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6 11:51최종 업데이트 20.09.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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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에 맞선 김구·김규식·김원봉·여운형 등은 크게 보면 동지 관계이지만, 이들 상호 간에도 어느 정도의 경쟁 관계가 존재했다. 김구와 여운형 역시 그랬다. 이들은 그 이전에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각되는 과정부터 서로 판이했다.
 
43세의 김구가 1919년 9월 내무총장 안창호의 추천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받은 공직은 경무국장이다. 단어 자체는 경찰청장을 연상시키지만, 권한만 놓고 보면 훨씬 더한 중책이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나는 5년 동안 이 직무를 맡아 했는데, 이 경무국장 직은 신문관·검사·판사로 형 집행까지 하게 되는 직책이었다"고 회고했다.
 
권한은 광범위했지만, 경무국장의 실제 위상은 달랐다. 도산 안창호가 경무국장 직을 추천하게 된 것은 김구가 '정부 문지기가 되고 싶다', '독립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게 소원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때 안창호의 반응에 대해 <백범일지>는 이렇게 말한다.
 
도산은 쾌히 승낙하며 자기가 미국서 보니 백악관을 지키는 관리가 있었다며 백범 같은 이가 우리 정부 청사를 지키는 것이 적당하므로 내일 국무회의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경무국장은 임시정부 청사를 지키는 직분이었다. 그 자체로 훌륭하고 의미 있는 임무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김구를 이 자리에 임명한 것은 주로 양반 출신들인 임시정부 간부들이 빈농 출신인 김구를 처음에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김구는 이렇게 '문지기'에서부터 시작해 독립운동 지도자 위치에까지 도달했다.

진짜 '문지기' 김구, 떠오르는 스타 여운형
   

환국 직전 장제스 총통 주최 환송만찬회 때의 김구 주석(1945. 11.) ⓒ 백범기념관

   
여운형은 김구보다 10살 어렸다. 지주 가문 출신으로 배재학당 같은 서양식 학교를 경험한 여운형은 1919년 3·1운동 직전에 중국에서 유학 생활과 독립운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1918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한 일을 계기로 청년 지도자로 일거에 급부상했다. 여운형이 파견한 김규식은 임시정부 대표로 추인됐고, 여운형 자신은 외무부 차장으로 임시정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여운형이 일으킨 국제적 센세이션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3·1운동이 있던 해의 11월 16일에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처음에는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가 방침을 바꿔 일본에 초청해 환대를 베푸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몽양 여운형 평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3·1혁명 당시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만행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규탄을 받고 있던 일본 정부의 유화책을 보이고자,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이었던 여운형을 초청하여 조선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정략이었다.
 
젊은 조선인 지도자를 초청해 자국의 관대함을 보여주자는 게 일본의 의도였다. 이런 의도의 이용물로 선택될 정도로 1919년 한 해 동안 여운형은 국제적 인물로 급부상해 있었다.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피살되기 두 달 전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여운형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일본을 역이용해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독립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의 계산이 주효했다. 그는 일본 각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은 만용을 부리고 있다"라며 "3·1운동을 진압한 것은 타이타닉호(1912년 침몰)가 빙산을 무시하고 가다가 침몰하는 것과 같다"라고 강조했다.
 
또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대중 강연에서 타고난 웅변 실력으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 때문에 일본인 청중 몇몇이 느닷없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대형 사고'까지 있었다. 결국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각은 대체 뭐하는 데냐?", "이 내각이 여운형 내각이냐?"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으며 지지율 추락에 직면했다. 43세의 김구가 '문지기 생활'을 시작한 그 해에, 33세의 여운형은 이렇게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청년 지도자로 단번에 떠올랐다.

두 사람의 위상을 바꾼 신탁통치 정국
 
김구와 여운형은 그 외에도 여러모로 대조를 이뤘다. 김구가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면, 여운형은 사회주의에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김구가 폭탄을 앞세우는 무력투쟁의 길을 걸었다면, 여운형은 국제연대 활동을 하다가 조선중앙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국내 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준 김구와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는 이승만에 맞서 민족통합을 추구함으로써 크게 볼 때 동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경쟁이 있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정국 하에서 특히 그랬다.
 
