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3 15:32최종 업데이트 20.12.2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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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수업>(인터뷰·글 마르쿠스 베른센, 기획·편역 오연호)을 읽은 독자들이 '행복한 배움', '행복한 우리'를 만들어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차례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독후감 대회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편집자말]
"시우야, 뭐 그리는 거야?"
"나무 그리는 거야. 나무가 있고 비가 이렇게 오는 거야."
 

아이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그린다'가 아니라 '생겨난다'라고 느낀 적이 있다. 색연필을 쥔 손이 나무를 그릴 때는 스케치북의 맨 아래로부터 힘차게 위로 뻗어가고, 비를 그릴 때는 주욱주욱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연의 생리를 있는 그대로 저마다 다르게 그리는 모습, 그건 마치 작은 스케치북 안에 또 다른 세상 하나가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그린다'가 아니라 '생겨난다'라고 느낀 적이 있다. ⓒ Pixabay

 
아이가 자라고, 아이가 창조하던 작은 세상으로 새로운 규범과 질서들이 밀어닥쳤다. 겁이 난 걸까. 아이는 예민해졌다. 만들어 내기보다 받아들이기 바빠진 일상이 아이의 몸에 가시를 돋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저 가시는 자연스럽지 않다고. 아이의 가시가 가끔 나를 찌를 때면 나는 아이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상해."
"짜증나."
"말도 안 돼."
"싫어."



아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을 견디기 위해 온몸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곤 이름표 하나뿐인 교복, 끝없이 정답을 외워야 하는 시험들,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지속되는 관계들... 아이를 둘러싼 일련의 환경들이 아이의 몸에 가시를 만들게 했던 걸까. 그 가시가 스스로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막이었던 걸까.

사교육이라는 정글

세상은 아이 또래를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집단화시킨다. 급격한 신체발달, 불안정한 정서 변화,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사춘기를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사춘기'라는 프레임 안에 집어넣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이가 겪고 있는 개별적 고통은 '원래 그런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내 아이를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토론을 하는데 애들이 말을 안 해. 아, 진짜 재미없어."
"오늘 논술 시험 있었는데, 애들이 뭘 써갖고 와서 외우고 있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어."
"선생님이 애들 말을 너무 무시해. 진짜 짜증나."

 

'삶을 위한 수업' 책 표지, 마르쿠스 베른센 (지은이),오연호 (편역) ⓒ 오마이북

 
<삶을 위한 수업>에서 만난 덴마크 교사들의 수업 철학은 마치 아이가 털어놓는 저런 불만들에 대한 정답지 같았다.

"배움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와 협력할 때 더 잘 이뤄진다."
"결과와 점수보다는 피드백과 토론이 중요하다."
"학생 이전에 인간이다... 교사와 학생이 권력을 분점한다."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옳은 답들이 제시되고 있었지만, 한 아이를 위로해 주지는 못하는 창백한 정답지 같았다. 아마도 현재 아이가 처한 현실과의 거리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입시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학교 교실이 '삶이 삶다워지는' 안전한 공간으로 바뀌어 나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비판적 민주 시민으로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학교가 건강한 공동체로 기능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의 현실적 고충과 입시를 무시할 수 없는 시스템 상의 딜레마도 모르는 바 아니다. 점진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학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게 조금 답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와 아이는 과연 무엇을 찾고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아이는 현재 학교라는 의무적 교육환경 외에 어떤 배움터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사교육이라는 정글 안으로 밀어 넣지 않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한국에서 부모로 살아가기'에 있어 일종의 도전이다.

한 해 한 해 입시와 가까워질수록 밀려오는 불안과 조용히 홀로 분투하는 것, 행복한 교육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결과가 유난함이 되어 외로움을 낳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내가 감수해야 할 몫으로 다가온다.

가끔 아이의 웃는 얼굴을 백신 삼아 접종해 보지만, 여간해선 면역이 생기기 않는다. 역시 혼자는 힘들다. 그럴 때 의지가 되어주는 책들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삶을 위한 수업>을 비롯하여 건강한 교육 공동체를 꿈꾸며 실천해 나가는 이야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 흔들리곤 하는 나의 나약한 의지를 어쩌랴. 그럴 때마다 많은 학자들에게 영감이 되어주었던 노자의 '爲無爲 無不治'(무위로 다스리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를 기억하려 한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알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는 것. 가장 적극적인 '비 행위'가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이로부터 삶의 '자기결정권'을 빼앗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늘 생각하려 한다. 

함께 질문하며 사는 삶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 대신 꿈을 꿀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 삶의 질문을 놓치지 않는 꿈꾸는 삶 말이다. ⓒ Pixabay

 
언젠가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그때 나는 아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어른이 된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도 꿈을 물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의 질문 덕분에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이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되면 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질문을 잊고 살게 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 오래된 버릇처럼 낡아가면서도 여전히 우리 삶에 유효한 것처럼, '꿈'이라는 말도 삶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오염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떤 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꿈을 명사화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아울러 '꿈'이라는 행위에 비난을 전제로 책임을 요구하던 시절도 옛말이다. 꿈을 삶의 한 방식으로 삼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 대신 꿈을 꿀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 삶의 질문을 놓치지 않는 꿈꾸는 삶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라는 말은 일종의 화두가 되었다. 인생이란 어차피 혼자 갈 수 없는 길이다.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는 이들, 함께 꿈틀거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그래서 불끈 힘이 된다.

청소년기를 보내며 부쩍 현실적인 고민들로 예민해진 아이가 어느 날 꿈틀, 꿈을 꾸는 일상을 되찾기를 바란다. 스케치북에 그려보던 아이만의 작은 세상을 이제 스스로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나도 나만의 꿈을 꾸기로 한다. 꿈틀.


삶을 위한 수업 - 행복한 나라 덴마크의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마르쿠스 베른센 (지은이), 오연호 (편역), 오마이북(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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