업을 압박하는 방식도 구사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차관을 받는 한국의 당사자는 필요한 보증을 얻기 위해 일정한 퍼센트(대개는 10~15퍼센트지만 때로는 차입금의 20%)를 지불해야 했다"라고 고발한다. 차관을 사용할 기업으로부터 고액 수수료를 받아냈던 것이다. 식민지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외면하고 얻어낸 자금이었다. 

박 정권은 청구권 자금을 받은 한국 기업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에도 손을 내밀었다.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앞세워 일본 측에까지 접근했다.

1982년 2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 '박 대통령 시대의 비화' 제17회는 "정부와 여당은 외국으로부터 현물차관을 하거나 물건을 도입할 때 외국의 공급 측으로부터도 커미션이라는 이름의 정치자금을 거둬들였다"라고 한 뒤 이런 사례를 소개했다.
 
"국영기업체인 B사는 대일 청구권자금으로 어떤 기계를 도입키로 결정했다. B사의 책임자인 C씨는 물건을 사러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김성곤씨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났다. 김씨는 '일본에 가거든 ××회사의 누구를 만나라'고 업자를 지정해줬다."
 
김성곤이 지목한 일본 기업의 간부들은 도쿄 하네다공항에서부터 C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하지만 C는 그쪽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 회사가 팔겠다는 기계가 오래되고 성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가격마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 직원들은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듯이" C에게 암시했다. C는 그들을 뿌리치고 타 기업과 계약을 체결한 뒤 돌아왔다. 귀국 뒤 그는 김성곤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았고, 얼마 안 있어 국영기업에서 해임됐다. 김성곤이 화를 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C씨는 '귀국해서 안 것이지만, 그 기계를 비싸게 사는 대신 6%의 커미션이 공화당 정부로 들어가게 돼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고 술회했다."
 
이례적인 친일파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때는 친일행위로 이익을 얻었다. 일제강점 이후에는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배상청구를 곤란케 해주고 경협자금을 받은 뒤 거기에 손을 댔다. 경협자금의 수혜 기업들로부터도 수수료를 받고, 수혜 기업들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들로부터도 수수료를 챙겼다.

이완용이 1905년 을사늑약 때 일본을 도왔다면, 박정희는 1965년 을사 한일협정 때 일본을 도왔다. 이완용은 일본이 한국에 쉽게 들어오게 해주고 포상금을 받았고, 박정희는 한국을 떠난 일본을 위해 뒷마무리를 해주면서 거액을 챙겼다.

박정희는 떠나간 일본을 위한 '애프터서비스'를 수익화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이례적인 친일파였다. 그런 친일파가 대통령이 되어 일본의 강제징용 책임 등을 눈감아준 해가 1965년이다. 기시다 총리를 비롯한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그때를 건전한 시기로 호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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