그달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은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주의정부(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하고,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소 양군의 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 구성을 지원하며,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협의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지원 하에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를 구성한 뒤 최고 5년간의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 합의의 요체였다. 그런데 이것은 3상 회의 발표 전날 발행된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을 통해 '미국은 즉각 독립을 지지한 데 반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엉뚱한 내용으로 보도됐다.
 
이 보도는 엄청난 폭발력을 일으켰다. 한국인들의 가슴에 잠재된 뜨거운 무언가를 한꺼번에 들춰내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좌·우 할 것 없이 한국인 대다수를 분노하게 한 것이다. 1945년 12월 3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전국에 반대열(熱)'에서 보도된 것처럼, 28일부터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뜨거운 반대 운동으로 달아올랐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가 분노를 배가하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이 꼭 그것 때문에만 분노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신탁을 주장했다고 보도했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35년간의 지긋지긋한 일제 지배가 끝난 마당에 4개국의 지배를 더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민족적 정서에 가장 기민하게 대처한 인물이 김구다. 한 달 전인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 정치적 위상이 위축돼 있었던 김구는 미군정이 불허한 임시정부 주석 직함을 내걸고 반탁운동을 조직했고, 이는 그를 거대한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서게 했다.
 
여운형은 그 회오리바람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가 이끄는 인민공화국(인공)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에 반탁운동을 위한 조직 통합을 제안했다. 1988년에 <한국정치학회보> 제22집 제2호에 실린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논문 '반탁에서 찬탁으로 - 남한 좌익진영의 탁치관 변화에 관한 연구'는 당시 발행된 <조선인민보>를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공 측은 민족통일의 저해 요인이 인공과 임정의 병립에 있으며 민중들은 양자의 동시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양측의 대표들로 통일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운동에 신속히 동참함으로써 이슈의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여운형과 인공 측의 의도가 실린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거부됐다. 인공이 1월 1일 발송한 통합제안 공문은 당일 오후 6시 반송됐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정부 형식을 띠는 인공과의 통합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미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굳이 좌파에 지분을 내줄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던 듯하다.
 
이것은 김구와 여운형이 신탁통치 정국에서 경쟁 관계가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구의 퇴짜를 맞은 좌파 내지는 진보 진영은 급박한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독자노선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인공과 공산당이 포함된 좌파 진영의 선택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선회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A) 신탁통치를 협의한다(B)'는 3상 회의 결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은 B보다 A를 부각하는 방법으로 찬탁의 명분을 세웠다. 3상 회의 결과를 받아들이면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 수립이 가능하므로 찬탁이 손해가 아니라는 쪽으로 논리를 정비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구와 여운형은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놓고 대결하게 됐고, 이 대결의 결과는 김구의 승리로 끝났다. 대중의 마음을 잡은 쪽은 여운형의 논리가 아니라 김구의 논리였다. 대중의 눈에는 반탁에서 찬탁으로 방침을 선회한 좌파의 태도 역시 명분이 없어 보였다.
 
3상 회의의 결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이것은 한국인들의 반탁 열기 속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4대 강대국의 합의 사항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한국 민중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것은 좌냐 우냐로 재단할 수 없는 한국 민중 나름의 셈법이었다.
 
라이벌들의 대결은 보는 이의 흥미를 돋우지만, 어떤 라이벌 대결은 보는 이를 서글프게 만든다. 거대한 악당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는 두 사람이 대결하거나, 대결보다는 화합을 해야 할 두 사람이 대결하는 경우에는 관객이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구와 여운형의 경쟁도 그랬다. 이들의 대결은 민족분단을 반대하는 진영의 역량을 분산시켰을 뿐 아니라, 친일파들이 반탁운동에 가담해 애국자로 둔갑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벌어지지 말아야 할 라이벌 대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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