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6 09:23최종 업데이트 20.06.1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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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7일 민주노동당 대선경선 노회찬 후보 선본 출범식 사진. ⓒ 노회찬재단


'세상 속으로' 들어온 노회찬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80년대 혁명을 꿈꾼 '반체제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가 '제대로 된 진보정당 건설'을 평생의 목표로 한, '체제내 진보정치가'의 삶을 살게 된다. 노회찬은 합법적인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을 설계하고 개척해나간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노회찬은 1987년 이후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바꿔야 하며,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즉, "①6월항쟁으로 인한 군부독재세력의 퇴각과 민주화의 진전과 ②노동운동의 고양, ③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의 정세 변화는 각각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대중정당, 교조적 사회주의를 배제하며 이데올로기적 개방을 정치지형으로 하는 진보정당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노회찬, '진보정당 건설과 한국의 노동운동', 영국 옥스퍼드대 코리아포럼 주제발표문, 1996.5.30.)
 

1996년 5월 30일, 노회찬이 영국 옥스퍼드대 코리아포럼에서 주제발표한 '진보정당 건설과 한국의 노동운동'. ⓒ 노회찬재단

 
2004년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12쪽).

정운영 : "노동운동가에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 사정을 들려주시지요."
노회찬 : "예정된 수순입니다. 한편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성장, 다른 한편으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지배력 확장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대중운동'과 합법적 '정당운동'이란 양 날개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이 지체된 정치운동의 세력화를 추진함에 따라 민주노동당 창당도 이뤄진 것입니다. 1987년 이래 진보정당운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라 판단했고, 1992년 출소 이래 이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2010년 홍세화와의 대화에선 이렇게 답한다(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389~390쪽).

"왜 정당이냐, 왜 다른 운동을 하지 않고 정당운동을 택했느냐. 진보적 세상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을 것이고, 하나의 길만 거기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 텐데 왜 정당의 방식으로 그걸 이루려고 하느냐.

거칠게 말하자면, 저는 존재의 조건을 바꾸는데 가장 유력한 수단은 권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물론 전제해 두고 싶은 것은, 저는 정치가 정당정치만으로 국한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제반 모순들이 심화되고 방치되어 온 데에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반영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갈 수 있는 정당정치의 정립이 지체되어 온 것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회가 극심하게 양극화되고 이른바 20:80의 사회로 정초되고 있는데, 한국의 정당정치는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적 성격을 갖는 양당구조에 의해 유지되어왔다는 것은 분명 기형적인 것입니다. 비단 중앙권력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이 기형성은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는 이 권력의 기형적 독과점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결한 운동가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때를 묻히더라도 민중의 삶을 반 발짝이나마 전진시킬 정치가의 길을 택한" 노회찬(<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4쪽). 이에 대해 <시사IN>의 천관율 기자는 "노회찬은 생애 내내 진보적 이상과 현실주의가 만날 접점을 탐색하는 탐험가"(<시사IN>, 568호, 2018.8.6)였다고 묘사한다. 

87년 민주화와 87년 대선, 인민노련의 '민주연립정부' 제안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 등 정치적 개방이 이뤄지게 된다. 노회찬에게 1987년은 "이제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해"이자 민주화로 인해 "사실상 진보정당도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해였다. "오랜 기간의 독재정치 하에서 민주주의가 신음하고 있을 때 진보정당도 역시 발을 붙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 기억에 따르면 1985년 이른바 유화국면이 시작되었을 때 처음으로 진보정당 얘기가 나왔습니다. 당시에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이런 어떤 진보정당이 한국의 민주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했지만 또 그러한 근본적인 변혁을 또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그런 진보정당의 필요성 이런 것들이 얘기되고 있었습니다. 

... 진보정당 건설이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계획으로서 고민하게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987년의 6월 항쟁과 뒤이어서 온 87년 7월~9월의 노동자대투쟁 때문입니다. ... 분명한 것은 1987년이 한국 진보정당의 새로운 출발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이죠." (<폴리뉴스>,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2009.5.)


