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7 12:48최종 업데이트 20.05.2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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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 1면.

 
우리의 현충일 격인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는 매년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다. 캠핑을 비롯한 아웃도어 스포츠가 시작된다는 그 연휴의 첫날, <뉴욕타임스> 1면은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노엘 신키엣, 64세, 메릴랜드, 은퇴를 계획하던 간호사
알란 메릴, 69세, 뉴욕시, "I Love Rock'n'Roll" 송라이터
케네트 사운데즈, 43, 조지아, 손님들에게 항상 친절했던 매니저
조셉 야기, 65, 인디애나, 수많은 사람들의 멘토 겸 친구
폴 마티네즈, 70, 캘리포니아, 로스 엔젤레스 스포츠 팬
마셀 수메그레드, 64, 오하이오, 동네 산책을 즐기던 이.
베리 웨버, 67, 뉴욕시, 코비드-19 환자 치료를 자원했던 의사...

1000여 명의 부고 주인공들은 전쟁터에서 숨을 거둔 전사자가 아니라 지난 석 달 사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은 미국인들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중에서 추려낸 1%의 숫자이다. 그래미상 수상자나 저명한 저널리스트도 있지만, 절대 다수는 우리 주변에서 같이 울고 웃던 평범한 이웃들이다.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란 타이틀 아래 한 줄의 사연과 이름, 나이, 지역이 나온 이 그래픽은 남은 이들에게 보내는 섬뜩한 오비추어리(Obituary, 부고 기사)다.
 
"전쟁과 허리케인, 땅이 꺼질 듯 절망적인 테러를 겪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기운을 다시금 북돋을 방법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없습니다."

뉴욕타임스 온라인 사이트엔 미국 내 코로나바이러스 첫 사망자로 뒤늦게 판명된 실리콘 밸리의 직원 패트리카 도우라는 여성을 시작으로 신문이 인쇄된 5월 22일까지 확인된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적혀 있다.

9만6011명. 9.11테러 희생자 수는 물론이고 베트남전 전사자수 5만8000명도 이미 4월 말에 넘겼다. 메모리얼 데이는 나라를 위한 희생을 칭송하고 조국 아메리카에 대한 애국을 논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예년과는 너무도 다른 살벌한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신문은 숫자로 그 비극을 담담히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미국인들은 알고 있다. 사망자는 곧 10만 명을 넘어설 것이고 그 그래프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국가는 개인에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어떡하든 각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래프에 강제로 문을 닫은 가게들의 원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에 흔들리는 여론은 오늘 메모리얼 데이를 기점으로 서서히 경제 재개를 선언하고 있다. 사망자수 10만 명을 앞둔 미국의 현실이다.

총 들고 극렬시위... 이건 광기라고밖에
 

텍사스 주정부와 달라스 행정당국의 코로나 19 방역 지침을 어기고 미용실 문을 열어 유명세를 얻은 셸리 루서. ⓒ 연합뉴스/AP

 
최근 공화당 대선 경선자이자 텍사스주의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가 미용실에서 트윗을 올렸다.
 
"3개월 만에 이발을 할 수 있게 해준 셸리 루서와 살롱 스텝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은 자유와 상식을 위해 일어선 이들입니다. 여러분의 용기로 더 많은 텍사스 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상원의원이 감사를 표한 이는 텍사스 달라스에 있는 '라 모드' 미용실 원장이다. 셧다운이 진행된 와중에 유명해진 여성이다.

그녀는 텍사스 주정부와 달라스 행정당국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어기고 미용실 문을 열었다. 시정부는 절차에 따라 그녀를 고소했고, 댈러스 법원은 영업정지를 명령하는 명령문을 발송한다.

그런데 지난달 30일 영업 재개를 촉구하는 극렬 시위대들 앞에서 그녀는 그 명령문을 찢어버린다. 7일간의 징역과 3500달러(약 433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았지만 압박 여론 덕분에 이틀만에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조그만 미용실 원장에서 순식간에 재오픈을 염원하는 이들의 상징이 된 순간이다.

이런 '싸움'에 불을 지핀 인물이 이 사태의 최고 책임자인 트럼프 대통령이다.

