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6 09:24최종 업데이트 20.06.1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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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당시 국민승리21 대표). ⓒ 민주노동당

 
1997년 15대 대선과 '국민승리21'... "노회찬 없었다면 난 대선 안 나갔을 것이다"

1997년 12월 15일 15대 대선은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의 향배를 결정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이후 10년에 대한 정치적 결산이자 이른바 '3김 정치 시대'의 마지막 선거라는 점에서 어느 때 대선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은 민주노총과 진보정치연합과 전국연합이 주축이 돼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노회찬이 대표를 맡고 있던 진보정치연합은 7월 6일 2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대선 방침을 이렇게 결정한다.

"①진보정치연합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최대의 조직적 과제인 진보정당 건설을 앞당기기 위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적극 참가한다. 선거 참여의 일차적 목표는 진보정당 건설의 물질적 기초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있다.

②진보정치연합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계, 진보적인 정치단체, 시민사회단체 등 폭넓은 민주진보세력과 굳건한 연대와 협력을 토대로 국민후보 운동을 전개한다. ③국민후보는 근본적인 정치개혁, 재벌경제의 타파, 참된 사회복지의 실현, 남북 평화체제의 구축 등 양심적인 다수 국민의 희망을 대변해야 하며, 선거에서 확인된 국민의 지지를 기초로 진보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④진보정치연합은 폭넓은 민주 진보세력과 함께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후보 운동을 위한 공동의 선거기구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1997년 9월 7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 '국민후보 추대와 국민승리21(가칭) 준비위원회'가 출범한다. 이 자리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후보로 공식 추대된다. 같은 해 10월 26일 민주노총,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정치연대 등은 민주진보진영의 공동선거대책기구인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을 결성, 대통령후보로 권영길을 결정한다.

대선 결과 권영길 후보는 30만6026표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득표를 한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등 대중조직의 공식 결정을 배경으로 한 사실상 대중적 진보정당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진보정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97년 대선후보였던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의 공보물. ⓒ 선거정보도서관

 
국민승리21의 출범은 인민노련이 태어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국민승리21 출범의 산파는 노회찬이었다. 노회찬의 말이다.

"제가 97년 1월에 월간 <말>에다가 이른바 민주민중 세력들이 총집결해 가지고 97년 대선을 치르고 그 힘으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라는 제안을 했었습니다. 이후 저희는 바로 그 작업에 착수했는데 일단 민주노총은 그해 6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공식 참여 결의를 했습니다.

농민운동 조직은 뜻은 같이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민주당과 함께 지역에서 지방선거도 같이 하고 여러 가지 해온 관계로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그런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농민 부분은 한참 뒤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농민 부분은 이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나 참여하게 되는 거죠. … 그 다음에 빈민 조직도 그 당시에는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못한 상태였고, 민주노총이 상당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그리고 진보정치연합, 주요하게는 이 세 조직을 중심으로 하되 폭넓게 그래서 국민승리21에는 오세철, 김세균 교수 같은 좌파 지식인들도 참여를 했고 그다음에 장기표 씨도 초기에는 참여를 했었습니다. 국민승리21 대통령 선거까지는 참여했고요. 그리고 거기서 권영길 위원장을 이제 대통령후보로 추대를 해서 선거를 치렀던 거죠."(정찬대,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①', <폴리뉴스>, 2009.5.4.)


권영길과 단병호는 당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이광호, '진보정당운동과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20~21쪽).

"1996~97년 노동자 총파업 이후 내가 대선 후보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않았다. 내가 후보로 나서야 된다는 얘기가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내게 그런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총파업이 끝난 후 어느 날 노회찬이 만나자고 했다. 2시간 이상 나를 설득했다. 그 전에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건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만약 노회찬이 없었다면 나는 1997년 대선에 후보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권영길)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인 진보정당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노회찬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 그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 노선을 끝까지 지켜왔다. 많은 명망가들이 이런 노선을 주장하다가 떠나갔다." (단병호)


민주노동당 창당 :
"인생의 목표 반은 이뤄졌다, 반이나 이뤄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2000년 1월 30일,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권영길 대표(가운데) 왼쪽으로 노회찬 당시 부대표의 모습이 보인다. ⓒ 민주노동당

 
1997년 대선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마포에 있던 선거대책본부 사무실은 폐허처럼 고요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선대본 사무실과 규모가 비슷했고 일하는 사람도 200명이 훨씬 넘던 사무실이었다.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노회찬과 후보 권영길을 포함해 남은 이들은 열 명 남짓. 이들은 함께 봇짐을 싸고 삼선교 부근 허름하고 어두침침한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와 '봇짐 동지'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노회찬의 말이다.