87년 6월과 그 이후 정국에 대해 인민노련 기관지 <정세와 실천> 1호(1987.8.27.)와 2호(1987.10.18)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6월투쟁은 민중의 민주화 투쟁이 혁명적 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었으며 6.29는 그 첫 승리이다. 그러나 6월투쟁은 명확한 대안과 방향을 갖춘 조직적 구심을 중심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진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진다." (<정세와 실천> 1호)

"6.29 전까지의 정치투쟁전선이 민주당까지를 포함하고 학생 및 중간층이 중심이 된 반군사독재 세력 대 미제 및 군부독재 사이에 '민주 대 독재'의 대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면, 6.29 이후에는 부르조아 질서 내에서의 권력경쟁의 길이 열리면서 민주당과 중간층이 전선에서 이탈하여 개량의 길로 치닫고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넓어진 계급투쟁의 공간 속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민중이 활발하게 진출하여 신식민지 파쇼권력과 대립해 나가고 있는 바..." (<정세와 실천> 2호)

 

1987년 8월 1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인 4만 여명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남목고개를 넘어 시내로 진출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 이 8.18 대행진은 87년 울산 노동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 제2민주노조운동혁신네트워크

 
노회찬은 1987년 6월에 뒤이은 노동자대투쟁 상황을 '혁명적 상황'처럼 인식하면서 기존의 비공개적이고 은밀하게 추진했던 대중활동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는 지역에 공개활동의 거점을 확보해야 하며, 노동현장에서도 노동조합에 적극 참여하는 활동방식으로 전환하는 방침을 정한다(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22~123쪽).

"7, 8월 대투쟁 때인데, 내가 살아생전에 그런 광경을 보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었죠. 사실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혁명적 상황이 일어난 건데, 우리도 대응을 굉장히 빠르게 잘했어요. ... 7월 중순경에 제가 완전히 비상, 그때 내가 각 지역 책임자들 다 모아놓고 흥분해 가지고 굉장히 장시간 얘기한 게 '이제까지 노동운동은 다 잊어 먹어라, 지금 한 번도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겪지도 못한 새로운 상황에 이미 우린 들어와 있다.'

이제까지 노동운동은 다 비밀리에 접선해 가지고, 그런 게 무의미해지는 전혀 새로운 상황, 그리고 6월항쟁의 성과와 한계 속에서 배제되었던 노동이 들고 있어나는 상황이 왔다는 거죠."


87년 6월 민주항쟁이 6.29선언으로 일단락되고, 7~8월 노동자대투쟁의 열기가 수그러드는 가운데 인민노련은 두 개의 선거를 맞게 된다. 13대 대선(1987.12.16.)과 13대 총선(1988.4.26.)이 그것이다. 두 선거 모두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과정에서 치러지는 선거가 민주화 이후 전개되는 정치의 '기초를 만들기'(found) 때문이다.
 

1987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벽보. ⓒ 선거정보도서관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인민노련의 전술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범민주 과도정부 쟁취투쟁론'으로, 전두환과 노태우의 즉각 퇴진 요구와 그 대안으로서 범민주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대중투쟁을 하반기 투쟁 전술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 선거참여론'으로 대선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물리적 대결이 전면적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선거가 대중의 관심의 초점이 될 것이며 따라서 범민주 과도정부를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후 인민노련은 과도정부 슬로건의 폐기를 확정한 후 적극적 선거참여론의 입장이 독자후보 출마론으로 발전한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기사연 리포트 5) 대통령 선거투쟁: 민족민주운동의 논리와 실천>, 민중사, 1988. 121쪽).

1987년 10월 2박 3일의 대의원대회 결정에 기초해 인민노련은 백기완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해 대통령선거에 임하면서, '민주연립정부(민연정) 구성'이라는 연정안을 갖고 양김 후보단일화를 추진한다.

