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이력>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이력>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혜림(정보람 분)은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한다. 성실하고 싹싹한 탓에 동료 직원들에게도 인정받는 직원이다. 어느 날, 마트의 계산대 옆으로 무인 계산대가 설치된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사용하기 어렵고 불편한 기계 대신 사람이 훨씬 낫다고 입을 모으지만 점장은 철회시킬 생각이 없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혼자서 사용하는 걸 편하게 생각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기계를 처음 보는 손님들은 생각보다 사용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 무인 계산대의 출현이 가져온 가장 큰 문제는 함께 일하는 동료 미진 언니가 일자리를 빼앗기게 생겼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다. 영화 <이력>에는 기술이 발전이 누군가의 삶을 배제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키오스크라고 부르는 무인 계산대, 무인 발급기와 같은 기계 장치의 설치와 사용으로 인한 고용 저하 문제다. 예전에는 운영을 위해 두세 사람이 필요했던 일이 이제 한 사람만 써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는 무인점포라고 해서 직원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매장도 심심찮게 늘어나는 상황. 문제는 고용의 측면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기계를 처음 사용하거나 다루기 어려워하는 장년층과 노년층의 경우에는 작동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일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부분이다. 더불어 이승준 감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용과 소비의 측면만이 아닌, 개인의 쓸모와 내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장시킨다.

02.
재취업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엄마 강심의 면접에서도 무인 발급기가 이슈다. 고객들이 몰리는 시간에 무인 발급기를 통해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기계를 써 본 적이 없다. 무인 기계가 마련되어 있더라도 지금까지는 매장 내에 직원이 주문을 받고 결제를 하는 창구가 같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도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마주해서일까? 면접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린 카페 역시 기계로만 운영되는 무인 점포임을 알게 된다. 어느 특정 가게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제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심지어 사람은 한 명도 없이, 기계로만 매장이 스스로.

이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 혜림과 엄마 강심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관계다. 기계를 잘 다룰 줄 알지만 도입을 막을 수 없어 누군가를 지킬 수 없는 쪽과 기계를 잘 다를 줄 모르지만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만 하는 쪽.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각각의 현실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며 기술의 발전이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이 작품의 핵심 내용을 완성해 낸다. 모녀가 이와 같은 모습으로 관계를 형성하게 되리라는 것은 영화의 가장 처음에서 이미 복선처럼 등장한 바 있다. 엄마의 이력서와 증명사진을 두고, 이력서를 출력해서 직접 사진을 붙이라던 혜림과 요즘 누가 그렇게 하냐며 워드 프로그램에 바로 이미지를 넣고 싶어 하던 엄마 강심의 모습을 통해서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이력>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이력>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지금 배워봤자 누가 뽑냐. 어린애들이 훨씬 잘하는구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두 인물의 자리에 놓인 문제도 이 작품에서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장면이다. 영화 바깥의 실제 현실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라서다. 다만 가장 큰 스파크가 일어나는 지점은 각자의 문제가 서로 부딪히는 장면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서로의 입장이 여기에서 제시된다.

강심은 여전히 이력서 안에 사진 하나 넣을 줄을 모르고, 관련 경력란에는 지원하는 회사의 업무와는 관계도 없는 식당을 다닌 내용을 적는다. 혜림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마트에서의 일 때문에 전산화나 기계와 같은 일들에 속이 상하는데 엄마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니 또 화가 날 뿐이다. 겉으로는 자신에게 자꾸 도와달라고 그럴까 봐 그런다고 하지만, 자신의 엄마 역시 사회에 나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괜한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키오스크 앞에 멀뚱하게 혼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엄마를 보고 짜증과 화를 낸 것도 그런 이유다.

실제로 마트의 미진 언니는 오후 타임을 무인 계산대에 빼앗기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 사실이 부당하고 느끼는 혜림이 기계보다 사람이 낫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온몸으로 반항해 봤지만 기계의 미덕은 속도보다 비용 절감에 있다. 미진의 오후 타임 시급보다 무인 계산대의 전기 요금이 훨씬 싸다. 마트 주인의 이성적인 논리와 판단이다. 혜림이 자신의 업무 시간을 지킬 수 있었던 데에도 다른 이유는 없다. 만약 무인 계산대로 과자 하나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이 미진이 아니라 혜림이었다면, 지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04.
딸은 엄마에게 원래 하던 것, 잘해왔던 것을 계속하라고 말하지만, 강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남들처럼 멀쩡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새로 요구되는 것들을 모른 척 외면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당장 오늘의 자신과 내일, 그리고 먼 미래의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자신도 딸의 말처럼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고 싶지만 그 일이 앞으로는 필요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강심의 말에는 작은 울림이 있다. 영화 속의 이야기에서만이 아닌, 바깥에 놓인 현실 속 우리의 이야기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일 것만 같아서.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놓인 모녀의 모습이 함께였다는 사실과 자신의 자리를 찾아 서 있던 강심의 모습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발전과 기술 위에, 두 발로 단단히 딛고 서 있는가 하는 물음 하나만이 엔딩 크레딧 위로 떠오른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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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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