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경> 스틸컷

영화 <재경>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날이 흐린 것도 아니고 끼니를 거른 것도 아닌데 속이 텅 빈 것 같은 기분. 외로움에 속하는 정서다. 외롭다는 감정은 홀로 된 이후에야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후에 그 빈자리의 공백을 크게 느끼게 될 때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가 내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그가 귀찮게 하던 행동이 이제 내 곁에 머물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끼게 될 때.

영화 <재경>은 함께 지내던 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난 뒤에 남겨진 이가 느끼게 되는 쓸쓸한 감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시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던 재경(고유준 분)에게 어느 날 갑자기 두 사람이 불쑥 찾아오면서부터다. 집을 구할 때까지 딱 일주일만 머물겠다고 했으면서 3주가 지나도록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아는 동생 성우(김용삼 분)와 남자친구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는 친동생 지원(박지원 분)의 갑작스러운 방문.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재경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사건건 싸우고 부딪히고 세 사람. 재경과 두 사람은 물론, 이 집에서 서로 처음 만난 성우와 지원 역시 서로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집주인 재경이 집을 비운 어느 날, 성우와 지원은 함께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에 갇히고 만다. 문을 열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극 중 인물 모두가 마음 한편에 커다란 공동(空洞)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서로가 알게 된다.

02.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감정에 대한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동거의 불편한 시간 이후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게 되는 재경의 감정이 중심에 놓이게 된다. 기능적으로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다른 두 인물의 역할은 이 감정의 콘트라스트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최종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자리 역시 과정이 아닌 결과에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서 작품이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는 일은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극 중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하고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감정선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과 달리 이 영화가 인물의 감정을 그려내는 방식은 주목하는 데 있지 않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물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처음부터 작품 전체를 소란스럽게 채워 넣는다. 세 인물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과격하게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생 지원의 아침 루틴이라는 클라리넷 소리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성우의 코 고는 소리도 모두 영화의 마지막 지점에서 누군가의 그리움이 될 대상들이다. 물론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 리 없는 관객들에게는 영화 초반부의 이 소음들은 그저 시끄럽게 여겨질 뿐이다.

주목하는 방식을 대신해 활용되는 것은 발굴과 굴채의 형식에 가깝다. 영화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 함께 지내던 이들의 증거가 썰물이 빠져나가듯 모두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 공간을 대신해 채우는 갑작스러운 고요함과 적막함이 갯벌에 묻혀있던 어떤 것들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방식은 관객의 경험적인 측면 역시 함께 고려된 부분이 있다. 영화의 청각적인 부분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극 중 인물이 경험하는 동일한 상황을 관객 역시 함께 경험하며 잠깐이나마 스크린 밖으로 전이된 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영화 <재경> 스틸컷

영화 <재경>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놓이게 되는 재경의 감정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성우와 지원이 베란다에 갇히게 되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세 사람의 이면 또한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먼저 하루종일 잠만 잔다고 재경의 타박을 받던 성우는 공황장애로 인해 복용하고 있는 약 때문에 잠이 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그는 자신이 서울에 올라온 이유 또한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지원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나 문제를 홀로 다 짊어지고자 하는 인물. 성우처럼 아픈 상태는 아닐지 몰라도 마음 한 구석에 상처가 있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재경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분명히 있다. 이 집은 재경이 자신의 결혼을 위해 어렵게 마련한 공간이지만 정직원으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고 여자집으로부터 파혼을 당했다. 글을 쓰던 일까지 다 때려치우고 4년이나 공연 전시 쪽에서 악착같이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영화의 시작점에서 걸려왔던 전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현재 상황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이 집에 대한 애착을 별로 갖지 못하는 이유다.

결국 세 사람이 한 집에 모이게 되고,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각자의 가슴속에 묻힌 어려움들을 잠깐이나마 서로가 위로하고 보듬기 위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적극적인 위로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곁의 존재를 귀찮아하면서도 함께 밥을 먹고 다음날의 안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온기를 느끼게 된다.
 
 영화 <재경> 스틸컷

영화 <재경>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4.
성우와 지원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베란다 한쪽 끝벽에 설치된 경량 칸막이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원래의 목적인 화재와 같은 위급 상황의 탈출 통로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지금 당장 활용하지 않더라도 그런 탈출구가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 이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보자면 '타인의 존재'와 비유적으로 맞닿아 있다. 성우에게는 지금 당장 돈이 없고 집을 구하지 못해도 편하게 의탁할 수 있는 아는 형(재경)의 존재, 지원에게는 남자친구와 싸우고 뛰쳐나와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친오빠(재경)의 존재다. 마찬가지로 재경에게는 정을 붙이기 어려운 큰 집을 잠시나마 북적거리며 지낼 수 있게, 사람 냄새 속에서 짙은 과거를 잠시 지울 수 있게 해 준 아는 동생(성우)과 친동생(지원)이 그럴 것이다.

지원이 자신을 찾아온 남자친구를 따라나서고, 성우가 제 집을 구해 떠난 이후, 한동안 북적이던 집이 적막해지자 홀로 남은 재경은 그 빈자리를 더없이 크게 느끼게 된다. 어떤 긴급한 상황으로 인해 경량 칸막이가 뻥 뚫리고 난 뒤의 휑한 벽면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 자신도 모르게 성우의 코골이 소리와 동생의 클라리넷 소리를 마치 환청처럼 듣게 되는 것은 그런 헛헛함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외로움의 정서를 조금도 느끼지 못할 관객이 과연 있을까.

영화의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가 외로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극의 곳곳에,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코미디적인 요소를 배치한 감독의 선택은 적절한 환기의 기능을 한다. 감정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냄으로써 소모의 과정까지는 겪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표현되고 있는 극의 의도적 가벼움 역시 이 정서가 너무 무겁지 않은 모습으로 도시의 보편적인 부분처럼 그려지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이 지금 모두 떨어져 있지만, 분리되거나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는 글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다섯 번째 큐레이션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때’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9월 15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재경 인디그라운드 고유준 김용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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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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