'민주연립정부 제안의 정치적 의의와 중요성'(1987.11.26.)이라는 문건을 통해 인민노련은 민주연립정부안이야말로 강력한 차기 민주정부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노태우의 집권을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하고 폭로의 중심을 양김씨의 환상, 즉 한 계파의 힘만으로 집권할 수 있다는 환상, 그리고 한 계파만의 힘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환상을 폭로하는데 맞춰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민주연립정부 주장의 배경과 관련해서 인민노련은 <노동자의 길> 10호(1987.12.5.)를 통해 ①양김씨는 전 민중의 군부독재 종식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고, ②양김씨가 집권욕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전 민주세력을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민주연립정부 수립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민주연립정부의 구성 방법으로 종래의 양김씨 중심의 연립정부안이 아니라 민중이 주체로 나선 민주연립정부안이 가장 타당하다고 밝히고 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기사연 리포트 5) 대통령 선거투쟁: 민족민주운동의 논리와 실천>, 민중사, 1988. 128쪽).

이런 맥락에서 10월 18일 인민노련은 '10월 13일자 민통련의 김대중 지지선언은 명백한 정치적 과오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한다(민통련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다).

"민통련의 10월 13일 선언은 최근 김영삼의 우익군부에 대한 투항적 굴복과 민중에 대한 배신적 언행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의미를 갖고는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서는 가장 잘못된, 졸렬한 방법이다. 김영삼의 배반적 행위에 대해서는 그 자체를 엄중히 경고하고 비판하여야 하며 그것을 김대중에 대한 지지로 대신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김대중과 김영삼의 차이는 실로 사소하지만 김영삼, 김대중 등 자유주의 부르조아당과 민족민주운동과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민통련에 대해 먼저 10월 13일의 김대중 지지선언을 번복, 파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근간의 전술과 노선의 근본적인 오류를 각성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민통련에 대한 우리의 지지, 신뢰와 기대는 철회되지 않을 수 없다." (인민노련, <정세와 실천> 2호, 1987.10.29.)

 

1987년 감옥 출소 후 노동자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중년의 백기완이 대학로를 가득 메운 인파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결국 민주연립정부 구성과 후보단일화는 양김씨 특히 김대중 후보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11월 27일 발족한 '민중대표 백(기완) 선생 선거운동 전국본부'(백선본)는 김대중의 민연정 제안 수용 거부 이유에 대해, "김대중씨는 민통련과 운동권 일부의 지지를 전체 운동권의 지지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4파전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 후보측이 동원한 20만 정도의 군중을 가지고는 그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라고 말한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기사연 리포트 5) 대통령 선거투쟁: 민족민주운동의 논리와 실천>, 민중사, 1988. 140쪽).

12월 13일 백기완 후보의 최종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백선본 중앙위원회가 소집, 선택적 제휴론(김영삼 거명론, 김대중 거명론)과 중립사퇴론, 표대결론 등 장시간 격론을 벌인다. 당시 상황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

"다수는 사퇴하는 게 맞다고 봤고 소수는 사퇴하면 안 된다고 봤던 것이죠. 그러니까 완전히 일치를 본 건 아니지만은 다수의 견해는 사퇴하는 게 맞다고 봤던 것입니다. ... 시대적 명분인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사퇴를 했을 때 그것이 진보정당 동력을 별로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향후에 진보정당 건설에 정치적 명분을 더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그러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폴리뉴스>,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2009.5.).

12월 14일 백기완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이 열리고 이틀 뒤인 12월 16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30여 년이 흐른 2018년 7월 27일 백기완은 1987년 노회찬과의 만남을 기억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

"그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분이 말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르다. 내가 볼 때 노회찬이라고 하는 젊은이는 자기 말하는 것보다도 남의 말을 듣던 사람이다. 자기 말을, 자기 뜻을 늘 관철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하고 남의 뜻하고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했던 젊은이였다."

1988년 13대 총선, <민중의당> 창당과 해산

13대 총선을 앞둔 1988년 3월 6일 백선본에 참여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민중의당'이 창당된다. 정태윤을 대표로 한 이 당은 진보정당의 재개를 알리는 역사적인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민중의당은 당시 진보적 정치역량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진보진영 주류에서는 되레 민중의당을 정세인식의 오류를 범한 '이단아'로 취급했다(이창곤, <한겨레21> 294호, 2000.2.3.). 창당준비위원으로 270여명이 참가했는데 비합법 노동운동계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노련과 제헌의회(CA) 그룹의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이 두 중심축을 형성했다.

