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01 12:43최종 업데이트 21.10.01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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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들어 유럽에서 커피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커피가 이권 다툼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나라가 오스트리아였다. 커피를 생산할 수 있는 식민지가 없었던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품인 커피의 판매를 위해서는 황제의 면허가 필요하였다. 왕정 시대나 독재 시대에 세수 확보를 위해 도입하였던 전매제와 유사한 제도였다. 국가가 인정한 면허를 가진 사람이나 단체만이 해당 물품을 취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비를 제한하거나 국가의 세금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국가 권력과 면허권을 가진 자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거래가 늘고 수입이 확대될수록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유럽의 커피 역사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이런 모습이 오스트리아의 초기 커피 역사에서도 역시 나타났다.


유럽의 각 지역에는 중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길드 형태의 동업 조합이 번성하였고, 이런 동업 조합은 커피라는 새로운 물품의 거래에서도 독점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전력투구하였다. 가장 먼저 포도주 제조업 조합이 커피 사업에서 자신들의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커피도 음료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판매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커피와 포도주 제조업자 사이의 싸움

당시 빈에서 커피를 판매할 수 있는 황제 면허를 소지하고 있던 사업자 네 명이 이에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의 싸움에서 황제 레오폴트 1세(재위기간 1658~1705년)가 손을 들어준 것은 커피 제조업자들이었다.

레오폴트 1세의 후임자인 카를 6세(재위기간 1711~1740년)는 면허권자를 네 명에서 열한 명으로 늘려 주었지만 증가하는 커피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740년 후세를 남기지 못하고 카를 6세가 죽자 그의 맏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재위기간 1740~1780년)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여황제의 등장에 대해 프로이센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저항하였지만 그녀는 강인한 성격과 뛰어난 외교술로 이를 극복하였다. 정략적 결혼의 상징이기도 한 부르봉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타협에 의해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커피 제조업자와 포도주 제조업자 사이의 싸움을 중재하여 커피 제조업자들은 주류를, 그리고 주류 제조업자들은 커피를 판매할 수 있도록 상호 양보를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로부터 오스트리아에는, 특히 빈에는 많은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나고 커피 소비는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도 영국의 초기 커피하우스처럼 남성들이 모여들어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고, 카드놀이나 체스, 당구 등 오락을 즐기는 장소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여성들이 커피하우스를 마음대로 출입하게 된 것은 다음 세기인 19세기 들어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79년에 주류에 높은 소비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시민들의 일상과 관련된 세금들을 과감하게 철폐하는 대신에 이로 인한 세금 수입 부족을 메우기 위해 취한 친서민적 조치였다. 이를 둘러싼 논쟁이 적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커피 소비가 확대된 것은 분명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서민들을 위해 주류에 세금을 부과하여 커피 소비를 확대시킨 반면, 그의 경쟁자였던 이웃 나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맥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커피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두 번이나 전쟁을 벌여야 했던 두 사람은 커피의 역사에서도 대립적인 흔적을 남겼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서 카페 문화가 가장 발전했던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빈이었다. 빈은 커피하우스를 둘러싸고 지어진 도시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여기저기 커피숍이 등장하였고, 커피숍에서는 아침식사로 커피와 함께 반달 모양의 비스킷, 크루아상이 제공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한 야외 카페의 빈 테이블 ⓒ twenty20photos


빈에 사는 사람들이나 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커피숍에서 조간신문을 보면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빈 사람들은 커피숍을 하루에 무려 세 번씩 드나들었다고 한다.

빈의 커피숍에서는 모차르트를 비롯하여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등 커피를 좋아하였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많은 음악가들과 문인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1788년 개업 당시 모차르트가 기념 연주를 하였고 이후 베토벤도 피아노를 연주하며 커피를 마셨다는 프라우엔후버(Café Frauenhuber), 빈 시민들이 사랑했던 시인 피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가 자신의 편지 발신인 주소를 이 카페로 해서 유명해진 센트랄(Café Central),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 란트만(Café Landtmann)이 대표적이다.

예술도시 빈과 히틀러

카페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는 19세기 후반인 1889년 4월 20일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난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오스트리아 북부에 있는 국경과 접한 마을인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초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탓에 학교와 공부를 기피하면서 아버지와 갈등했다.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아버지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히틀러는 늘 갈등을 빚었다. 수천 년 반복되는 교육에서의 부모와 자식의 갈등에서 히틀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히틀러의 희망을 존중했다면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고, 히틀러라는 이름은 훗날 정치사가 아니라 미술사 책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으니 참 아쉬운 일이다.

히틀러는 11살 무렵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린츠로 이사하여 기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역시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1903년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이주하였다.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으로 이주했지만 이주하던 해 말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이후 뮌헨으로 떠난 1913년 5월까지 5년 이상의 청소년 시절을 빈에서 살았다.

어린 히틀러는 생계형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서 홈리스 생활을 하기도 하고 노동을 하기도 하며 그림을 그리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히틀러가 당시 빈에서 화가를 꿈꾸며 드나들었던 곳이 바로 도처에 세워진 카페였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린 그림엽서를 팔아 하루 하루 삶을 이어가고, 자신의 꿈인 화가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빈 국립미술아카데미 입시에서 두 번이나 실패하고 만다. 그의 입학을 거절한 이 아카데미의 학장은 유대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 위키피디아 공동자료 저장소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 전쟁 중에 두 번(1916년과 1918년) 부상을 입었고 여러 개의 메달을 받았다. 이후 그는 빈을 떠나 뮌헨으로 이주한 후 반유대주의 정당인 독일노동당(나치당)에 가입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함으로써 인류 역사에 큰 아픔을 남겼다. 그가 그림으로 성공했거나, 빈의 커피숍 문화에 빠졌다면 인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에는 빈 커피하우스 문화(Wiener Kaffeehauskultur)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빈은 프랑스의 파리와 함께 19세기 유럽 커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시,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탄생시킨 미술의 중심지였지만 가난하고 어린 히틀러와 같은 생계형 예술가 지망생을 품을 정도로 따듯하지는 않았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2021.
Heinrich Eduard Jacob, 남덕현 옮김, 《커피의 역사》, 자연과생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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