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0 17:39최종 업데이트 22.07.1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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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자발적 참여자들이라는 대학 강의가 알려져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경희대 철학과에 재직하는 최아무개 교수가 전공수업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성매매 여성들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수업을 들은 학생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최 교수의 발언을 이렇게 소개했다.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매춘한 것이다. 성매매 여성들을 우리가 위할 필요는 없다."


최 교수도 자신이 이런 발언을 했음을 시인했다. 그는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자발적 참여가 더 많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화상으로 진행된 수업에서 그는 여타 문제들에 관해서도 왜곡된 역사 인식을 표출했다.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일본 때문이 아니라 금전 문제를 겪던 고종이 나라를 팔아버린 결과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인 것은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다, 일본을 상대로 식민지배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공산당의 논리다 등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경희대 최 교수처럼 식민지 근대화론과 더불어 위안부 자발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은폐하거나 간과하는 것이 있다. 위안부 본인 혹은 가족의 자발적 동의가 있었던 것으로 비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만 주목했을 뿐, 그런 자발적 동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외형상 '자발적 참여'로 비칠 수 있어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일본 정부도 이미 인정했다. 정부 대변인인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1993년 8월 4일 이른바 '고노 담화'에서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라고 발언했다.

그렇게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증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모집에 관여한 친일파 하윤명(河允明)의 사례도 그런 증거 중 하나다. 위안부도 모집하고 위안소도 운영했던 하윤명이 친일재산을 축적한 과정을 보면, 경희대 최 교수가 말한 자발성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인사소개소의 실상 

하윤명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13도제 실시로 충청남도가 생긴 지 3년 뒤인 1899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업으로 삼기 전까지 상당히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산에서 무역상 점원으로 일하다가 대구·전주·포항 등을 유랑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랬다가 3·1운동 6년 뒤인 1925년에는 대전형무소 간수로 변신했다. 이때 26세였던 그는 얼마 뒤 대구로 가서 인사소개소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일부 인사소개소의 실상을 반영하는 기사가 1928년 1월 22일 자 <조선일보>에 보도됐다. 이 신문에 실린 '간판은 소개업, 개문(開門) 하면 유인업'이란 기사는 1925년 10월부터 1926년까지 여성 8명을 매매한 "인사소개업 박소석"의 사례를 제시한다.

대구에서 인사소개소를 운영하는 박소석의 범행을 다룬 이 기사는 "유일술이라는 열아홉 살 먹은 처녀를 기생질 식혀준다 하고 경성으로 다리고 와서 삼십 원을 밧고 창긔로 파라먹은 것을 비롯하야 대정 십오년까지 팔 명의 처녀를 류인하여 파라먹은 것이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주점 직원 자리를 소개해주겠다며 대구 여성을 서울로 데려간 뒤 성매매 업소에 팔아넘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대구에서 인사소개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하윤명은 황해도 사리원에 가서 요리업 사업장을 열었다. 그러다가 35세 때인 1934년부터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정부출연기관인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5년에 펴낸 '조선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동원: 소개업자·접객업자·일본군청부업자 등의 역할'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그는 인신매매업자로 유명해졌다. "1934(년에) 부녀 유괴범으로 이름을 낸 이후 인천에서 송학루라는 창가를 경영"했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그는 여성 납치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가 됐다. 1939년에는 그해 3월 6일 자 <조선일보> 2면 상단에 '히대의 유괴마'로 보도될 정도가 됐다. 이때까지 밝혀진 범행 건수만 해도 100건이 넘었다. 희대의 인신매매범이라는 악명이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인신매매는 그가 단독으로 벌인 게 아니었다. 일본 공권력과 관련됐음을 보여주는 정황들이 너무도 뚜렷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인신매매로 유명해졌는데도 형사 처벌을 받은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경찰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재판을 받아 형을 살았다는 흔적, 즉 재판 및 입감 서류는 발견되지 않음. 이 점으로 보아 분명 하윤명은 일본군이나 조선의 권력기관과 유착되어, 그의 악행으로 신문잡지에서는 다뤄졌으나 정작 처벌은 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됨.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희대의 유괴마로 보도된 뒤에도 인천에서 송학루를 경영하고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경영했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다고 말한다. 일본군과 위안소 업자가 하나의 사슬로 직접 연결될 수도 있었지만, 조선총독부나 조선군사령부가 그 사슬의 중간에 있을 수도 있었다. 또는 위안소 업자의 하부에 소개업자나 인신매매업자가 있을 수도 있었고, 위안소 업자와 소개업자의 밑에 인신매매 업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22.6.8 ⓒ 연합뉴스

 
위안부 자발적 참여의 실상

하윤명의 프로필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위안부 강제동원 사슬에서 여러 역할을 두루 경험했다는 점이다. 인신매매 업자였던 적도 있고, 소개업체 직원인 적도 있고, 위안소 업자였던 적도 있었다. 위 보고서는 "하윤명이라는 자는 인신매매, 인사소개업, 창가, 군위안소 경영 등 군위안부제와 관련된 상당한 영역에 걸친 영업을 한 자"라고 평가한다.