진보운동의 새로운 세대가 만든 첫 번째 진보정당이라는 의의를 지닌 민중의당은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최상위의 강령으로 내세웠고, "반세기에 걸친 민중의 반외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계승하여 민중의 민주주의와 조국의 자주화, 통일을 보장할 민주정부의 수립 및 통일된 민주 조국의 건설을 위해 전체 민중의 선두에 서서 민중과 함께 이의 실현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8년 3월 6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열린 민중의당 창당식. ⓒ 연합뉴스

 
선거를 한 달여 앞둔 무렵 인민노련은 <정세와 실천>을 통해 '합법적 민중정당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다(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정세와 실천> 5호, 1988.3.15.).

"선거 보이콧은 혁명의 고양기에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즉 혁명이 고양기에 있지 않은 상황에서의 선거 보이콧은 올바른 전술이 아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을 다가오는 국회의원 총선거에 적용한다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 지금 시기의 쟁점은 ①민족민주운동의 합법투쟁의 주체(민중정당)를 별도로 꾸리고 그 조직(당)이 직접 참여해야 하느냐, 아니면 민족민주운동은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을 지원하면서 거기에서 파생될 '유리한' 공간의 확보만을 노려야 하느냐, ②그리고 민중정당이 선거에 참여하는 데 따르는 제반 정책, 전술에 관한 것이다."


이어 민중정당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①민중정당은 노동자, 농민, 쁘띠부르조아지(신쁘띠부르조아지 포함)의 정당이며, 대중정당이며, 합법정당이며, 민족민주운동의 일부이다. ②민중정당은 주로 합법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민족민주운동의 일부이다. ③기본적으로 민중정당과 민중운동연합은 동일한 대의 하에서 조직되는 것이며, 양 조직간의 주된 차이는 그 구성방식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구성방법의 차이는 민족민주운동이 취해야 할 전술의 비합법적 측면과 합법적 측면에서 비롯된다. 민중정당은 국가기구 내에서 활동해야 하므로 현행 정당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갖추어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양 조직은 민족민주운동의 두 날개이며, 민족민주운동이 제대로 날기 위해서는 두 날개가 다 필요한 것이다. ④합법영역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거나 수정하면서 활동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다. 비합법 영역을 신비화하는 것은 곧바로 합법영역을 개량적인 어떤 것으로 규정하려는 우경적 편향으로 이어진다."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에 16명의 후보를 낸 민중의당은 투표 결과 단 1석의 의석수도 건지지 못하고, 득표수 6만5650표, 득표율 0.33%(출마 지역의 평균 득표율은 4.3%)로, 탄생 50여 일만에 등록 취소된다. 얼마 뒤 민중의당은 '민중정당은 반드시 재건되어야 합니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민중정당재건추진위원회'로 전환한다.

인민노련의 '신노선': "변혁주의 노선과의 결별이자 전면적인 합법정당 노선"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1991.12.15.)를 거쳐 '한국노동당 창준위'(1992.1.19.), 통합민중당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인민노련은 전위정당론을 폐기한다.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와 '진보정치연합'을 거쳐 1997년 국민승리21과 2000년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합법 진보정당운동의 선두에는 인민노련과 '신노선'(문건 이름은 '회사의 노동자정당 건설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1991.9.29.)이 있었다.
 

1991년 9월 29일 발표된 '회사의 노동자정당 건설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문서. ⓒ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구술을 정리한 유경순은 당시 감옥에 있던 노회찬의 생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감옥에서 노회찬은 밖의 사람들이 추진했던 한사노당이 1991년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신노선'으로 전환하면서 한노당을 거쳐 민중당까지의 과정, 그리고 실패의 원인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사회주의 붕괴에 대해서는 현실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시 '신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 그러나 그는 '신노선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 그는 실패의 핵심 문제로 패권적인 시각에서 오만함을 갖지 않았는가를 자문했다. 오만함의 핵심 내용은 '신노선' 전환이 조직형식적인 것에 그치고 운동철학의 내용면에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 '당노선은 폐기하되 전반적인 바탕은 그 당을 가지고 하려던 마인드를 그대로 갖고 있는 거죠.'"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29~130쪽).


