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8 06:00최종 업데이트 22.03.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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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 기차역에서 열차에 탄 한 소녀가 플랫폼에 머물고 있는 남성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라는 몸짓을 취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이렇게 깊고 날카로운 함의를 가지고 있었던가. 지난해 하반기 푸틴의 전쟁 도발 가능성이 제기된 이래 서구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답 "군사적 개입 대신 경제 제재"를 두고 드는 생각이다.

무디고 약한 고육책으로 보였다. 전쟁 개시까지 서구는 자기모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은 1990년대 우크라이나를 비핵화 시킬 때 안보를 보장했다. 약속을 이행할 방법은 우크라이나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지만, 푸틴은 미국이 1990년대 독일 통일 당시 NATO를 동유럽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위반했음을 지적했다. 명분에서 밀릴 수 있는 군사 개입대신 안보 보장을 위해 노력했다는 표식이 경제 제재라 생각했다.  


평면적 이해였다. 절충적·방어적 움직임이란 해석은 딱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다. 침공과 함께 '군대 투입 대신 경제 제재'는 능동적 함의로 전환, 유럽 사회는 경제 제재 참여라는 하한선과 군대 투입이라는 상한선 내에서 자율적으로 대응할 여건을 확보했다.

유럽은 이 원칙에 따라 각자의 대내외적 제약을 뛰어넘고 있다. 독일은 2차 대전이라는 역사적 제약을 뚫고 일체의 반대 없이 재무장을 결정했다. 경제 공동체를 넘어 안보 공동체가 되고 싶은 EU도 단숨에 안보 분야에서 행동을 취하는 주체가 되었다. 영국은 브렉시트로 위축된 유럽 내 역할을 되찾고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고 수혜자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다. 바이든식 국제주의, "미국이 돌아왔다"를 지켜냈다. NATO에 대한 유럽의 축적된 회의감을 털어내고 다시 NATO 중심으로 집결시켰다. 유럽 경제력을 안보 영역으로 끌어내는데 성공, 중국을 견제할 힘도 비축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서구는 전쟁의 파괴력이 만든 힘의 공백을 최대치로 활용하며 국제 사회 자리 재배치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소멸되는 것은 세계화다. 이념보다는 실용, 대립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추구했던 시대정신은 수명이 다한 듯하다. 우크라이나는 전환기의 희생물이다.  

[영국] 보리스 존슨 "세계적 영국"과 "런던그라드"
 

폴란드를 방문한 보리스 존슨(중앙) 영국 총리가 10일(현지시간) 수도 바르샤바 인근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임무 수행을 위해 주둔 중인 자국 군부대를 방문하고 있다. 존슨 총리 옆은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 존슨 총리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이날 나토와 폴란드를 방문했다. 2022.2.11 ⓒ 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전쟁 개시 이후 광폭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보리스 존슨에게 이번 전쟁은 "세계적 영국"을 실현하는 동시에 파티 게이트라는 본인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기회다. 존슨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야만적" 시도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 푸틴을 "반드시 좌절시키기 위해" 러시아 SWIFT 시스템 배제 조치를 침공 직후부터 외쳤다.  

영국의 망설임 없는 경제 제재 주장은 영국이 러시아 가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2021년 현재 영국의 러시아 가스 수입은 전체 가스 소비의 4% 정도로, 러시아와 영국을 직접 잇는 파이프는 없다. 가스 소비량의 50%는 국내 생산이고 수입의 대부분은 노르웨이다.

영국이 이번 경제 제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국내 문제는 영국의 오명인 "런던그라드 (Londongrad)," 즉 영국 내 러시아 신흥재벌(oligarchs)의 자금이다. 2018년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 "모스크바의 금"에 따르면 소비에트 몰락 이후 약 1천억 달러의 러시아 돈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외교위원회는 전부 "더러운" 돈은 아니지만 자금 세탁 및 은닉이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영국 정계로도 유입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영국의 장기적 안보를 위해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발휘하여 이 자금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런던그라드와 관련, 러시아 억만장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h)를 구단주로 둔 첼시 축구 구단은 현재 논쟁거리다. 전 러시아 정보국 요원 세르게이 스크리팔(Sergei Skripal) 암살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던 2018년 제재 대상에 오른 그는 당시 영국 정부가 그의 비자 갱신을 연기하자 이스라엘 시민권을 획득, 영국 입국 시 이스라엘 여권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러시아의 "부정부패"와 연결되어 있다고 파악한 2019년 정부 자료에 근거, 노동당은 그의 첼시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올라프 숄츠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만났다. 2022.2.15 ⓒ 연합뉴스

 
"헬멧 5천개 지원"
"보이지 않는 독일"
"러시아 SWIFT 배제에 대한 유보"

전쟁 개시 후까지도 계속된 독일의 소극성 혹은 고민을 보여준다. 여기엔 두 가지 내부 사정이 있다. 2차 대전으로 인해 교전 지역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일차적이다. 다음은 거의 50%에 달하는 러시아 가스 의존율이다.  

고민 끝에 올라프 숄츠 총리는 위의 독일 사회의 두 조건을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다. 구시대와의 차별점은 우선 국방력 강화다.  2월 26일,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와 지대공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2월 27일엔 독일 의회에서 "(우크라이나)는 자유, 민주주의,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며 앞으로 GDP의 2% 이상을 국방비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다음은 에너지 독립을 위한 노력이다. 개전 직후 선언한 노드 스트림 2 파이프 가동 유예로 에너지 부족은 명약관화하지만 이번 전쟁은 러시아 가스로부터 독립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원전으로의 회귀 대신 독일은 2월 28일 액화 천연가스 터미널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열펌프로의 교체를 서두르는 계획도 마련하고 있다. 국내 비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반-러시아 대의를 활용,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에 속도를 붙여 미래 에너지 분야와 기후 문제 해결에 선도적 위치를 점하겠다는 의도다.

