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파악하고 활용할 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않을까. 이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AI의 영역은 어디까지 확장될까.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작업이나 데이터 작업 등을 넘어, 이제는 방송국 PD까지 AI로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지난 2월 27일 첫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 < PD가 사라졌다! >는 MBC에 입사한 AI(인공지능) PD '엠파고'가 처음으로 연출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방송에서 '엠파고'는 출연자 섭외부터 게임 진행, 촬영분 편집, 출연료 산정까지 PD가 하는 대부분의 역할을 모두 담당했다.

코미디언 김영철, 래퍼 윤비, 걸그룹 블랙스완 멤버 파투, 리포터 이라경, 유튜버 힘의길 등 다양한 직업군, 독특한 이력의 출연진들을 섭외했고, 출연자들은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AI PD를 처음엔 낯설게 느끼고 혼란스러워 했지만 점차 AI PD를 따르기 시작했다. 3부작으로 마무리된 < PD가 사라졌다! >의 최민근 PD를 지난 13일 유선 상으로 만났다.
 
 MBC < PD가 사라졌다! > 최민근 PD(왼쪽).

MBC < PD가 사라졌다! > 최민근 PD(왼쪽). ⓒ mbc

 
"챗GPT가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 보고 충격"

AI에게 연출을 맡긴다는 특이하고 놀라운 기획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다. 최 PD는 "기획안을 여러 곳에 제출했는데 모두 거절 당했다"며 "마지막으로 한국전파진흥협회에서 기획안이 채택되면서, 과기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제작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 PD가 사라졌다! > 기획은 지난해 5월 출시되면서 AI 열풍을 몰고왔던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챗GPT'에서부터 시작됐다. 최민근 PD는 2020년 11월 '챗GPT'의 베타 버전이 공개되었을 때부터 서비스를 이용하며 관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챗GPT가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오류도 많고 잘못된 정보도 있었지만, 사람과 소통을 한다는 게 충격적이었고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그 속도도 너무 빨랐고. 저와 대화하면서 제게 맞춰지는 부분들을 확인하면서, 연출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지난해 챗GPT 기술 수준으로도 기획하고 제작하고 연출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예측불허겠지만 던져보고 싶어서 시도하게 됐다."

프로그램 제목은 'PD가 사라졌다'이지만, 실제로 이 프로그램엔 인간 PD가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역할은 모두 AI PD가 직접 했다고. 최 PD는 "출연자 캐스팅을 하고 미션을 정하고 프로그램의 구성을 짜는 것은 예능 PD의 주요 업무다. 이걸 모두 AI PD에게 맡겼다. '엠파고'가 PD의 주요 역할을 다 하고 저는 보조적인 역할만 한 셈"이라며 "AI PD와는 아직 텍스트로만 소통이 가능하다. 출연자들이 말하거나 질문을 할 때 '엠파고'에게 텍스트로 입력을 해줘야 한다. 저희는 그 프롬프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AI를 활용한 것은 PD 역할뿐만이 아니다. 촬영 역시 AI 탑재 신기능 'PTZ' 카메라를 활용했다. 사람, 사물을 인식하고 팬(P), 틸트(T), 줌인(Z)을 스스로 조절하는 초고화질 AI 카메라는 출연자들의 움직임을 알아서 촬영한다. 최 PD는 "(PTZ) 카메라 4대를 한 분이 조정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 카메라 감독님들이 계셨지만 카메라 감독님 반, AI 탑재 카메라 반 정도로 촬영을 했다"고 전했다.

또한 방송에 사용된 음향 역시 AI의 도움을 얻었다. 최 PD는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사람이 작곡한 것 반, AI 반 정도로 작업을 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AI 음악은 많이 사용된다"며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이 할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 프로그램엔 작가가 없었다. 작가가 하는 일이 리서치 하고 정리하고 그걸 토대로 기획하고 구성하는건데, 이건 AI가 훨씬 잘 한다"고 강조했다.

"스튜디오 상황 밖에서 지켜보며 답답했지만..."
 
 MBC < PD가 사라졌다 > 스틸 이미지

MBC < PD가 사라졌다 > 스틸 이미지 ⓒ MBC

 
방송에서 출연자들은 큐브 형태의 실내 스튜디오에서 커다란 화면 속 PD와 소통하며, 그가 주문하는 대로 게임을 하고 미션을 수행했다. AI PD가 '음악과 칭찬의 페스티벌', '지구력 얼음땡 게임' 등 기존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적 없는 게임을 주문하자 출연자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기도 한다. 또 AI PD의 이해할 수 없는 지시에 출연자들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 "차라리 게임을 망쳐보자"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최민근 PD도 스튜디오 밖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촬영에 개입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야 했단다.

