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2 05:12최종 업데이트 22.09.0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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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원·달러 환율이 하루 만에 연고점을 경신하면서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랐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 종가보다 17.3원 오른 달러당 1354.9원에 거래를 마쳤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 연합뉴스


2020년 12월, 수출 기업이 외국에서 수출대금으로 받은 1달러는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1100원 정도로 환전이 가능했다. 1일 원·달러 환율이 연고점을 경신하면서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랐다. 1달러 1354.9원. 단순 비교해도 1달러를 환전하면 2020년 12월보다 254원 정도의 환율 차익을 얻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환율이 오르면서 약 1조 3000억 원의 이익 증가 효과를 봤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4월과 비교하더라도 환율은 10% 이상 올랐다. 3분기에도 수출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두리라는 예상의 근거다.


수입은 그 반대의 길을 걷는다. 수입 기업들이 1달러 제품을 수입하기 위해 1100원에 환전하던 금액은 1354원으로 늘어난다. 늘어난 금액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물가 폭등에 날씨 등 국내 영향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고환율의 영향이 가장 크다. 세계적으로 곡물가, 유가,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현실에서 고환율은 뛰는 물가를 날게 만든다. '방울토마토 한 팩이 7500원 실화냐?'는 비명, 실화다. 고환율에 자유로울 수 있는 물가는 없다.

1일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354원을 넘어선 것은 2009년 이후 13년 4개월 만이다. 곧 1400원이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2008년 금융위기가 재현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곳곳에서 언급된다. 그럴만하다.

이명박 정권이 수출 대기업을 위해 환율을 끌어 올렸던 2008년. 그해 11월에는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섰다. 중소기업들은 키코 사태로 줄도산했고 자영업자 폐업이 속출했다. 국민들은 빚을 늘려가면서 폭등하는 물가를 감당해야 했다.

장기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뜩이나 약해진 국민경제. 1354원을 넘은 환율에 이명박 정권의 고환율 공포가 소환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환율이 국민들 밥상 뒤엎는 형국

'환율급등, 우려보다 수출 확대 기회로 삼아야' <국민일보>
'환율 급등, 중기 수출확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중소기업뉴스>
'"기쁘다 킹달러 오셨네"…약세장 거스르는 달러투자' <매일경제>


국민들의 비명이나 공포와는 정반대 주장을 하는 언론들이 있다. 환율 급등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자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정부가 수출 규제를 없애고 수출 기업 지원에 나서라는 것이다. 달러 강세에 투자해 수익을 크게 본 사례를 언급하며 환차익 투기를 눈치 빠른 투자로 미화하는 언론도 있다. 지탄받아야 할 태도다.

환율 급등으로 수출 기업에 많은 환차익이 발생한다고 해도, 폭등하는 물가 때문에 전 국민이 직면한 고통에 비할 바 아니다. 정부에 물가 관리를 주문하기보다는 수출 기업을 위해 각종 규제를 풀라는 요구는 후안무치하기까지 한 일이다.

환율은 원화로 외화를 사고파는 가격이다. 원·달러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외환시장에서 달러가 엄청나게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를 사는 건 수입 대금을 준비해야 하는 수입 기업들이다.

또 있다. 환율이 오를 것에 대비해 환차익을 얻으려는 환투기 세력들이다. 환율 시장에서 달러를 사모아 오르기를 기다리는 세력들이 많아진다면 달러 강세를 부추기는 악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투자가 아니라 국민의 고통을 키우며 이익을 얻으려는 투기다.

환차익으로 큰돈을 버는 건 미화할 게 아니라 금융당국, 사정당국에 엄단을 요구해야 하는 일이다. '기쁘다 킹달러 오셨네' 이걸 제목으로 단 기사를 내놓은 언론.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나?

정부의 대응은 답답하고 한가하다. 환율 급등의 원인은 미국이 제공했다. 수년 동안 돈을 풀어온 양적완화 정책이 돈을 거둬들이는 긴축정책으로 선회하자,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에 이명박 정권의 고환율 정책과 같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또 정부가 나서서 환율을 낮추라는 요구는 가능한 일도 아니며 선뜻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1354원 넘는 환율이 국민들의 밥상을 뒤엎는 형국을 정부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정부가 환율 상승 과정에 투기적 요인이 있는지 면밀히 점검해 나가겠다고 구두 개입에 나선 것은 원·달러 환율이 1345원을 돌파한 지난 8월 23일이었다. 26일에도 시장에 쏠림이 발생하거나 투기적 움직임이 확대될 경우 적기에 시장안정 조치를 취하겠다며 기획재정부 1차관이 나섰지만 후속조치는 없었다.

25일 '환율은 높지만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라는 대통령실 입장은 시장 불안을 감안한 조치라지만 환투기 세력들에게 금융이나 사정 당국의 적극적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로 전달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브리핑이었다.

한 번도 맞은 적 없는 위기극복론
 

지난 8월 23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을 만나 "치솟은 환율 때문에 많은 걱정을 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달러 강세, 원화 약세의 통화 상황이 우리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비상경제대책회의를 통해 리스크 관리를 잘해나가겠다"고 했으나 이날 원·달러 환율은 13년 만에 처음 종가 기준으로 1340원을 넘어섰다. ⓒ 연합뉴스


정부의 빠르고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고환율 고물가 고금리의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외환위기, 코로나 팬데믹보다 가볍다 할 수 없다. 물가는 자고 나면 오른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가파른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기, 가스, 수도 등 공공요금 인상도 뒤따를 전망이다.

소외계층, 저소득층은 생계 위기가 현실이다. 추석 물가만 잡겠다는 단기적인 처방만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해결하기 힘들다. 장·차관 등 고위 공무원 보수 10% 반납을 방안으로 내놓고 국민들에게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식상하고 고루한 대책이다.

기업의 성장을 독려하고 수출을 늘려 국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 성장론의 근간이다. 그러나 달러 강세로 전 세계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에서 기업과 수출 주도 성장론은 효용성과 가능성을 따져 봐야 할 문제다.

일부 언론의 주장처럼 환율 급등 시기 물기 안정이나 내수 진작의 정책보다, 기업을 위해 규제를 풀고 수출을 위한 지원 정책을 중심에 둔다면, 2008년 고환율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수출이 아니라 내수, 기업이 아니라 국민의 삶에 정책의 중심을 세워야 할 때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쓰러지는 기업을 위해 금반지를 모았지만 정작 일자리를 잃은 건 국민들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기업이 살아야 한다는 고환율 정책에 물가는 하늘을 찔렀고 국민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코로나 위기에 수출과 플랫폼 대기업은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렸고 은행들은 이자 수입에 돈방석에 앉았지만 자영업자들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는 직장을 잃었다.

기업이 살고 수출이 잘돼야 국민들의 삶도 안전도 보장된다는 위기 극복론은 틀렸다.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위기 때마다 기업은 곳간에 돈을 쌓았지만, 국민들은 점점 가난과 위험에 내몰렸다. 세계적인 부의 불평등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다시 위기다. 환율 1354원, 추석 명절 장보기조차 걱정스럽다. 윤석열 정부는 기업을 위해 환율을 올려놓고 배춧값 폭등에 양배추로 김치 담으라던 어떤 대통령을 닮지 않았으면 한다. 바른 정책과 빠른 대응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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