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8 13:37최종 업데이트 22.04.2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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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가 20일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2.4.20 ⓒ 연합뉴스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인 이상민 전 판사가 친일재산 반환 소송을 변호한 사실이 논란이 되고 있다. 만 22세 때인 1986년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서울고등법원 판사와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장 등을 거쳐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퇴임한 그가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일 때인 2012년에 있었던 일이 주목을 끌고 있다.

그해에 그는 국가에 귀속된 친일파 재산을 돌려달라며 후손들이 제기한 소송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그는 다섯 변호인 중 한 명이었다. 이로 인한 논란에 대해 그는 '변호인단에 이름만 올렸을 뿐 적극 활동하지는 않았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고위급 친일파

이상민 후보자가 참여한 소송의 주인공인 방태영은 거물급 친일파였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에 발행된 1949년 8월 7일 자 <경향신문> 2면 중앙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전년도 9월 22일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사권(조사권)을 가진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 법 제26조에 따라 기소권을 가진 특별검찰부에 방태영 사건을 넘긴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면서 "특위에서는 6일 다음과 같은 반민 피의자를 유죄로 인정하고 일건 서류와 함께 특검부에 송치하였다 한다"라고 한 뒤 "방태영(중추원 참의)"을 거명했다.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수록된 방태영. ⓒ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조사, 4년의 발자취>는 방태영과 관련해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를 한 자에 해당한다"는 위원회의 판단을 소개한다. 방태영이 친일파로 규정된 핵심 이유는 중추원 관직 역임에 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 자문기구로 국회와 비슷한 위상을 보유했다. 명예직에 가깝긴 했지만, 중추원 참의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친일을 많이 했으며 일제 지배하의 위상도 높았음을 반영한다. 지역 유지의 감투가 실권과는 관련이 없을지라도 지역 내 위상을 반영하는 것과 같다.

중추원의 정원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직하는 의장직을 포함해 70명이 안 됐다. 방태영이 일제 치하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적'으로 매정한

그는 저명한 동시에 실세를 가진 친일파였다. 이 점을 입증하는 지표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근무 이력이다. 만 28세 때인 1913년에 기자로 들어간 그는 1918년에 과장이 되고 1919년에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됐다. 1920년에는 편집국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총독부 기관지의 발행인이었으니 핵심적인 일제 부역자였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9년에 그런 위치에 도달했다. 온 나라가 "대한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로 뜨겁던 시절에 <매일신보> 발행인이 됐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1919년 8월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으며"라고 설명한다. 거국적인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동족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나 투옥 혹은 망명한 직후에 그가 그 자리에 취임했던 것이다. 민족을 떠나 '인간적'으로 매정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줄 만한 이력이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에 태어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납북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거물급인 동시에 '발자취가 꽤 빽빽한 친일파'라는 느낌도 갖게 된다.

그는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기간인 65년간의 거의 대부분을 봉급 생활자로 살았다. 그 기간 동안에 거의 항상 어디선가 봉급을 받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다종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봉급을 받았다는 점이다. 대한제국 때인 1902년에 17세 나이로 철도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에는 탁지부 인쇄국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1904년에는 경무청 순검으로 변신했다. 이듬해에는 일본어 통역관이 됐다가 경성기업합자회사 통역으로 들어갔다.

1906년에 경찰로 복직했다가 1910년에 부정행위가 발각돼 퇴직한 그는 1913년에 <매일신보>에 입사했고 뒤이어 친일파들의 모임인 대정친목회 간사 활동을 겸했다. 1921년에 퇴사한 뒤에는 동아흥신·조선서적인쇄에서 임원 생활을 했고 경성부 학교평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총독부 기관지에 근무했던 그는 총독부 지원을 받는 방송국에서도 일했다. 경성방송국에서 이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또 조선방송협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뿐 아니라 광업 분야에도 발을 디뎠다. 1931년에는 의주광산 취체역(이사)이 됐다.

