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9 19:51최종 업데이트 21.09.20 15:16
  • 본문듣기
18세기의 첫해인 1701년에 베를린을 수도로 프로이센 왕국이 건국되었다. 1750년 즈음 프로이센 커피 문화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치히에 커피하우스가 8개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다른 유럽 지역과 비교해 프로이센에 카페 문화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18세기 독일의 커피 역사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몇 명 있다. 〈커피 칸타타〉를 작곡해 당시 커피 문화를 음악에 담아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1740년부터 1786년까지 재위하였던 프리드리히 대왕 그리고 커피와 함께 일상을 보냈던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커피 칸타타

전통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잃은 바흐는 평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세 정도부터는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 할레, 드레스덴, 쾨텐, 함부르크 등 여러 도시에서 주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지속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며 음악 활동을 했던 도시는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이며,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치히였다. 당시 프로이센 지역에서 카페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생긴 커피 중심지의 하나였다. 라이프치히에는 아들이 다닐 유명한 대학이 있었고, 시에서 그에게 음악 교사 자리인 칸토르(cantor)를 제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칸토르 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시의회의 지나친 요구와 간섭으로 그의 음악 활동이 만만하거나 즐겁지는 않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작곡에 몰두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 외의 잡무가 많았지만 일에 비해 보수는 형편없었다.

교회 음악에서 멀어진 바흐는 1729년부터 1742년까지 대학생 연주 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을 맡아 과외 활동에 몰두했는데, 이 시기에 만든 대표적인 곡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커피 칸타타〉(BWV211)다.

콜레기움 무지쿰의 정기 연주회가 열리던 곳이 바로 짐머만 카페였고, 이 카페를 위해 만든 음악이 바로 〈커피 칸타타〉였다는 면에서 보면 〈커피 칸타타〉는 최초의 카페 광고 음악이다.

칸타타라는 음악 장르는 성악과 기악 합주가 결합된 짧은 성악곡 형식을 말한다. '악기로 연주한다'는 의미의 소나타와 대비되는 장르로서 '노래한다cantare'는 말에서 유래한 장르다. 교회에서 공연되는 교회 칸타타와 교회 밖의 일상적 모임에서 연주되는 세속 칸타타가 있는데 <커피 칸타타>는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루에 커피를 30잔 이상 마실 정도의 커피 애호가였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았던 음악가 바흐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 바로 <커피 칸타타>다. 커피를 좋아하는 딸 리스헨(Lieshen)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녀의 아버지 슐렌드리안(Schlendrian)의 다툼을 풍자와 해학으로 채운 음악이다.

커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딸 때문에 "애를 낳아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그저 속상한 일들만 가득 생긴다니까"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아빠, "커피가 천 번의 키스보다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포도주보다 부드럽다니까"라고 응수하는 딸 사이의 줄다리기.
 

커피를 좋아하는 딸 리스헨(Lieshen)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녀의 아버지 슐렌드리안(Schlendrian)의 다툼을 풍자와 해학으로 채운 J.S. 바흐의 <커피 칸타타> ⓒ https://youtu.be/VQzT09BgeWY


결국 아빠에게는 커피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결혼 승낙을 얻어내지만, 남편과의 결혼 서약서에는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나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해준다는 내용을 넣어 버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아빠의 마음과 커피를 함께 쟁취하는 여성의 이야기에서 당시 커피 유행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커피 칸타타〉에서 아빠가 딸의 커피 탐닉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의사들이나 과학자들이 커피가 여성의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제기했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은 커피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한 아랍의 이슬람 세계에서 시작해 커피가 퍼져나간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나타났다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일시적으로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증거나 실생활에서의 경험으로 연결되지 않았기에 사라지고 마는 주장이었다.

둘째, 지나치게 비싼 커피 가격이었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과 달리 통일 국가 성립이 늦었던 독일은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이지 못했고, 커피를 생산하는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커피 유행 초기에 독일만큼 커피 가격이 높았던 지역은 없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바흐에게 딱 맞는 이유였다.

커피 스니퍼

18세기 프로이센과 커피를 이해하는 데 1740년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대왕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의 계몽철학자이며 커피 애호가였던 볼테르와 절친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위 이전인 1739년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반론인 <반마키아벨리 Antimachiavelli>를 써서 "국민의 행복이 군주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즉위한 이후의 행보를 보면 그의 최대 관심사는 프로이센 중심의 넓고 강한 국가의 건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강한 국가였지 행복한 국민은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신 것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가 재정 파탄을 모면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취했다. 그중에는 커피 관련 정책들도 포함된다.

