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5 13:02최종 업데이트 22.09.0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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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이 조금 있을 것 같다. 내가 딱 한 번씩만 겪은, 약간은 극단적인 경험, 내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지만, 어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를 네 가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에게 노파심에서 몇 마디 하자면, 이보다 더한 예도 있었지만 나와 우리 모두의 정신 건강을 위해 삼갔음을 밝히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 도움 안되는 지시대명사

몇 해 전 혼자서 점자 블록을 따라 걷다가 부주의하게도 딴생각을 했다.


"저기, 거기로 가면 안 되는데요."

뒤에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난 내 발밑에 점자 블록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 예. 고마워요."

뒤로 돌아선 내가 하얀 지팡이를 앞세워 점자 블록을 찾으려는데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기… 저기로 가야 하는데..."
"예, 그렇군요. 근데 저기가 어딘가요? 점자 블록을 못 찾겠네요."
"저기, 저기예요."


난 살짝 짜증이 났다. 보이지 않는 내게 '저기'란 지시대명사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일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죄송한데요, 저기라고 하면 제가 잘 몰라서요. 점자 블록이 어디에 있죠?"

하얀 지팡이로 주변을 더듬으면서 내가 물었다.

"그리로 가면 안 되는데… 이리로 와야 하는데요."

이리로란 말 역시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 이리로든 저리로든, 거기로든 그리로든 손가락이나 뭔가가 가리키는 방향을 의미하는 그런 말은 내겐 진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로 가면 부딪치는데요. 저기, 저기로 가셔야 하는데요."

내가 다시 답답함을 호소하려는 순간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그, 답답하긴... 어디까지 가슈?"

어디선가 중년 여자분이 달려와 내 팔짱을 꼈고 난 무사히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 내 지팡이를 붙잡은 아이

서너 살부터 대여섯 살 정도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노는 어린이집 앞을 지날 때였다. 나는 아이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하얀 지팡이를 더듬어 점자 블록을 따라갔다. 내가 어린이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 내 지팡이를 붙잡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서너 살쯤 됐을까,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다오데요."
"뭐... 뭐라고?"


상황을 파악 못한 내가 아이의 손에 이끌려 한두 발짝 움직였을 때 다급한 어떤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해요. 얘가 선생님을 돕고 싶은 마음에..."

그제야 난 상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절로 번져가는 웃음으로 답했다.

"죄송하다니요. 진짜진짜 좋습니다. 아주 예뻐요. 너무 예쁜 꼬마 친구. 고마워."

아마도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배웠을 것이고 나를 보자마자 바로 그걸 실천에 옮긴 것이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니,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절로 입이 귀에 걸린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요청한 대로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기쁨을 느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 김승재

 
[세 번째 이야기] 어디 가리키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몇 해 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조금 난폭한 차에 놀라 방향 감각을 잃은 적이 있었다. 내가 사는 100동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잘못 길을 들어섰는지 좀 엉뚱한 곳으로 갔다. 그래봤자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이니까 난 별걱정 없이 바로 옆을 지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기, 100동이 어디지요? 제가 방향 감각을 잃었네요. 허허허."

하얀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나름대로 부담 없이 답을 할 수 있도록 나는 한껏 미소까지 지었다. 어색하고 마지못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쪽이에요."

또 듣게 된 의미 없는 답, 저쪽. 난 다시 물었다.

"아, 예. 근데 저쪽이 어딘지 제가 알 수가 없네요. 괜찮다면 제 손으로 그쪽을 좀 가리켜 주시겠어요?"
"아…아…예."


천천히 내게 다가온 그 분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소매를 잡아 어느 방향을 살짝 가리키고는 서둘러 손을 놓아 버렸다. 난 지금도 그 젊은 여자분이 내가 더럽거나 너무 혐오스럽거나 불쾌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때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내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마치 무슨 벌레인 양 서둘러 놓아버린 그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쪽, 그쪽으로 가시면 100동이 나와요."

마지못한 목소리가 다시 뒤를 이었지만 난 그냥 형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옆을 지나는 다른 사람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막 정년퇴직 하셨다는 그 분의 최근 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난 편하고도 안전하게 집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 이야기] 끝까지 옆에 있어준 사람들

늘 다니던 도서관이었지만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서 다녀 보기로 한 첫날. 볼일을 마친 나는 하얀 지팡이를 앞세워 복잡한 도서관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제부터는 복지택시를 타기로 한 횡단보도까지 점자 블록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뛰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나는 자주 멈칫거렸고, 자꾸 점자 블록을 벗어났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어디까지 가세요?"

태연한 채 걷고 있었지만 사실 무척 당황하고 있었던 내게는 천사의 음성과 다름없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아, 예. 저기 횡단보도 앞에서 복지택시를 타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가볍게 내 말에 답을 한 그 분은 살짝 내 팔을 잡고서 나를 횡단보도까지 안내해 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길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

내가 감사의 인사를 했지만 그 목소리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제가 택시가 올 때까지 같이 있을게요. 아이들이 너무 많네요."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도서관을 나온 내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그날따라 복지택시가 엉뚱한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막 전화해 보려는데 어제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택시가 안 왔어요?"
"아, 예. 분명 도착했다고는 했는데..."
"이런, 잠시만요."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른 어떤 분에게 내 사정을 설명했고 두 사람이 도서관 주변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눈치였다. 도서관 주차장 입구 근처에 노란 복지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저기 와 있네요. 이리로 오세요."

다시 내 팔을 잡은 그 분이 나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고 우릴 발견한 복지택시가 다가왔다. 택시가 멈추고 내가 등에 멘 가방을 벗으려는데 또 다른 손이 내 가방을 받아 드는 게 느껴졌다.

"아,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두 분은 내가 택시에 타서 문을 닫을 때까지 날 도와줬다. 차를 출발시키고 먼저 사과를 한 기사님이 두 분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모르는 분들이세요. 근데 정말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들이네요."

기사님은 놀라는 눈치였다. 그 두 분이 내 가족이거나 최소한 잘 아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내일 또 만나면 꼭 인사하세요. 마음이 그리 곱다니... 하하하. 천사네, 천사야."

하지만 난 그분들께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난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만났을 수도 있지만 더 이상 두 분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도서관 직원들일 수도 있고, 그곳을 뛰놀던 아이의 어머니들일 수도 있다. 하여튼 그 두 분은 지금 내 기억 속에서 거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간직돼 있고 가끔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모두 날 도우려 했던 분들 이야기다. 그런데 두 이야기는 지금도 날 미소 짓게 만들지만, 두 이야기는 여전히 씁쓸하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아둔한 머리로는 딱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손길, 말 다음에 이어진 그 따뜻한 손길, 그것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학교에서도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말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따뜻한 말에 이어진 따뜻한 손길은 생각보다 대단한 힘을 보여준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요청한 대로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내가 느꼈던 이 기쁨을 느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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