"개입에 대한 욕망을 참느라고, 같이 준비했던 프로듀서 3명이서 두 손 꼭 잡고 있었다. 캐스팅부터 우려가 됐고, 예상보다 훨씬 범상치 않은 미션이 나왔다. AI의 가장 큰 특징은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던져도 매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했는데 시뮬레이션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제작진이 개입을 하면, AI가 연출한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끝까지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트장 역시 정육면체로 밀폐된 공간이라, 촬영이 끝날 때까지 출연자들은 제작진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AI PD에게만 몰입하게 만들기 위한 세트였다."

AI PD는 매 미션이 끝날 때마다 곧바로 촬영분을 빠른 속도로 편집해 출연자들에게 보여준다. 최 PD는 "2시간 정도 촬영을 하면 8분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을 만드는데, 그걸 8분 안에 해내더라. 물론 사람처럼 편집을 한 건 아니다. 방송에 나온 건 다 인간 PD가 편집한 것이다. 하지만 기본 이상은 하고 그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빠르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어 그는 머지 않은 시기에 AI PD에게 편집을 맡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를 들어, 관찰 예능을 촬영하면 카메라도 많이 쓰고 (녹화) 분량이 엄청 많다. 비디오 파일을 편집에 맞는 형태로 바꾸는 '인제스트' 작업부터, 오디오와 싱크를 맞추고 필요 없는 부분 덜어내고 시간 순서에 맞게 조정하는 과정만 해도 일주일은 걸린다. 그런 것들은 지금도 AI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더 학습을 하고 데이터가 쌓인다면 인간 PD 못지 않게 편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조금만 수정하면 되는 식일테니, 아마 인력도 엄청나게 줄어들지 않을까. 지금은 근로시간 문제로 인해 위클리 예능 프로그램에 PD가 10명, 15명 정도 된다. 그 인력이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출연료는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장치 중 하나였다. AI PD는 전체 출연자들(총 10명)의 출연료를 도합 100만 원(첫번째 회차), 1000만 원(두번째 회차)으로 정하고 이를 각 출연자들의 방송 분량에 따라 배분했다. 전체 방송분량의 25%를 차지한 출연자는 250만 원을 가져간다면, 단 5%만 나온 출연자는 50만 원을 가져가는 식이다. 출연자들은 늘어난 분량에 기뻐하기도 하고, 편집 기준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엠파고'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최민근 PD는 출연자들이 AI를 점점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놀라웠다고 털어놨다.

"저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출연자들이 점점 AI PD에게 자의식이 있다고 느끼더라. 그 부분이 소름 돋았다. 'AI에게 바보라고 해서 나는 꼴찌가 됐다'고 말하거나, '건설적인 얘기를 하지 않으면 싫어한다'는 등 이런 얘기를 한다. 아마 AI 편집에는 물리적인 기준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출연자들은 어느 순간 AI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AI에게 바보라고 했던 사람이 방송 분량에서 꼴찌가 되자, 그 말 때문에 꼴찌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회로 끝나긴 했지만, 첫 촬영과 마지막 촬영을 비교해 보면 AI PD를 기계가 아니라 자의식을 가진 상대로 대하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

프로그램 진가 알아본 해외 방송국들
 
 MBC < PD가 사라졌다 > 스틸 이미지

MBC < PD가 사라졌다 > 스틸 이미지 ⓒ MBC

 
다소 난해한 미션과 편집 때문이었을까. 사실 < PD가 사라졌다! >는 국내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최종회 시청률은 0.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으로 아쉬운 마무리를 해야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진가를 알아준 쪽은 해외 방송국들이었다.노르웨이, 덴마크의 대형 제작사와 이미 포맷 판매 옵션계약을 맺었고, 이외에도 여러 국가들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 PD는 "지난해 가을에 트레일러(예고편)를 공개했을 때부터 해외에서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 서러울 정도로 국내 반응은 저조했다. 애초에 제작부터 과기부 지원을 받고 해외 포맷 판매용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레귤러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영문 트레일러를 먼저 만들었다. 외국인들이 봤을 때 새롭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최민근 PD는 처음 AI 연출에 도전한 것이었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고백했다. 특히 빠른 시일 안에 제작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반응을 AI PD에게 알려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고. 최 PD는 "제작 여건상 5일 안에 촬영을 끝내야 했다. 첫 촬영과 두 번째 촬영 사이에 3일 밖에 없었다. 3일 동안 학습하고 진화하면서, 두 번째 촬영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만약 정규 방송으로 매주 찍었다면 지금은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느낄만한 독특한 방송이 나올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청자들이 어떤 걸 재미있어 하는지까지 학습한다면 AI PD 만의 장르가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아쉬워 했다.

'엠파고'에게 연출을 맡겨 보고 함께 방송을 제작하면서 최민근 PD는 AI의 능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PD로서 정리나 구성, 기획력은 너무 뛰어나고 학습 능력도 빠르다. 여기까진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던 창작의 영역까지 너무나도 쉽게 만들어내더라"면서도 "감정적인 교류는 어려운 것 같다. 예를 들어, 출연자들이 갈등하거나 싸울 때 말리지 않고 불구경 하듯이 보고 있는다. 앞으로는 이런 부분도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PD가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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