[EU] "분수령이 되는 순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을 게임 체인저로 삼은 또 다른 존재는 EU다. EU의 경제력은 "군사 개입대신 경제 제재" 원칙에 따라 막강한 무기가 되었다. 군사권이 없는 경제 공동체지만 안보 영역의 주체로 자연스레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EU 집행 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이 이를 놓칠 리 없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EU가 자체 안보력을 갖길 원하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9월 EU를 안보 영역으로 확장할 시점이 도래했다고 운을 띄웠다. 미국-영국-호주간 안보 동맹 (AUKUS) 체결 과정에서 배제되기도 한데다 평소 NATO 회의론을 공공연히 표방했던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 뚜렷한 진척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환점이었다. 집행 위원장의 언어는 자연스레 안보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는 "푸틴이 돈바스나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 전체 안보와 모든 국제 질서를 깨뜨렸다"며 전쟁의 책임이 러시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27일 "유럽에서 (민주주의를) 짓밟는 시도를 용인하지 않겠다"고 밝힘으로써 바이든이 제시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를 사실상 받아들였음을 나타냈다.  

같은 날, EU는 EU 결성 이래 처음으로 무기를 구입, 우크라이나로 운반하겠다고 발표했다. 뒤이어 모든 러시아 항공기를 EU 영공에 들어올 수 없게 하고 러시아 측 언론의 EU 내 방송도 금지했다. 이로써 EU는 경제 공동체에서 안보 공동체로 확대될 가능성을 높였다. 
  
[미국] 주도권 잡은 바이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의 국회 의사당에서 열린 국정연설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2.3.1 ⓒ 연합뉴스

 
개전 일주일째인 3월 1일 바이든은 워싱턴 의회에서 "나는 유럽 동맹국 통합에 셀 수 없는 시간을 할애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위기가 제기된 지난해 말부터 2월 말까지 진행된 외교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위 말은 서구가 견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서구의 균열은 작년 여러 번 감지되었다. 지난 G7 당시, 영국과 EU는 '소시지 전쟁'으로 불리는 무역 분쟁 중이었고 민주주의 진영의 결속을 원하는 바이든 구상에 영국을 제외한 회원국과 EU는 경제적 파장을 우려해 거리를 두었다. 이후 미국은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는 EU와, 9월 AUKUS 출범 때는 프랑스와 마찰을 빚었다.

다음으로 위 말은 서구 재결집이 이번 외교전의 핵심이었음을 시사한다. 바이든의 운신 폭은 좁았다. 우크라이나 비핵화 당시 안보를 보장했으나 NATO를 동유럽 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뒤집은 과거 때문이다. 사실상 유일한 카드가 경제 제재였다. 전쟁 여부 결정시 경제 제재 강도를 계산해야 하는 푸틴 입장에서 서구의 결집 강도는 제재 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잣대다. 반면, 경제 제재의 극대화된 효과를 내야 하는 바이든으로서는 꼭 풀어야 할 숙제였다.  

마지막으로 위 말은 동맹 통합 과정이 용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제 제재는 결국 쌍방 피해다. 때문에 경제 제재로 입을 경제적 피해를 감수하라는 요청이요, 크게 보면 한 세대 이상을 떠받쳐온 신자유주의의 실용주의 노선을 뒤집는 데 동의하라는 뜻이다.

바이든이 내놓은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NATO 조약 5조에 따른 공동 방위는 그 중 하나다. 유럽의 군사력과 푸틴의 지속적 팽창 시도를 고려했을 때 서구에 NATO와 미국의 군사력은 당분간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 개시 후 유럽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나토 영역의 1인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의 근거는 여기서 나온다. 바이든 역시 3월 1일 "푸틴이 서쪽으로 진출할 경우, NATO 방어를 위해 (우리 군대가) 유럽으로 갈" 것임을 재확인했다.

체스 게임으로 비교되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현재 바이든은 전쟁의 속성인 결집력, 파괴력, 개혁성, 생성력을 완벽히 숙지하며 판을 주도하고 있다.

푸틴과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외교적 해결을 견지함으로써 압도적인 국제 사회 지지를 획득했다. 자체 안보 능력이 떨어지는 유럽을 NATO로 집결하게 만들었다. 독일과 EU를 안보 영역에 끌어들임으로써 트럼프식 "미국 먼저"가 아니더라도 NATO 내 미국의 재정적 부담을 줄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단합된 유럽이 최대치로 끌어올린 대러시아 경제 제재 덕분에 미국은 태평양쪽 중국과 상대할 여유를 얻었다.

바이든의 최종 목표는 의회 내 발언 "역사가 쓰일 때, 러시아의 쇠락을 설명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것"에 나타난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우크라이나 내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장기전으로 갈 경우 서구의 결집이 현재의 강도로 지속될지 확실치 않다. 아직까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중국 반응도 변수다. 11월 중간 선거라는 내부적 불안 요소도 크다.

국제 질서 재편의 다음 격전지가 될 아시아에 속한 한국은 유럽을 세심히 볼 필요가 있다. 독일은 독일과 같은 역사적 제약을 가진 일본의 움직임을 읽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국제적 대의에 집결하면서도 이를 활용, 미해결 국내 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유럽 사회의 역동적 모습에서 영감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재편될 질서 내 위치 선정에 대한 전략도 마련해야 한다.

전환기엔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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