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0 08:53최종 업데이트 20.06.3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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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2004년 5월 9일부터 11일까지 민주노동당이 의원단 정책연수를 개최했던 전북 남원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폐교된 두동초등학교) 기념석에 쓰여 있는 글귀다. '민주노동당가'로 알려진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에 등장하는 노랫말이기도 하다.
 

2004년 5월 민주노동당 의원단 정책연수가 열렸던 전북 남원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기념석 글귀(왼쪽)와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 악보(오른쪽). ⓒ 민주노동당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온' 길동무들과 함께 "새 세상을 꿈꾼" 노회찬의 꿈과 길, 그 마음의 심연에 깔려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노회찬은 낙관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제1회 노회찬포럼(2019.4.23.) 발제문('노회찬의 꿈, 노회찬의 정치는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휴머니즘'과 '역사적 낙관주의'가 '노회찬 정신'의 기저에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 그는 진보정당을 설계하고 개척하면서 정치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고 본다.

'노회찬 정신'에 대해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은 그의 진보정당 활동과 연동해 이렇게 정의한다.
 

2019년 4월 23일 노회찬재단이 개최한 제1회 노회찬포럼 '노회찬 꿈과 정치, 누가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 당시 발언하고 있는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 노회찬재단

 
"민주주의에서는 운동보다 정치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민중 권익을 보호·신장하는 최고의 진보적 실천이다. 정치는 이상적 최선을 실현할 수 없고 고통스런 윤리적 도전을 감당해야 하지만 그 길에서 인간미를 잃지 않고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만들며 나날이 전진하는 데 인생 전체를 거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노회찬 정신이다." (노회찬재단, <제1회 노회찬포럼: 노회찬 꿈과 정치, 누가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 토론문, 2019.4.23.)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연설은 많은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노회찬이 진보정당에 헌신해 온 삶을 살아온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새벽 첫차를 타는 우리의 이웃, 투명인간들'에 관한 얘기로 시작되는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연설이 그것이다.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연설 당시 노회찬 대표의 모습. ⓒ 진보정의당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 진보정의당은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이 그 일말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쳐왔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의 손이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집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2019년 1주기를 맞아 이정미(정의당 전 대표)는 추모의 글을 통해 "'6411 버스 정신'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배제된 한국 민주주의를 바꾸겠다는 정치적 소명"이라며 노회찬 정신의 한쪽 날개로 6411번 버스를 호명한다('노회찬 정신의 양 날개, 6411버스와 진보정당', <프레시안>, 2019.7.23).

"지난 1년간 정의당과 저는 '노회찬 정신'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 정신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회찬 정신은 무엇일까요? 정의당은 간명하게 그것을 '6411 버스 정신'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6411 버스 정신'은 우리 정치가 한 번도 제대로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거명하는 것이고 권력 밖으로 밀려난 시민들을 정치의 한복판의 데려오는 것입니다. '6411 버스 정신'은 사회 경제적 약자에 대한 막연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닙니다. '6411 버스 정신'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배제된 한국 민주주의를 바꾸겠다는 정치적 소명입니다.

그래서 노회찬 정신의 또 다른 한쪽 날개는 '진보정당'입니다. 6411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로 취급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대표할 정당이 필요합니다. 그 정당이 온전히 민주정치의 일원이 될 때, 그들의 삶을 바뀌며 그들의 자존 또한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회찬은 생의 모든 과정을 진보정당 건설에 바쳤고, 정의당의 성공을 위해 분투해 왔습니다."


