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31 12:51최종 업데이트 21.08.3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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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정의당 전 대표가 8월 23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대통령제를 없애는 대통령," 즉 정당 중심의 의원 내각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승만의 고집으로 대통령제로 최종 결정났지만, 1948년 제헌국회는 의원 내각제를 선호했다. 이승만 독재를 끝내며 1960년 내각제를 실시했지만, 이 시도는 5.16 군사 쿠데타로 단명, 이후 한국 사회는 대통령제의 형식으로 지속된 군부 독재를 경험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제는 제왕적 권력으로, 의원 내각제는 이에 대한 대안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정당 중심의 내각제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의원 내각제의 지도자는 대통령과 어떻게 다를까. 의원 내각제를 만든 영국 그리고 영국 의회 정치의 심장, 하원(House of Commons)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영국 하원 회의장 구조 

코로나로 1년 이상 조용했던 하원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지난 7월 말 코로나 규제가 해제되었지만 하원 정상화는 8월 여름 휴회 기간을 지나 9월이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대한 긴급 토론이 필요하다는 정부 요청을 수용, 하원 의장은 8월 18일 하원을 전격 소집했다.

1년 반 만에 하원이 꽉 찼다. 영국 하원은 하원 의장(speaker)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네 줄의 긴 벤치가 있다. 양쪽의 맨 앞줄은 앞 벤치(front bench)로, 그 뒤는 뒤 벤치(back bench)로 불린다.
 

영국 하원 회의장 ⓒ UK parliament

 
의장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집권 여당의 자리다. 현재는 보수당이 차지하고 있는데, 총리 보리스 존슨이 앞 벤치 중앙에 앉는다. 그 양 옆으로 내각 장관들이 앉아 총리를 보좌한다. 평의원들은 뒤 벤치에서 토론에도 참여하고 토론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어 소속당을 응원한다.

하원 회의장에서 총리는 철저히 정당의 일부다. 앞 벤치에 앉을 권한 외에는 딱히 총리가 갖는 특권이 없다. 단독 의자 하나 없이 내각 인사들과 어깨를 부비며 벤치를 공유한다. 팔짱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기도 하고 인상 구기고 소리 지르고 똑같이 흥분한다. 언행에 문제가 있을 경우, 하원 의장으로부터 잔소리도 듣는다.


의장 왼쪽은 야당 자리다. 수상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앞 벤치 중앙은 제 1야당인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가 앉는다. 그의 양 옆에는 야당이 꾸리는 각 부처 담당자, 소위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이 노동당 대표에게 힘을 보탠다. 오른쪽과 마찬가지로 야당 소속 평의원은 뒤 벤치에 앉아 토론 참가 및 소속당을 응원한다.

의장의 진행에 따라 여당과 야당, 그리고 총리와 제 1야당 대표는 매주 한 번씩 테이블을 앞에 두고 토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토론은 가감 없이 방송을 탄다. 이들의 몸짓, 농담 등 한마디 한마디를 정치 평론가들이 분석한다.

정당의 일부로서 하원 내 토론을 이끄는 총리. 이것이 정치적 중립 의무로 정당에서 탈퇴하고 국회 내 논의와 거리를 두어야 하는 대통령과 크게 다른 지점이다. 

회의장에 담긴 정치 토론 코드

'법과 질서'를 중시하는 영국에서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집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세 군데 있다. 축구장, 펍(pub)이라 불리는 주점, 그리고 하원이다. 하원 의장의 주 임무가 회의장 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일 만큼 하원은 토론으로 뜨겁다.

토론 중심의 정당 정치를 이해함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영국 국교회 예배당 구조다. 영국 의회 공식 사이트에 의하면 하원은 처음에 독립된 회의장이 없었다. 1547년부터 현재의 웨스트민스터 영국 의회 건물이 지어지는 1852년까지 하원은 성 스테판 예배당(the Chapel of St Stephen)을 빌려 사용했다.
 

The House of Commons 1793-94 by Karl Anton Hickel ⓒ 위키커먼스

 
벤치가 정면 십자가를 향해 놓인 것과는 달리, 이 교회는 벤치를 양 벽 쪽으로 배치, 가운데 통로를 두고 서로 마주보는 형식으로 놓여 있었다. 비슷한 정치관을 공유한 정치인들이 한쪽에 앉고 이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다른 한쪽으로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마주보며 토론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하원 회의장의 내부 구조를 바꿀 수 있었던 기회가 한 번 있었다. 1941년 5월,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영국 본토 공습으로 하원 회의장이 전소되었을 때다. 복구 작업 논의를 시작했을 때 반원 형태의 회의실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 총리가 옛 형식과 작은 회의장을 고집했다. 그는 영국 민주주의의 특징인 양당제와 토론 문화를 표현할 수 있는 맞대결 구도를 선호했고 보다 더 논쟁적인 토론을 위해서는 비좁은 공간 속의 친밀한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좁은 공간과 마주보는 벤치로 의원들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하원 의원이 총 650명이지만, 영국 의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회의장 좌석 수는 427석이다. 무려 200명 이상이 앉을 자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안건이 중요해서 거의 모든 의원이 참석할 경우, 늦게 온 의원은 빈 공간을 찾아 몇 겹으로 서 있어야 한다.  