수입품이었던 커피나 담배의 판매를 특허권자들에게 독점하도록 하는 정책이 대표적이다. 지나친 커피 소비를 비난하고 맥주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 커피 1파운드 당 은화 8센트의 세금을 부과하는 칙령을 내렸고, 국가의 커피 판매 특허를 관리하는 자리에 프랑스인들을 대거 기용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왕이 세운 커피콩 로스팅 공장에서 합법적으로 로스팅된 것 이외의 커피는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도 취했다. 불법적으로 거래되는 커피가 가정에서 로스팅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퇴역 군인들에게 커피 냄새를 탐문해 색출하는 일을 맡겼다. 커피 스니퍼라는 직업이 생긴 것이다.
 

Roasted Coffee bean ⓒ envatoelements


시민들은 국가가 독점하는 커피를 소비하기보다는 거래가 자유로운 커피 대용품을 찾기 시작했다. 말린 무화과, 보리, 밀, 옥수수 등이 등장했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커피 대용품은 치커리였다. 훗날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시절 프랑스에서도 유행했던 것이 바로 치커리 커피였다. 커피 역사에 대용 커피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문제는 국가가 커피 사업 독점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불법 커피 유통을 막는 데 쓴 지출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대왕 칭호를 받은 절대군주였지만 이미 생활 음료로 자리를 잡게 된 커피의 소비를 막을 방법도, 커피를 통해 국가 재정을 풍족하게 할 유효한 방법도 찾지 못했다.

1786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망과 함께 커피에 부과하였던 높은 세금은 낮춰졌고, 로스팅한 커피만 유통을 허용하는 법령도 철폐되었다. 이후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커피는 모든 시민들이 즐기는 음료로 발전했다. 공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맥주나 음식을 대신할 수 있는 커피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부인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며 커피를 마시는 카페클라츠(kaffee klatsch) 문화가 생겨나 독일 지역은 점차 커피 대량 소비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같은 세기 후반에 커피에 깊이 빠졌던 음악가로 베토벤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본과 오스트리아의 빈을 왕복하며 지냈던 베토벤은 정확히 60개의 커피콩을 갈아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고 한다. 로스팅한 커피 60개의 무게는 7g 정도 된다. 요즘의 커피 과학자들이나 바리스타들이 추천하는 커피 1잔 추출에 필요한 원두의 양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크게 차이는 없다.

제과점

18세기 이후 커피 무역을 독점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로 인한 커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독일 사람들은 구입하기 쉬운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치커리 커피를 마실지언정 차에 빠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패배와 함께 대륙 봉쇄령이 해제되고 차의 나라 영국의 물품과 문화가 대륙으로 다시 흘러들어 왔지만 차 문화가 그것에 비례해 유럽 대륙에 퍼지지는 않았다.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으로 들어오는 커피 수입 양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곳이 함부르크 항이었다. 그러나 파리나 빈의 거리 모습과 달리 프로이센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에는 카페가 많지 않았다. 카페보다는 술집과 레스토랑이 많았다.

그렇다면 함부르크 항을 통해 수입된 그 많은 커피는 누가 소비를 하였을까? 바로 가정주부들이었다. 계속되는 전쟁,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공장들, 의무 교육 제도로 생겨나기 시작한 공립학교들에 남편과 아이들을 보낸 시민계급의 여성들은 집안일을 마치고 친구 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혼란한 시대를 건너고 있었다.

이때 커피가 소비되는 새로운 장소로 등장한 것이 제과점이었다. 독일에서 빵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된 것에는 19세기에 시작된 커피와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이 있었다. 모든 곳을 남성에게 내어 준 독일 여성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바로 빵이 있는 제과점이었던 것이다.

1896년 9월 우리나라 <독립신문>에 게재된 최초의 커피 광고가 독일계 상인 콜샤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선인 윤용주가 1899년 8월 <독립신문>에 제과점에서 파는 커피 광고를 게재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2021.
Heinrich Eduard Jacob 지음. 남덕현 옮김. <커피의 역사>, 자연과 생태, 20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