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숱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번 봐서 나쁠 것 없다'며 지인들에게 추천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지난 4월 넷플릭스가 공개한 오리지널 영화 <특종의 탄생>도 그런 작품이다. 영화는 2019년 8월, 영국의 앤드류 왕자의 성 추문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를 배경으로 삼는다. 당시 앤드류 왕자는 그를 둘러싼 의혹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BBC와의 독점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특종의 탄생>은 이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고군분투했던 기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인터뷰의 여파를 다룬다.
 
 영화 <특종의 탄생> 공식 포스터

영화 <특종의 탄생> 공식 포스터 ⓒ 넷플릭스

 
'선택과 집중' 부족했던 인물 배치

영화가 서사적으로 집중하는 인물은 빌리 파이퍼가 분한 '샘'이다. 실존하던 BBC 프로듀서 '샘 맥알리스터'를 모델로 삼은 이 캐릭터는 방송국 내에서도 '너무 튄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방송 밖에서는 일 때문에 자식과 자주 만나지 못해 자책하는 인물이다. 보통 영화였다면 '주인공'으로 삼았을만한 인물이다.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샘은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을 무찌르고, 끝에 이르러서는 자신감 있는 인물로 변모했어야 한다. 하지만 <특종의 탄생>은 관객이 샘의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할 무렵,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한다.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하는 인물은 수석 앵커 '에밀리'다. 그는 샘이 천신만고 끝에 잡아 온 앤드류 왕자와의 인터뷰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실제 앤드류 왕자와 만났을 때는 성 추문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추궁하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도록 만드는 노련함도 보인다. <더 크라운>, 그리고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등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명배우 질리언 앤더슨이 연기한 에밀리는 가차 없는 프로 인터뷰어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불륜 스캔들에 휘말려 고통받았던 비서 모니카 르윈스키를 지켜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등, 입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샘과 에밀리 모두 훌륭한 캐릭터이며,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인물들도 아니다. 앤드류 왕자가 사실상의 자백을 늘어놓은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훈훈한 모습도 연출한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의 초중반부를 샘에게, 중후반부를 에밀리에게 할애하는 바람에 서로의 존재감을 희석하는 악효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실제 사건을 각색해서라도 두 인물이 기계적 균형 대신 유기적 케미스트리를 갖게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영화 <특종의 탄생> 스틸컷

영화 <특종의 탄생> 스틸컷 ⓒ 넷플릭스

 
부족했던 극적 상상력

<특종의 탄생>을 관통하는 또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바로 전개 속도다. 영화는 샘이 앤드류 왕자의 비서에게 접근해 그의 신뢰를 얻는 과정까지는 상당히 느리게 이어지다가, 앤드류 왕자에게 미성년자 성 상납을 제공했던 제프리 앱스타인이 체포되면서 긴박하게 돌아간다. 샘과 BBC가 앤드류 왕자의 독점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발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빠른 박자로 흘러가던 사건은 갑자기 앤드류 왕자가 제안한 '70시간 후 인터뷰'에 가로막힌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70시간을 통째로 들어낼 수도 있었고, 치밀하게 편집하여 호흡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등장인물들이 그 시간 동안 여유를 가지는 장면도 지나치게 많이 포함되면서 영화는 다시 늘어지고야 만다.
 
영화의 기반이 된 사건이 실존하는 만큼 그 시간표를 따라간 것은 책임감 있는 선택이었지만, 관객을 몰입의 세계로 끌어들이기에는 부족했다. 이처럼 각색이 유난히 적은 <특종의 탄생>의 단점은 마지막까지도 두드러지는데, 에밀리와 앤드류가 대담을 나누는 장면은 실제 인터뷰와 소름 끼칠 정도의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영화가 아니라 재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다.
 
실화 기반의 영화에도 긴박한 전개나 드라마가 끼어들 틈은 언제나 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맡은 영화 <스펜서>는 자칫 늘어질 수 있었던 다이애나의 내면 묘사를 숨 막힐 정도로 흡인력 있게 그려냈고, 샤를리즈 테론과 마고 로비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미투운동 직전의 폭스뉴스 고발 사태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리듬감 있는 전개를 놓치지 않았다. <특종의 탄생>이 다룬 제프리 앱스타인, 앤드류 왕자 논란이 워낙 화제였던 만큼 보다 정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은 이해되지만, 그로 인해 엉망이 된 전개 속도가 아쉬운 이유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스틸컷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스틸컷 ⓒ 라이언스게이트

 
모든 단점 잊게 만들어 준 '마지막 한 방'

영화는 에밀리와 앤드류가 나눈 대담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전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앤드류 왕자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의혹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일관된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지나치게 어색한 태도와 명확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 에밀리의 질문으로 인해 대중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영화가 다룬 이 사건은 실제로 벌어진 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았고,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종종 회자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화가 조금 성급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특종의 탄생>은 굳이 이 사건을 극화하기로 한 이유를 작중의 대사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시간, 항상 시간이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거든."

영화 내에서 주된 쟁점이 되는 것 역시, 2006년 유죄 판결을 받은 아동성범죄자 제프리 앱스타인과 앤드류 왕자의 우정이 어째서 2010년까지 지속되었는지다. 이미 형을 복역하고 나온 앱스타인에게 사람들은 더 이상 관심이 없었고, 이 빈틈을 이용해 앤드류 왕자와 앱스타인은 끔찍한 범죄를 계속해서 저질러 왔던 것이다. '시간의 힘'을 믿으면서. <특종의 탄생> 제작진이 영화화를 결심한 이유에도 영화사에 남을 걸작을 만들겠다는 마음보다는, 대중에게서 이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덧붙여, <특종의 탄생>은 해당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또 하나의 올바른 선택을 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앱스타인-앤드류 논란이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때문에 일어났으니, 사건의 '끔찍함'을 묘사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선정적인 장면을 넣을 수도 있었다.

파멜라 앤더슨의 섹스테이프 유출 사건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다루어 비판받은 드라마 <팸 & 토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피해자를 위한다고 만든 극들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 더 상처를 내는 비극은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특종의 탄생>은 피해자가 당한 범죄의 끔찍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버스 앞자리에서 장난치는 10대 소년·소녀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심각성을 관객이 체감하게 했다. 노골적이지 않은 직시, 그리고 상식에 기반한 정론이 바로 <특종의 탄생>이 지닌 무기였다.
 
이처럼, <특종의 탄생>은 인물 배치나 전개 속도 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존재했지만, 영화를 만든 의의까지 퇴색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진중하게 다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등 문제적으로 느껴질 요소를 포함하지도 않았다. 영화 속 BBC의 언론인들처럼 정도(正道)를 걸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과 배우들의 열연은, 그야말로 '한 번 봐서 나쁘지 않을' 넷플릭스 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특종의 탄생>이 가진 '마지막 한 방'은 사건을 다룬 진중한 자세 그 자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보 과잉 시대에 깊이 있는 저널리즘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이러한 실화 기반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를 되새겨 주는 샘의 대사를 인용해 본다.
 
"텔레비전 방송 1시간이면 모든 걸 바꿀 수 있거든."
영화 특종의탄생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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