'신노선'의 운동사적 의미에 대해 노회찬은 훗날 "변혁주의 노선과의 결별이자 전면적인 합법정당 노선"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회고한다.

"1980년대를 지배해온 것은 혁명만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헌법 개정으로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창출하게 되었다.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이 보장된 이상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여기에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론도 설득력과 함께 하기 힘든 것처럼 현실의 근거를 상실하였다. 활동노선과 전략의 근본적 재검토가 시급했다. 신노선은 불가피했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02쪽)


정치학자 김윤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은 인민노련의 신노선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1990년대에 들어 한국의 진보정치 세력은 정당관에서 커다란 변화를 보여준다. 그 변화의 선봉에 선 것은 인민노련이었다. 인민노련은 '한사노'(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를 거쳐 한국노동당 창당-민중당 합류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인민노련은 전위정당론을 폐기한다. 이른바 '신노선'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현재의 진보정당들은-통합진보당 주류파를 제외하고는-이 신노선에 기반해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진보정치 세력, 진보정당을 대표한 민주노동당은 전위정당 노선을 폐기한 합법적-진보적 대중정당 노선에 바탕해 있는 것이다."(김윤철, 1980년대 한국 진보정치 세력의 정당관: '보수야당 비판론'과 '전위정당론'을 중심으로, 한국외대 비교민주주의센터, <비교민주주의연구> 13권 1호, 2017.6.)


1991년 12월 15일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약칭 노정추)가 결성됐고, 이것은 한국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진다. 1992년 1월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 본관 3층 대서양홀. 발기인과 참관인 등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노동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위원장 주대환)가 공식 발족한다.
 

1991년 12월 16일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당시 모습. ⓒ 노동자역사 한내

  

노회찬이 청주교도소 수감 중이었던 1992년 1월 13일, 한국노동당 창당발기인대회를 축하하며 보낸 편지글. ⓒ 노회찬재단

 
"'한국노동당' 만세!"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노회찬은 옥중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여러 갈래의 시냇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듯, 이제 노동자정당 건설운동은 저 거친 광야에서 하나의 강물로 만나 도도히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노동당'의 앞길엔 우리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곤란과 어려움만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태산을 만나면 휘감아 돌아가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되어 떨어지면서 거센 장강의 물결로 기어이 민중의 바다에 도달하게 될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한국노동당' 만세!

1992년 1월 13일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 올림"


훗날 노회찬은 인민노련의 활동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종합평가로 이런 구술을 남긴다(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34~135쪽)

"인민노련은 어차피 역사적 조건과 한계 속에서 움직이는 거니까, 좀 대중성을 가지면서 과학적 운동을 하려고 시도했던 몸부림이고, 87년 노동운동을 만들어가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특히 노동운동이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하는 데 의의가 컸다고 보고. 결국에 오늘날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진보정치세력의 80년대 차원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할이 인민노련의 공도 있고. 저보고 얘기하라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진보, 또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진보정치세력 구축의 이론적·물질적 그리고 조직적 기초를 이뤄낸 점을 평가하고 싶어요."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던 계절... 여기서 멈출 순 없다"
 

1992년 1월 19일, 한국노동당 창당 발기인 대회 당시 모습. ⓒ 연합뉴스

 
'신노선'(1991.9.29.),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1991.12.15.), '한국노동당 창준위'(1992.1.19.), '통합민중당' 창당,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노회찬은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못한다. 1989년 12월 23일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돼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할 때까지 치안본부 홍제동분실,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를 전전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혁명을 꿈꾼 반체제 노동운동가'의 삶을 산 노회찬은 출소 이후 '87년 민주화'의 격랑과 소련과 동유럽 등 '현존 국가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충격을 목도하면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 건설'을 평생의 목표로 한 '체제내 진보정당 정치가'의 삶을 살게 된다.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를 만기출소한 노회찬의,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그해 4월 민중당 해산과 함께 진보정당은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 '진보정당추진위'(진정추)로 남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항해를 떠났다(노회찬, '후기',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283쪽).

노회찬은 당시 진보정당 운동의 실패 원인에 대해 정리한 뒤, 시간을 충분히 갖고서 진보정당 건설에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하자는 입장을 택한다.