진보의 미래를 낙관한 '낙관주의자'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 1980년대말, 1990년대초 소련과 동구의 국가사회주의 몰락을 전후해 이른바 '운동권'에서 한때 유행했던 말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맞서 감옥에서 싸운 그람시(1891.1.22.~1937.4.27.)는 동생 카를로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나의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란다. 어떤 상황이건 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내가 비축해놓은 의지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단다. 나는 절대로 환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일도 없어. 나는 언제나 끝없는 인내심으로 무장되어 있단다."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그람시 석방운동에 앞장선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이라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롤랑은 '안토니오 그람시: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내면서 이 말을 썼다. 그람시가 애용하게 된 이 말은 세월이 흘러 쿠바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도 즐겨 썼다. 부산중학교 시절 노회찬의 롤모델이었던 슈바이처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나의 지식은 비관적이지만, 나의 의지와 희망은 낙관적이다(My knowledge is pessimistic, but my willing and hoping are optimistic)."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며 산 평생 동지' 김지선은 2019년 1주기 추모제 자리에서 "노회찬은 너무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음과 신념은 너무 크고 유쾌하고 낙관적이었다"라며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노회찬이 사는 동안 함께 가는 동지들을 너무너무 사랑했다는 것"이라고 전한다.

이정미(정의당 전 대표)가 2019년 1주기를 맞아 쓴 추모의 글은 노회찬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밭을 탓하지 않는 농부, 의지로 낙관하는 정치가였습니다."

고등학교 친구 이종걸은 노회찬의 '진보적 낙관주의'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어둠의 또아리 속으로 같이 걸어 들어갔던 친구여',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7호, 2019.11.29.)

"촛불시민혁명의 열기와 기대를 모아서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현실이 교착되면 온갖 나약한 생각이 든다. 그가 살아 있다면 현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진보적 낙관주의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을 것 같다.

세월의 까마득한 저편에 있는 서울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기억 속의 그는 항상 낙관적이었다. 10대 소년들에게 '10월 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통치는 분노만큼이나 공포스러웠을 텐데, 그는 겁을 내지 않았다.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게 단단하고 거대해 보였던 그 파쇼의 철옹성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가 평생 내 앞에서 보여줬던 '진보적 낙관주의'의 근원을 잘 모르겠다. 그는 상황을 단순하게 보는 낙관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신중했고, 복합적으로 사고했고 치밀하게 타산하는 타입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낙관주의가 놀랍고 부러웠다."


친구 이종걸의 "놀랍고도 부러웠던" 궁금증에 대해 노회찬이 답한다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순간순간을 보면 역사가 후퇴할 때도 물론 있지요. 그러나 지그재그로 발전하는 것이 역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 낙관주의! 저는 늘 이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야 어려운 조건도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물방울이 끝내 바위를 뚫는 자연의 섭리를 되새깁니다. 힘냅시다.^^" (2009.12.14. 트위터 글)

2003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시절 노회찬은 폐쇄성과 함께 '패배주의'를 '운동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면서, 진보정당의 성장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퍼슨웹> 인터뷰 2003.1.1.). 1980년대 초반 인기 애니메이션 <들장미 소녀 캔디>의 주제가를 언뜻 떠올리게 한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2003년 1월 1일, '퍼슨웹'과 인터뷰한 노회찬. ⓒ 퍼슨웹

 
"우리나라 운동권의 가장 큰 문제는 패배주의와 폐쇄성입니다. 물론 그 책임의 상당부분은 외부로터 온 것입니다. 그 극심한 탄압을 오랫동안 받아왔고, 자유주의 세력한테 빼앗겨왔으니까요. 늘리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힘들었던 시대에서는 지키는 것만으로도 자기 존재가 확인되는 그런 문화에만 익숙한 거죠. 뭔가 성공한 적이 별로 없는 거예요. 성공하려고 하는, 이기려고 하는 그런 세력의 태도나 문화가 부족하죠.

우리한테 익숙한 말이 어떤 거냐면 '넘어져도 난 울지 않을 거야' 이런 거예요. 안 넘어지려 하는 게 아니라 미리부터 울지 않겠다는 거. 그리고 누굴 감옥에 집어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거보다는 '나 감옥에 들어가는 거 겁나지 않아' 이런 거 있잖아요."


