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7 15:29최종 업데이트 22.12.0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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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서울 시내 호텔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 주재로 첫 모임을 가진 현인회의에는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최상용 전 주일대사 겸 고려대 명예교수,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이 참석했다. ⓒ 외교부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를 위한 '현인회의'를 출범시켰다. 외교부의 6일 자 보도자료는 현인회의의 발족 취지를 "한일 간 현안의 합리적인 해결방안 모색 및 관계 개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측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외교당국 간 긴밀한 대화와 협의를 지속해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일관계 중에서도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 해결이 주안점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지난 9월 5일 제4차 회의로 종결된 강제징용 민관협의회의 후속 기구로 공청회나 공개토론회를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외교부에서 있었다. 그랬다가 이번에 표현이 다소 생경한 현인회의라는 협의체가 출범하게 됐다.

이달 6일 서울 시내 호텔에서 박진 외교부장관 주재로 첫 모임을 가진 현인회의에는 네 명이 참석했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최상용 전 주일대사 겸 고려대 명예교수,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이다.

사실, 현인회의라는 표현은 한국인 어감에 친숙하지 않다. 한국인들에게는 고문단·자문회의나 원로회의 같은 용어가 익숙하다. 또 현인보다는 현자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한자문화권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일본에서 사용된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외무대신 시절인 2017년 5월 2일에 설치를 예고한 것도 '핵군축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현인회의(核軍縮の実質的な進展のための賢人会議)'였다.

현인회의와 함께 많이 쓰이는 유식자회의(有識者会議)는 주로 일본 국내문제와 관련해 사용된다. 내각부의 '자녀 빈곤대책에 관한 유식자회의', 법무성의 '갱생보호의 실태를 고찰하는 유식자회의' 등등이 그러하다.

이와 달리 현인회의는 위의 핵군축 현인회의처럼 국제 문제와 관련해 많이 사용된다. 1986년 12월 10일 자 <매일경제> 기사 '한·일 현인회의에의 기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도 일명 현인회의로 불리는 한일 21세기위원회를 설치하기로 전두환 정권과 합의한 바 있다.

선비들이 많았던 한국에서도 현자나 현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생을 학문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어리석거나 무지몽매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쓴 글도 '졸고' 혹은 '졸저'로 낮춰 부르는 예가 많다. 자신이 명사 정도로 불리는 것은 받아들여도 현자나 현인으로까지 불리는 것은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한국 문화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시킨 현인회의는 한국인의 정서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의 위신 우선적으로 고려

현인회의를 구성하는 네 사람의 한일관계 인식 역시 한국인들의 시대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강제징용과 관련해 그렇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은 2020년 11월 27일 제52회 한일경제인회의에서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국 정부가 떠안는 특별 입법을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 퇴로를 열어주고 한국이 도덕적 우위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과 한국 사법부는 해방 73년 만인 2018년에 원고 승소판결을 통해 전범기업에 대한 '법적 포위망'을 만들어놓았다. 이 포위망을 풀어주면 한국이 도덕적 우위에 서리라는 게 홍 회장의 전망이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범죄자가 포위망을 지키던 경찰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감안하지 않은 주장이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강제징용 해법 역시 국민정서를 벗어나 있다. 지난 9월 6일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세미나에서 한·일 기업의 자발적 헌금을 기억화해미래재단 같은 단체를 통해 피해자에게 지급하자는 종래 주장을 되풀이했다.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이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고 직접 배상해야 이 문제가 종결될 수 있다는 점을 외면한 채,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의 위신과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제안이다.

도쿄대 초빙교수, 주일대사, 호세이대 객원연구원, 도쿄법대 운영자문위원 등을 역임한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의 관점은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위안부합의에 대한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8월 31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인 '한일관계 차악 넘어··· 강제징용 문제 해결엔 악마의 디테일 필요'에서 그는 "박 대통령이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위안부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합의를 받아들이도록 피해자들에게 호소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이 "제 노력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해주시면 저의 결정을 따라주세요"라고 설득했다면, 이 합의가 힘을 발휘했으리라는 것이다.

위안부 합의는 일본 총리의 사과 표명에다가 제3의 재단을 통한 위로금 혹은 지원금 지급으로 문제를 봉합하는 합의였다. 잘못을 인정하는 배상금 지급이 결여된 합의였다.

게다가 아베 신조 총리의 사과는 공식 성명이 아닌 박 대통령과의 전화통화로 이뤄졌다. 그해 12월 30일 자 <산케이신문>에 "어제 일로 모두 끝이니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라는 아베의 29일자 발언이 공개되면서 그나마 그 사과마저 사실상 없었던 일이 됐다. 이런 위안부합의에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최상용 명예교수의 입장이다.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전두환 대통령 비서관을 거쳐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한일친선협회 이사장, 주일대사 등을 역임한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은 매우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 6월 15일 자 <문화일보> 인터뷰 기사 '가까운 일(日)과 협력 안할 이유 뭔가'에서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끝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한일협정으로 배상받음으로써 국가 간 종결된 사안"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면서도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제안한 방식을 반대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청구권협정은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민사채권 관계를 다루는 협정이었다. 그리고 이 협정을 통해 주고받은 것은 유·무상의 경제협력자금이지 식민지배 배상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흥수 회장은 1965년 협정으로 배상이 다 끝났다고 말하는 동시에 문희상 방식에 호감을 표시하는 모순된 입장을 표출하고 있다.

현인회의에 참여한 네 사람의 의견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시대정서에도 뒤처져 있다. 현인들의 의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퇴행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새로운 지혜를 얻고자 이런 현인회의를 출범시켰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이들의 의견은 지난 6개월간의 대일정책 기조와 일치한다. 이미 잘 알려진 의견이다. 윤 정부가 피해자와 국민들을 설득하고자 이 회의체를 띄웠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들의 의견이 대중에게 거부감을 주리라는 점을 윤석열 대통령과 박진 외교부장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지금 시점에 이 협의체를 발족시킨 것은 그 명칭에서도 느껴지듯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일본에 전달해 한·일 협력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용어를 놔두고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현인회의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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