427석 중 한 곳에 앉았다 하더라도 비좁다. 팔걸이가 있는 개인 의자도 아닐 뿐더러 책상도 없다. 벤치 뒤로 종이 몇 장 세워 꽂을 수 있는 공간이 전부다. 보통 벤치에 의원 열댓 명씩 어깨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각자 무릎에 폴더 하나와 펜 하나 들고 앉아 토론에 참석한다. 모니터는 상상할 수도 없고 노트북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회의장 바닥은 연두색 카펫으로 빨간 줄이 양쪽 벤치 앞에 굵게 그어져 있다. 줄과 줄 사이의 거리는 3.96미터로, 전근대 시기 사용되던 장검을 두 개 나란히 놓은 거리다. 토론을 칼과 칼의 대결로 비유한 것으로, 하원 회의장 내 토론 스타일은 흔히 "베고 찌르기(cut-and-thrust)"로 묘사된다.
 

영국 하원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운데)가 노동당 대표인 제레미 코빈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있다. 2019.10.29 ⓒ 연합뉴스

 
토론 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언어다. 의원들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상당히 세다. 의회가 공식적으로 낸 자료에 의하면 최근 몇 년 의원들의 발언 중 거짓말쟁이, 주정뱅이, 불한당(blackguard), 망나니, 멍청한 새끼(git), 부랑자(guttersnipe), 겁쟁이, 훌리건, 쥐새끼, 끄나풀, 배신자 등이 제재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보리스 존슨 총리는 앉아서 노동당 대표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에게 우유부단하다는 뜻이 담긴 속어(great big girl's blouse)를 외쳤다가 다음 날 신문 1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했다.

하원 의장의 즉각적 언어 제재로 인해 의원들은 좀 더 고급화된 표현을 발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원 의장의 제재를 피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표현을 발명한 예로 윈스턴 처칠이 있다. 그는 거짓말을 "용어적 비정밀성(Terminological inexactitude)"이란 표현으로 고급화시킨 걸로 유명하다.

총리에게 질의하는 시간

매주 수요일 12시 하원은 꽉 찬다. 총리가 평의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총리에게 질의하는 시간'(PMQ, Prime Minister's Questions, 이하 '질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질의 시간'은 수백 년간 지속된 관행으로, 1880년대부터 독립된 스케줄로 지정되었다. 1953년 보수당 윈스턴 처칠 수상 때는 화, 목요일 15분씩 했다. 이후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 총리는 좀 더 내실 있는 토론 시간을 갖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30분으로 바꿨다. 1990년부터 BBC가 질의 시간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다.

질의 시간은 총리에게 오전 스케줄과 오후 예정된 스케줄을 묻는 '질문 1'로 시작한다. 토론의 예열 과정이다. 그리고 총리는 일반적으로 제 1야당으로부터 6개의 질문, 제 2야당으로부터 2개의 질문을 받는다. 모든 질문에 총리가 직접 답한다. 이전에는 관련 부처 장관에게 답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대처 총리 때부터 총리가 모두 답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총리의 답이 끝나면 야당 대표가 발언 기회를 얻는다. 총리가 답을 하고 벤치로 물러나 앉고 이와 동시에 야당 대표가 테이블로 나와 발언을 한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된 후 토론이 평의원들에게로 확대되는 게 일반적이다. 발언을 하고자 하는 의원들은 손을 드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고 의장이 지명하면 발언권을 얻는다.

하원은 열띤 토론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질문자와 답변자 모두 간단한 메모는 가능하지만 써온 걸 보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분명한 자기 관점을 견지하면서 적절한 열정과 상대에 대한 약간의 비꼼 혹은 블랙 유머가 곁들여진 발언을 하는 걸 이상적으로 여긴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 정연하기만 하면 지루하고 동료 의원들과 대중에게 호소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총리와 야당 대표는 상대편 뒤 벤치에서 보내는 야유가 크더라도 주눅 들지 말고 여유 있게 웃어야 한다. 많은 경우 양쪽 대표는 한쪽 팔을 테이블 위에 있는 디스패치 상자(Despatch box)에 괴고 몸을 의장을 향해 약간 비틀고 의장과 상대편 의원석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유지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여야를 대표하는 두 라이벌은 매주 30분씩 수 백 명의 동료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은 정책에 대한 제반 실력을 쌓으면서 당내 리더십을 확고히 하고 당대표로서 대중에게 잘 호소해 총선에 이르는 필수 과정이다. 각종 현안에 대한 관심 정도, 이해도, 그리고 시각이 언론과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고스란히 노출되기 때문에 어느 쪽도 거품이 낀 이미지를 만들 수 없다. 의원 내각제에서 잠정적 기대치나 스타성에 의존한 지도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나라가 대통령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전환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 두드러지게 언급되는 "소통과 토론"은 한국 사회가 의원 내각제의 강점을 원한다는 신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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