패배주의가 패배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 점에서 패배주의와 비관주의는 다르다. 또 낙관주의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며 비관주의라고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다. 경계해야 할 비관주의는 자신의 실패를 '항상' '모든 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코 새로운 상황에 도전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위축되고 미리 포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회가 많고 자원이 풍부한 상황에서는 낙관주의적 접근이 바람직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밝지 못한 상황에서는 적당히 비관적인 것이 건강에 차라리 이롭다. 무조건 어두운 측면만 보고 지레 주저앉는 극단적인 비관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하여 얻은 적당한 비관주의는 헛된 노력을 최소화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완충제 구실을 할 수 있다(전상일, '때로는 비관주의가 '약'이다', <시사저널>, 2006.6.5.).

2010년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런 말을 한다(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현실을 만만하게 안 보려는, 다시 말해 근거 없이 낙관적으로 보는 걸 반대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편인 극단적인 냉소로 빠지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실상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거든요. 그러면 앞으로 전망이 없느냐. 지금까지와는 다른 낙관의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 우리가 지식과 논리로서 예측한 거 이상의 역사의 변화의 역동성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있는 편이죠." (132쪽)

"진보의 기본원리는 실사구시라는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가 이상은 있지만 실시구시가 없다면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사구시가 생명이라고 봐요. 우린 제대로 실사구시하고 있는가. 그 관점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과 현실을 이상에 가깝게 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점검을 해야 되고 방법론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나와야 돼요." (184쪽)


노회찬이 역사에 대해 낙관적이게 된 사건은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에서의 민주노조 결성을 시작으로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노동조합이 새로이 조직돼 1987년 12월 말 현재 노동조합수 4103개(1986년 2675개), 조합원수 126만7457명(1986년 103만589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7년의 노동쟁의 3749건 중 3341건이 7월과 9월 사이에 전개됐다. 하루평균 발생건수가 44건으로 1986년 0.76건의 58배가 증가했다. 

그리고 노동자대투쟁 기간에 발생한 쟁의 중 76%가 중소기업에서 일어났으며, 비합법투쟁이 94.1%를 차지했다.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사회의 공업화, 자본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래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한 노동자들의 최초의 대규모적이고 폭발적인 진출이었다.

"87년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때 나는 믿지를 못했다. 내 평생에 못 볼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내 생애는 그런 날이 안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87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역사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이 되었다." (<'自由人' 인터뷰>, 2011.8.18.)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이런 노회찬의 낙관적인 삶의 태도는 인민노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청주교도소에서 부모님께 부친 편지에서도 언뜻언뜻 드러난다.

"겨울은 이제야 15척 담 안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신록의 여름이 조금씩 다가서고 있습니다. 변화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생동감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변화의 방향이 발전적일 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1991.4.23.)

"그야말로 이젠 홀가분하게 이제까지의 시간들을 정리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야 할 것입니다. 저의 재산은 여유와 낙천적 성격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장래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1991.10.16.)


"인민노련은 나의 정치적 고향"이라던 노회찬. 인민노련 옛 동지들은 노회찬을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낙천적이었고 두터운 현실의 벽 앞에서도 낙관주의적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온화한 웃음과 유머 또한 잃지 않았다"(하성환, '인민노련부터 진보정당까지 한결같이 단단하고 따뜻했던 그가 그립다', <오마이뉴스>, 2018.8.7.).

고교 동창이자 인민노련 동지이기도 한 정광필(50+인생학교 학장)은 노회찬 1주기를 맞아 "그가 끝내 진보정당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문한 뒤 그 나름의 답을 찾아 적는다(<매일경제>, 2019.7.26.).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 때문 아니었을까. 그가 6411 새벽버스를 타는 청소노동자, 투명인간들에게 이름을 불러주자 했던 것은 번뜩이는 정치적 감각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일상이 그러했다. 사실 진보정당의 지도부에 있다 보면 정책이나 전략을 고민하기도 버겁다. 그럼에도 그는 늘 현장의 최전선에 동참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끊임없이 만났다.

... 그리고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역사적 안목으로 바라보고, 그 이면도 들여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녔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는 모두에게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매번 겪는 패배와 시련 속에서도 긴 호흡으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면 남 탓하지 않고, 지금 살려야 할 부분과 더 발전시킬 부분, 그리고 포기할 부분이 보인다. 그러면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음을 준비하는 여유도 생긴다.