지난 8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일터로 돌아가길 원하는 많은 사람의 놀라운 대표자"라며 그를 칭송한다. 공화당의 기반이 가장 탄탄한 텍사스 주가 미국에서 가장 먼저 '스테이 엣 홈'(Stay At Home, 외출자제) 명령을 철회하게 된 이유다. 텍사스의 미용실, 이발소, 네일숍은 이미 지난달 30일 문을 열기 시작했고 다른 업소들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한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상원의원은 직접 미용실까지 찾아가 경제 재개를 지지하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극우 공화당 '티파티'의 지원으로 상원에 입성했던 테드 크루즈 의원은 한술 더 떠 테슬라 공장에게도 러브콜을 보낸다. CEO 일론 머스크에게 테슬라 공장을 '자유로운' 텍사스로 이전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테슬라 공장은 지난 9일 공장이 있는 카운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다. 캘리포니아주 공장 가동을 중단하라는 개빈 뉴섬 주지사의 행정명령을 무효로 해달라는 내용이다. 일론 머스크는 미 전역에 시행되는 스테이 엣 홈 등 전염병 예방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파시스트적'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자 재무장관인 스티브 므누신은 방송에 출연해 캘리포니아주가 테슬라 공장 재가동을 위해 협조해야 한다고 압박한다.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장관의 응원까지 더해진 분위기 속에 테슬라 공장은 카운티의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5월 11일부터 재가동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주정부의 명령에 협조해 공장과 가게 문을 닫고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오너들에게 일론 머스크와 트럼프 정부에서 보여주는 시그널은 '카오스'가 되어 버리고 만다. 문을 열어야 할지 지금처럼 계속 닫고 있어야 할지 말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코로나19 정국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의제는 묻혀버렸다. 최근 의회 청문회에선 여러 놀라운 사실들이 나왔다. 정부가 올해 초부터 보고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했고, 아시아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북미 대륙에 상륙하기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재난관리청(FEMA) 같은 연방정부 조직은 초기 잘못된 대응으로 혼란을 야기했고 현재 사망자 2위인 영국과 비교해 3배 넘는 사망자 수를 양산했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국가는 어디에?'란 명제에 연방정부가 대답해야 할 단계였다.

하지만 경제 재개 논란으로 지금의 비극은 '파시스트적'인 주정부의 명령 논란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다연발 총으로 무장한 극우 시위대들은 주정부 청사에 진입해 민주당 주지사에게 '재오픈'을 협박한다. 그 앞을 막아서는 병원 노동자들에게 온갖 욕을 시전한다. 전염병과의 싸움으로도 벅찬 주정부는 정부 지원금을 얻어내기 위해 대통령과 '밀당'을 해야 한다. 거기에 경제 재개를 요구하는 극렬론자들의 압박을 제압해야 하는 삼중고, 사중고에 시달리는 사면초가 형국이 되어 버렸다.

대책 없는 경제 재개 확산... 할 수 있는 건 기도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시간주의 포드 자동차 로슨빌 부품공장을 시찰하며 얼굴 가리개를 들어보고 있다. ⓒ 연합뉴스/AP

 
이런 상황에서 지난 1일 텍사스 주는 가장 먼저 '리오프닝'을 시작했다. 상원의원부터 주지사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이들로 구성된 까닭이다. 하지만 재오픈 후 발표된 수치는 녹록지 않은 상황을 나타낸다. 경제 재개 보름 후,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팬데믹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미국 대부분의 주가 전면적 또는 단계적 경제 재개에 나섰다. 연방정부와 가장 대립하는 모양새였던 뉴욕주의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도 24일부터 뉴욕 일대 해수욕장 재개장을 알렸다.

3월 초 트럼프 대통령은 공언했다. "미국인들은 위험성이 낮다. 국가가 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지만 그 이후 모든 상황은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진행됐고 그의 골프장 출입은 3월 8일이 마지막이었다. 

콜롬비아대 연구팀은 그가 마지막으로 골프를 쳤던 날짜에 주목한다. 대통령이 위험성을 간과하지 않고 일주일 일찍 '스테이 엣 홈' 명령을 시작했다면, 약 3만 6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2주 전인 3월 1일에 시작했다면 5만4000명이 더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주말, <뉴욕타임스> 1면을 채운 사망자수의 83%에 달하는 숫자다. 바꿔 말해 정부가 좀 더 민첩하게 행동했더라면 그 사람들은 우리 곁에서 울고 웃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지난 22일에는 '귀한' 사진 한장이 유출됐다. 하루 전 포드 자동차 공장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진이었다. 기자들이 보지 않는 공장 뒤편에서 우연히 찍힌 것이다. 애리조나 공장에서 고글을 쓴 모습까진 보여줬지만 마스크를 쓴 모습은 절대 볼 수 없었다. 현장에서 한 기자가 공개된 장소에서 왜 마스크를 쓰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언론이 그걸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지 않아서."

대통령의 '노 마스크' 고집은 경제 봉쇄를 풀고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통령도 쓰지 않은 마스크를 지지자들이 쓸 리 없다. 그래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마스크는 약하고 겁 많은 '루저'의 상징이 되었다. 덕분에 미국은 가장 손쉽게 감염을 막을 수 있는 큰 고리 하나를 놓쳐 버렸다.

메모리얼 데이를 기점으로 미국 각 주들의 본격적인 경제 재개가 시작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어디선가 감염되고 앓다가 전염시키고 죽는다. 사망자수가 늘어날수록 사망자라는 숫자는 더 둔감해질 것 같다. 단 두 달만에 소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는데도 무감각한 것처럼. 세상을 떠난 이들이 신문 1면에 빼곡한데도 무덤덤한 것처럼 말이다.

그 사이에 가장 힘들고 험하고 어려운 전선에선 여전히 전염병과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내 앞에 그 죽음이 닥쳐올 때까지 이 광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섭다. 메모리얼 데이, 미국이란 나라를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치며 싸웠던 이들에게 지금의 미국은 과연 자랑스러운 나라일까 궁금하다. 나직이 읊어본다. God Bless America(미국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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