"진보정당운동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결국 원내진출로까지 이어졌다. 진보정당의 오랜 단절 끝에 대중적 진보정당 시대가 열리는 계기를 마련한 조직이었다. 국민승리21은 애초에 그런 용도로 '설계'되었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09쪽)

함께 '봇짐'을 꾸린 정책 담당자 이재영은 이렇게 정리한다('2002년에 돌아보는 1997년 대선', 민주노동당,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특집호).

"통상, 이기지 못하는 선거는 씁쓸한 빚잔치이기 마련이다. 철 지난 유원지나 철시한 장터보다 더 적적한 것이 패배한 선거본부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국민승리21 운동은 사람이든, 조직이든 가장 많이 남긴 선거였다.

수많은 선거운동원들이 각 조직으로 철수한 후에도 십여 명의 활동가들이 남아 조직을 유지하며, '진보정당 건설을 직접적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으로의 전환'을 준비한다. 그들은 1997년의 긴 겨울 동안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며, 당을 꿈꾸었다. 1998년 봄 CMS에 처음 등록된 당원은 서른명이었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이 대통령 선거라는 국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진보 진영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창당 작업에 들어가는 것을 구상했다. 그는 1998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원탁회의를 제안해서 만들었고, 회의 결과 1998년 하반기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몇 차례 회의를 거쳐 1999년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창당을 앞두고 진보정당추진위의 <기관지 준비 호외>(1999.8.28.)는 1997년 대선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라고 묻고 "진보정당이 깨어있는 민중과 함께 희망의 정치를 펼칩니다" "절망의 정치를 민중들과 함께 하는 희망의 정치로 바꿔내는 역사적인 작업이 시작됐습니다"라고 답하면서 다음날인 8월 29일 진보정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출범한다는 것을 알린다.
 

1999년 8월 28일, 진보정당추진위 <기관지 준비 호외>. ⓒ 진보정당추진위

 

1999년 9월 6일, 민주노동당 준비위, <기관지 준비 호외>. ⓒ 민주노동당준비위

 
1999년 8월 29일 오후 여의도 63빌딩에서 노동자·농민·빈민 대표 등 각계 인사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노동당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린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는 이날의 현장 모습을 '역사를 만들어낸 10시간'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스케치하고 있다.

"8월 29일. 보수정객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서울 여의도 한복판은 모처럼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의 물결로 가득했다. 이른 아침부터 진보정당 창당발기인 대회장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 모여 창당추진위 상근자들과 자원봉사자 63명이 대회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빌딩 앞 도로는 전국에서 모여든 노동자·민중들의 절박한 함성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1년 넘게 농성을 펼치고 있는 현대중기 노동자들, 경찰의 폭력과 강제철거 맞서 싸우고 있는 최촌마을 철거민들, 농성 1천일째를 맞은 에바다 사태 관계자들, 그리고 핵발전소 건설반대 천리길 행군에 나선 울산 시의원들. 진보정당은 그렇게 투쟁 속에 건설되고 있었다. 발기인대회 자체보다 투쟁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더 깊고, 짙은 의미로 '진보정당 창당'을 선언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민주노동당 준비위, <기관지 준비 호외 >, 1999.9.6.).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전민중이 하나 되어 진보정당 건설하자"는 슬로건 속에서 대회 시작 전부터 대회장 주변에서는 때 아닌 열띤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회장 입구에서 당명 제정을 위해 9개의 후보 당명 중 하나를 선택하는 1차 투표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발기인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당원의 손으로 당명을 뽑는" 한판 축제에 벅찬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안건인 진보정당 당명 결정 건에서는 2시간 가까운 토론과 4차에 걸친 표 대결 끝에 결국 '민주노동당'으로 결정됐다. 결선투표 결과는 민주노동당 651표, 통일민주진보당 611표였으며, 막판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한판 승부에 참석자들의 힘찬 박수가 터졌다. 
 

2000년 2월 7일, 민주노동당 <기관지 준비 호외>. ⓒ 민주노동당


2000년 1월 30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드디어 민주노동당 창당대회가 열린다. 당 대표로는 권영길 창준위 상임대표를, 부대표로는 노회찬(전 진보정치연합 대표), 박순보(전 전교조 부산시지부장), 양경규(민주노총 부위위원장)를, 그리고 사무총장으로는 천영세(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대표)를 선출한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준비 호외>(2000.2.7.)는 "창당 '이제 시작됐다'" "80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표지 타이틀 아래 "동지들, 창당됐습니다"는 제목으로 행사장의 풍경을 전한다.

창당선언문을 통해 민주노동당은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은 시대적 요청"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기본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당 강령은 "자본주의 질곡의 극복"과 "민족분단으로 인한 대립과 반목의 종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의 극복"과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 발전"을 통한 "새로운 해방공동체의 구현"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의 극복"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등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당헌은 여성 30% 할당제와 모든 공직 후보자의 상향식 공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조현연, <한국진보정당운동사>, 후마니타스, 2009, 175~176쪽).