한편 의기소침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다. 화나고 답답한 상황에서 이런 유쾌한 유머가 가능했던 것은 큰 꿈을 꾸고, 먼 길을 가는 사람의 여유에서 비롯된 내공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 여유와 유머에 음으로 양으로 많은 빚을 졌다. 그 덕분에 한바탕 웃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불판은 갈아야 해!' 또는 '모기는 잡아야 해!'라고 결의를 다지지 않았던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웃음 속에 본질을 놓치지 않는 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그는 참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진보가 진보답지 않으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는 노회찬은 진보의 미래에 대한 낙관의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는 이 사회가 점점 더 진보를 필요로 하는 사회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의 우월성뿐만이 아니라 계속 스스로를 감시하고 파괴하고 부정하면서 스스로를 혁신하는 진보의 속성 때문이다. 진보는 때로 길을 잃어 방황하고 우를 범하거나 실책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고유의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때문에 진보의 미래를 낙관한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2014, 289쪽)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휴머니스트'

국회 환경노동조합 김영숙 위원장은 국회 청소노동자들을 대신해 노회찬을 이렇게 평한다.

"노회찬 의원님은 음지에서 일하던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우해줬습니다. 우리가 만난 정치인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이셨습니다."

2004년 5월 KBS <아침마당>을 통해 노회찬 부부와 첫 만남을 가진 뒤 오랜 인연을 이어온 이금희 아나운서, 국회 본관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추모문화제(2018.9.7.) 사회를 보며 많은 추모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런 자리에서 사회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14년 전 건너편 방송국에서 진행자와 초대 손님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여의도동 1번지에 있는 꽤 많은 분을 초대 손님으로 모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유일하게 진짜였습니다. ...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분은 사람들을 좋아하셨으니까 이렇게 많은 분이 오셨구나.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오셨구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여기까지 옮기셨구나 하고 반겨주셨을 것 같아서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을 반깁니다."

휴머니스트로서 노회찬의 흔적은 그의 삶의 전반에 걸쳐, 그리고 그의 글과 말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좋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휴머니스트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크다." (정치와평화연구소의 컴퓨터통신, <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

"누구에게나 그렇듯 삶은 한번 밖에 없죠.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야 해요. 삶 자체를 소중하게, 무겁게, 동시에 낙관적으로 즐겁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만 잘사는 삶이면 되나요. 개인의 삶이 우선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다들 형편이 어려운데 나만 잘 산다고 과연 내가 기쁠 것이냐. 그렇지 않죠. 그런 점에서 저는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고, 이것이 제 가치관인 휴머니즘의 바탕입니다." (<경향신문>, 2011.1.17.)


변영주와의 인터뷰에선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바라봐야 되고 인간관계를 맺어나가야 되는가. 사회적 존재로 처음 출발할 때가 휴머니즘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다른 것은 다 왔다가도 가고, 마치 계절에 따라서 옷이 바뀌는 것처럼 달라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거는 휴머니즘이고요.

인간을 실망시키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 또한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 없이는 못 산다는 생각. 오히려 그것까지 놓아버리게 되면 겁이 나는 거죠. 내가 그걸 놓아버리게 될까 겁나서 죽어도 그건 쥐고 있는 거에요. 두려운 거죠.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 할까봐 그것만은 안 놓으려고." (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41쪽)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노회찬의 '길동무'였던 김윤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은 노회찬을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라고 칭한다(김윤철, '약자들의 벗',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304쪽).
 
"노회찬,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부와 권력의 횡포로 고통받고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시민적 권리를 지켜내고자 애썼던 정치가였다. 그는 여성, 노동자, 철거민, 청소 노동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었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정치다운 정치'를 구현코자 했던 이가 걸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길이었다."

'함께 맞는 비'
 

2007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예비후보. 노 의원 뒤로 신영복 선생의 '함께 맞는 비'가 보인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회찬 의원실에 걸려 있던 '함께 맞는 비'(신영복). ⓒ 노회찬재단

 
2004년 17대 국회에 들어와서부터 일하는 공간에서 노회찬과 늘 함께 한 액자 하나가 있다.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한 신영복 선생의 '함께 맞는 비'가 그것이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갖고 있는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노회찬은 '6411번 버스와 투명인간'으로 상징되는,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아왔다.