"나는 진보정당 운동의 실패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이를 해소해야만 재창당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첫째 이른바 독자 후보와 비판적 지지 등으로 나눠진 재야 운동 진영의 분열을 극복하고, 둘째 전노협과 업종회의 등 민주노조들이 공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참가하며, 셋째 신생 진보정당의 진출을 가로막는 선거법을 비롯한 각종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1996년의 총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1997년 대선에 참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정당의 재창당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요인들에 대해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15쪽)


"민중당이 해산된 뒤에 진보정당운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서 사실은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일부 좀 상층명망가들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더 이상 힘들다고 하면서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이우재 이런 분들은 이제 다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남은 사람들 상대적으로 좀 연령도 좀 아래인 지역에 이렇게 있는 이런 분들은 진보정당운동을 계속 하자라고 해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내에서는 민중당 해산 이후에 즉각적인 진보정당 재건론과 그다음에 좀 이렇게 시간을 갖고서 준비를 더 하자라는 그런 견해로 나뉘어졌고 당시 저는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순 없다, 민중의당부터 민중당까지 실패한 그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해내고 실패에 이르게 됐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다시 당을 건설하는데 급급해 한다면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진보정당에 더 나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서 시간을 충분히 갖고서 이 진보정당 건설에 장애물을 좀 제거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하자, 이런 입장을 택했습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노회찬① 진보정당의 태동과 수난, 2009.5.4.).

 

1992년 6월 27일 진정추 제1차 정기대의원대회. ⓒ 노회찬재단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패배로 민중당의 해산된 후 4년만에 실시된 1996년 제15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은 재건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이 떠나갔지만, 노회찬은 계속 달렸다. 노회찬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참 어려웠다. 새로운 역에 도착할 때마다 많은 동료들이 하차했다. 장기전을 유지해온 동력은 맨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정신과 의지와 열정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출발할 때 나를 이끌었던 그 기관차를 타고 계속 달렸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54쪽)

"사실 진보정당 가지고 제일 고생한 사람 중에 하나가 저일 겁니다. 당은 2000년에 만들어졌지만, 본격적으로는 92년부터 시작했고, 그전부터 따지면 88년부터 이 작업을 해왔던 것인데 초기에 얼마나 멸시와 천대를 받았나. 특히 우리에게 제일 괴로웠던 것은 같은 운동진영에서 보여준 냉소와 비판이었죠.

민주정부 세워야 되는데 쟤들 뭐하는 짓이냐는 시각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과도하게 짓밟혔던 것이죠. 92년에 제가 진정추 처음 할 때 중앙당에 상근자가 열다섯 명인가 됐었어요. 정말 깃발 하나 들고 나중에는 옮기다 옮기다가 강서구까지 사무실이 옮겨갔죠." (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29쪽)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민중의당, 민중당의 실패를 거치며 진보정당운동의 첫 겨울로 접어들던 때였다. 겨울은 예상보다 길었고 추위는 혹독했다. 진보정당 창당 전망이 멀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생활로 돌아가거나 다른 현장으로 옮아갔다.

50명에 이르던 중앙 상근자는 두 명으로까지 줄기도 했다. 실로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던 계절이었다." (노회찬, '발간사: 누가 그의 청춘이 짧다고 말하는가?', 이재영 지음·이재영추모사업회 엮음,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진보 정책의 아이콘 이재영 유고집 2>, 레디앙/해피스토리, 2013)


1996년 8월 29일 작성한 '여기서 멈출 순 없다'라는 글에서 노회찬(진보정치연합 대표)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진보적인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우리 조직의 핵심적 목표이자 존립근거이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조직의 핵심적인 과제를 단시일 내에 완수할 전망이 불확실한 조건 속에서도 기본노선을 견지하며 조직활동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활동을 중단하고 조직을 해산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지난 상반기의 조직진로 논의과정에서 나타난 다수 회원 동지들의 견해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본' 노회찬의 꿈과 길 ③-2] 조봉암 다음을 꼽으라면 노회찬, 왜냐면 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조현연씨는 노회찬재단 특임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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