그는 여성 납치를 통해 1939년 상반기까지 최소 1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밝혀진 금액이 이 정도이므로 실제는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직전에 서울의 중급 한옥은 1000원 미만으로 거래됐다. 밝혀진 범행만 놓고 봐도, 하윤명은 그런 집을 100채 이상 살 수 있는 돈을 모았다. 여성들을 납치할 때마다 친일 재산인 그의 집이 늘어났던 것이다.

하윤명이 여성들을 납치하고 친일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주장한 위안부 자발적 참여의 실상이 훤히 드러난다. 본인이나 가족이 동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동의는 아니었다는 점이 쉽게 증명된다.

1938년 9월 3일 자 <동아일보> 3면 중간에 특이한 사연이 보도됐다. 그해 8월 28일 밤중에 대구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방덕우의 일가족이 갑자기 극장을 나와 대구역전파출소로 달려간 사연이 그것이다.

하루 전인 27일, 방덕우의 딸인 방복향(23세)이 본인과 가족의 동의 하에 북중국으로 취업을 떠났다. 방복향이 떠난 다음날, 이 가족은 연극을 관람하던 도중에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파출소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날 공연된 연극은 인신매매 업자가 부모의 승낙을 받고 여성의 신병을 확보한 뒤 여성을 마적 소굴에 넘기는 이야기였다. 연극을 보다가 딸 생각이 난 방덕우가 부랴부랴 파출소로 달려가게 됐던 것이다. 대구 경찰은 신속히 수사에 착수했고, 방복향은 다음날 귀가했다.

방덕우 가족의 동의를 받고 방복향을 데리고 간 인물이 바로 하윤명이다. 만약 하윤명이 방복향을 위안부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방덕유 가족이 알았다면, 이 가족이 다음날 태연하게 연극 공연을 관람하다가 화들짝 놀라는 일은 생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방덕우가 연극을 보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면, 방복향이 술집 같은 데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은 했을 수 있어도 마적 소굴 같은 데로 가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윤명이 진짜 목적을 숨기고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외형상으로는 자발적 동의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본인과 가족의 자발적 동의는 '북중국에 취업하는 것' 혹은 '북중국의 주점에 취업하는 것'이었을 수는 있어도 '군대 위안부가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하윤명이 전남 광주에 사는 양판례라는 여성을 서울까지 유괴한 사건은 자발적 동의의 실상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1939년 3월 6일 자 <조선일보> 2면 상단에 따르면, 남편과 사별한 뒤 두 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던 양판례는 하윤명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1938년 12월 21일 아들을 데리고 '자발적'으로 서울에 가게 됐다.

서울에 도착한 하윤명은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양판례로부터 아들을 떼어놓는 일이었다. "하윤명은 양판례에게 아들이 딸려 잇서 팔아먹기가 곤난한 것을 생각하고 양의 아들을 어디론지 따돌리고 말엇다"라고 기사는 말한다. 아들이 없어진 뒤에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양판례는 실신 상태로 아들 이름을 부르며 낯선 서울 시내를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양판례는 하윤명의 제안에 동의를 표시하고 자발적으로 거주지를 떠났다. 그가 자발적으로 동의한 부분은 자신이 서울에서 취직하는 부분이었다. 위안소 같은 데로 가고자 자발적으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위안부가 될 줄 알았다면 아들을 데리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들 이름을 부르며 서울 시내를 헤매는 양판례의 모습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런 식의 자발적 참여를 발판으로 하윤명은 고소득을 올리고 친일재산들을 축적했다. 그의 재산 축적은 위안부 자발적 참여의 실상을 잘 반영한다.

경찰이 하윤명을 체포한 것은 그가 인신매매범으로만 비쳤을 뿐, 위안부 모집책으로는 비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일본군과 연계된 인물임이 겉으로 드러났다면, 경찰이 그를 요란스럽게 체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란스럽게 체포되고 전국적으로 알려진 그가 처벌을 받기는커녕 인천과 싱가포르에서 영업을 계속 이어간 사실은 그가 누구의 비호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하윤명 같은 모집책들은 대외적인 악역을 담당했다. 이들은 기망과 유괴 등의 방법으로 여성을 모집하면서 형식상의 동의를 받아냈다. 위안부 동원 사슬에서 하윤명 다음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하윤명이 확보해놓은 형식적인 동의를 발판으로 위안부 강제동원에 가담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당사자들의 동의 하에 위안부 동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여지도 있었다.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간과하거나 무시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위안부나 가족의 형식적 동의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데 대한 동의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상부의 일본군으로부터 하부의 모집책에 이르는 위안부 동원 사슬에서 하윤명 같은 인물이 수행한 악역을 고려하지 않고 위안부의 자발적 참여를 섣불리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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