1936년에 중추원 참의가 되어 1939년까지 연봉을 수령한 그는 그 뒤로도 기업체 임원 경력을 쌓아갔다. 동양지광사 이사, 조선축산 감사역, 조선서적인쇄 취체역, 조선공영 취체역, 조선영화제작 취체역도 역임했다.

말 그대로 몸 바쳐 친일

돈 버는 일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응원하고 식민지 한국인들을 그리로 내모는 데도 가담했다.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지원병 권유대 대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도 뛰어다녔다.

당시 그가 억압받는 동족들을 향해 던진 한마디가 있다. 1942년 2월호 <조광>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 사람은 과거 일청·일로 전쟁 때에 가졌던 구경꾼 태도를 버리고 황국신민의 일원, 다시 말하면 나도 성전(聖戰) 전투원의 한 사람이라는 철석 같은 결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때처럼 남의 나라 대하듯이 일본을 대하지 말고, 이 나라의 일원이며 이 전쟁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는 "구경꾼 태도를 버리고" 황국신민의 일원으로 살자고 촉구했다. 그런 그의 친일행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백범 김구가 서거한 날에 발행된 1949년 6월 2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방태영을 불구속 취조'는 "방(方)은 과거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으며 일방(一方) 조선서적주식회사 사장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지정 교과서를 혼자 도마터 판매하던 친일자"라고 언급했다. 친일행위에 힘입어 일제강점기판 국정교과서 판매를 도맡았으니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가 친일파 방태영의 재산 국가 귀속에 저항한 후손들을 변호했다는 <뉴스타파> 보도 화면 ⓒ 뉴스타파

 
이 외에도 기업체 이사 경력이 많기 때문에 재산을 축적하기가 쉬웠고, 금전 기부를 통한 친일에서도 어느 정도 두각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 놓고 보면 금전 기부를 통한 친일에서는 특기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비행기 헌납을 위한 애국경기호 헌납기성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일한 경력 등을 제외하면 괄목할 만한 발자취를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몸과 정(情)으로 하는 친일'에서는 상당한 열성을 보였다. 위에 열거한 친일행위들에 더해, 육체 노동이나 '정성'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두드러진 행적을 남겼다.

위 사전에 따르면, 56세 때인 1941년 1월에는 백제와 일본의 인연을 부각하기 위한 부여신궁 건축 현장에 가서 '근로봉사'를 했다. 그런 뒤 '인증샷'을 남겼다. 그해 3월호 <삼천리>에 쓴 글에서 "성지 부여, 그는 우리 애국심의 도화선이 될 것이니 비록 한줌 흙의 봉사일지라도 영겁 미래의 황국 일본을 빛나게 하리로다"라고 썼다.

2년 뒤인 1943년 11월에는 만주건국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이 학병으로 지원했다. 그는 이때 쓴 글에서 "애국지정(愛國之情)의 헌납"이라는 표현을 썼다. 학병 지원은 물질이 아닌 정(情)을 헌납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을 다해 애국하고 있음을 표시했다. 위 글의 또 다른 대목에서 "우리들은 매일 밤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낭독해왔다"라고 썼다. 밤마다 일본의 승리를 위해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총독부가 암기를 강요한 성인용 황국신민서사는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한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믿고 아끼고 협력하며 단결을 공고히 한다 (3) 우리 황국신민은 괴로움을 참고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하는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한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행안부 장관 될 사람이...

방태영은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친일파였다. 반민특위에 입건돼 수사팀으로부터 유죄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그 역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된 뒤로는 소식을 확인할 수 없다. 그의 후손들은 친일재산 환수 조치에 반발해 소송을 걸었다. 그 소송이 대법원까지 갔고, 이상민 행안부 장관 내정자가 변호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상민 후보자는 친일재산 환수 소송을 변호하게 된 경위를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국민들은 친일문제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은 인물이 국민들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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