199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국민승리21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출세주의‧기회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합법정당=선거정당=개량주의정당'이라는 등식 아래 우편향적 실천이라는 비판적 평가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한 일간지의 칼럼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대안에 목말라하면서도 막상 대안을 자처하고 있는 정당에는 무관심한 현실에 대해서는, 일단 그 정당 관계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다양성을 창출해 정치구조를 능동적으로 개혁하려는 국민의 '깨어 있는 정치의식'의 부족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진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정계에 기대 이상의 충격을 주었듯, 비록 소수 의석일지라도 기존 정당과 성격이 다른 정당의 정치인들이 국회에 진출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여 있는 늪과 같은 한국정치에 놀랄 만한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무성격의 기존 정당을 정책정당으로 변신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승삼, '대안정당에 주목하자', 중앙일보, 2000.2.11.)


훗날 노회찬은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대화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에 대해 이렇게 소회를 밝힌다(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29쪽).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변화는 정치에서 시작된다"

노회찬이 진보정당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회찬, '(여는글)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 「서문」,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2010 참조)

그렇다면 노회찬에게 '정치'란 어떤 것이었을까? "변화는 정치에서 시작된다."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2018) 한 단락의 소제목이다. 노회찬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과제를 풀 수 있을까요? 우선, 정치를 바꿔야 합니다. 불공정한 불법 채용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함도, 한반도의 평화도, 정치가 움직이면 바꿔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촛불 이후 대두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86쪽)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정치를 재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79쪽).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를 재인식하는 것이다. 현실 정치는 현실의 국민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지지를 얻고, 참여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를 자기 운동의 관성과 관념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본다. 정치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운동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2002년 9월,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난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그에게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 노회찬재단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노조 활동에서 정치 활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노동운동의 프로젝트를 정치의 프로젝트와 혼동하면 안 된다." 브라질 노동자당(PT) 룰라의 이야기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97쪽).

"중요한 핵심이다. 정치의 해법과 노동조합의 해법은 다르다. 노동조합운동의 연장선에서 정치를 바라보면 결국 이익집단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정치가 또 하나의 해결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와 노동운동은 그 문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국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조봉암만큼 선거와 정당을 중시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봉암은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꿈을 키웠고 정당 속에서 성장했으며 정당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 조봉암 정치노선의 특징은 정당정치, 의회정치·대중정치를 결합하려 했다는 점이다."(조현연, '조봉암과 21세기 진보',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 토론회, 2009.7.29.).

조봉암 이후 선거와 정당을 중시한 진보정치가를 꼽으라면 노회찬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재인식, 특히 선거에 대한 진보진영의 재인식을 강조하면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노회찬, '진보정당 건설의 전략과 전망', <노동사회> 통권 37호, 1999년 10월호).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부르주아 대의체제 하의 모든 정당들은 선거를 통해 평가받고 선거 결과에 따라 영향력의 증대와 쇠퇴를 겪게 된다. 정당인 한 이것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은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진보정당으로 성장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자기고백이다. 100년을 넘어서는 유럽 진보정당의 역사는 자신들이 취한 정책의 변천과 선거에서 획득한 의석 수의 변화를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 노회찬은 그에 화답하면서 공직선거에 출마한다. 권력의지를 실현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회찬이 출마한 공직선거 포스터 사진. 왼쪽 위에서부터 2008년 제18대 총선 진보신당 서울 노원병 후보(낙선), 2010년 지방선거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낙선), 2012년 제19대 총선 통합진보당 서울 노원병 후보(당선, 2013년 '삼성 X파일 떡값검사' 실명 공개 혐의 의원직 상실), 아랫줄 왼쪽부터 2014년 7·30 재보궐선거 정의당 서울 동작을 후보(낙선), 2016년 제20대 총선 정의당 경남 창원 성산(당선). 2004년 17대 총선 제외하고 5차례 출마한 선거에서 모두 똑같은 사진을 사용했다. ⓒ 선거정보도서관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정치에 대해 이런 말을 나눈다.

"정치의 매력은 권력 의지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길이지요.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총화에 의해 가능하지만 이를 실현시키는 것은 결국 권력입니다. 따라서 사상과 철학에 조응하는 권력 획득 방식도 연구, 분석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정치란 곧 권력획득을 위한 실전의 장입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38; 139쪽).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선 권력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한다.

"정치와 정당은 선거에 나가 권력을 추구한다. '우리가 하면 더 잘살 수 있다. 더 깨끗하게 하겠다.' 이렇게 나가야지, '나는 권력욕이 없습니다.'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왜 권력욕이 없어? 권력욕이 없으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지."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84쪽)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④] 정치전략 - 거대한 소수, 진보의 세속화(6월 19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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