2004년 17대 국회에 초선 비례대표 의원으로 들어간 이후 3선(17·19·20대) 국회의원 노회찬은 의정활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실마리를 발견하려 했으며, 그것은 그의 열정적인 입법활동과 국감 등을 통한 행정부 감시·견제 활동 등으로 나타난다.

3선 의원인 그의 의원생활은 7년 남짓으로 임기를 제대로 마친 적이 없다. 민주노동당 탈당으로 의원직으로 사직한 17대 국회(2004.5.~2008.3.), '삼성 X파일'으로 의원직을 상실, 9개월에 그친 19대 국회(2012.5.~2013.2.) 그리고 20대 국회(2016.5.~2018.7.)를 합쳐서다.

의정 활동 7년 동안 노회찬은 127건의 법안 및 결의안을 대표 발의, 이 가운데 34건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현실 정치는 현실의 국민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지지를 얻고, 참여를 도모하는 것"임을 강조한 노회찬의 입법 및 의정 활동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누리는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이었고, 사회 약자들의 현실을 정치 의제로 만드는 것"이자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실현하는 것"이었다(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8).

<노회찬과 함께한 '처음들'... 그가 국회에 남긴 유산>이라는 제목의 <한겨레> 기사(2018.7.25.)는 노회찬이 발의한 주요 법안을 통해 노동자와 장애인, 여성과 성소수자 등 사회 약자와 소수자를 품어 온 노회찬의 정신과 꿈을 이렇게 돌아본다.

- 노회찬 1호 대표발의 법안 '호주제 폐지'(2004.9.14.)
- 국회의원 가운데 처음으로 '차별금지법' 대표 발의(2008.1.28.)
- 국회의원 가운데 처음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 대표 발의(2005.9.20.),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2007)에 큰 역할
- '노동자의 벗'으로 대표 발의한 노동 관련 1호 법안은 '삼성에스디아이(SDI) 불법위치추적 특검법'(2005.2.28.)
- '하도급거래 공정화 관련 법률 개정안' 대표 발의(2012.9.12.)
- 근로복지공단이 산업재해를 조사할 때 재해 당사자를 참석시키도록 규정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대표 발의(2017.9.20.), 방위산업체 종사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대표 발의(2017.12.20.)


이외에도 노회찬은 위험방지 의무 불이행시 사업주를 형사처벌하는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일명 한국판 '기업살인법')을 대표 발의한다(2017.4.14.). 이틀 전인 4월 12일 노회찬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연대와 민주노총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현행법은 재해가 일어나도 경영책임자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처벌하기 어렵고, 기업의 조직구조 때문에 경영자의 과실을 입증하기 쉽지 않다. 대규모 참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국회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신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2017년 4월 12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입법발의 기자회견 당시 모습. ⓒ 노회찬재단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산업재해로 사망한 우리나라 노동자는 3만8000명에 달했다. 매년 평균 2376명이 목숨을 잃었고, 2016년에도 2040명이 산재로 숨졌다.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006년과 2011년을 제외하고 23년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가히 독보적인 1위라고 할 수 있다.

법안은 제안 이유에서 "현행 형사법체계는 기업의 안전관리시스템을 관할하고 지배하는 경영자가 재해의 위험을 평가절하하도록 유도해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재해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라며 "영국·캐나다 등 여러 해외 국가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인명사고에 대해 경영책임자와 기업의 형사책임을 묻는 '기업살인법'을 도입했다"라고 말한다.

법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법인이 안전 및 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해 사상자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를 형사처벌하고 해당 법인에 벌금 부과 ▲사업장이나 공중이용시설 감독 의무가 있는 공무원의 직무 유기로 사상자가 발생한 경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상, 3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기업과 담당 공무원의 책임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20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3년 동안 계류 상태로 있다가 20대 국회가 마지막 회기를 마치면서 자동 폐기된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⑦-2] 노회찬이 꿈꾼 나라, "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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