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갈>의 한 장면

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갈>의 한 장면 ⓒ KBS2

 
후세 사람들은 온달이 고구려 부마가 된 사실에 더 주목하지만, 그의 최후 역시 상당히 극적이었다. 최대 후원자인 평강태왕이 사망하고 처남인 영양태왕이 즉위하자 그는 새로운 태왕에게 군대를 내달라고 요청했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따르면 이렇게 말했다.
 
"신라가 우리의 한강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만든 뒤로 (그곳) 백성들이 통한해 하며 여전히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이 불초한 사람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병력을 내어주신다면, 한 번에 가서 우리 땅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병력을 받은 온달은 출정 전에 또 한번 다짐을 했다. 지금의 충북과 경북을 잇는 조령 및 죽령 라인으로 신라 영토를 축소시키지 못하면 귀환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호언장담하고 진군의 길을 나섰지만, 그는 녹록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아단성(아차산성)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온달 열전은 그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다"고 말한다. 부마이자 사령관이었지만, 그 역시 격렬한 전투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조령 및 죽령 라인까지 되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577년에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하고 북중국 강국인 북주 군대를 물리치고 부마가 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많지 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됐던 것이다.
 
577년과 유사한 590년 온달의 행보

온달이 전사한 해는 수나라가 근 37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강으로 등장한 이듬해였다. 그래서 동아시아 각국이 무척 어수선했다. 이런 시기에 고토를 찾아오겠다며 온달이 도박에 나섰던 것이다.
 
그가 도박을 벌인 것은 평강태왕의 사망 때문일 수도 있다. 아내인 공주와 더불어 자신의 최대 후원자인 장인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 온달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590년에 온달이 보여준 행보는 577년에 보여준 것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북중국 강대국을 물리치고 태왕의 사위로 인정받는 모습과, 새로운 태왕에게 신라를 물리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는 모습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이는 그가 새로운 태왕의 신임을 받을 목적으로 590년에 참전을 자원했을 가능성을 추론케 만든다. 평강태왕의 치세 하에서 이룩한 것들을 영양태왕의 치세 하에서도 계속 유지할 목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590년 당시에 고구려의 최대 위협은 서쪽 수나라였다. 그런데 온달은 남쪽 신라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자원했다. 상대하기 벅찬 수나라보다는 만만한 신라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그의 출정은 위험한 도박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신라는 예전의 신라가 아니었다. 514년에 등장한 법흥왕 이래로 신라 조정은 실질적 지배 범위를 서라벌 밖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법흥왕이 517년에 병부(국방부)를 설치한 것은 지방 군사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장악이 가능케 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540년에 즉위한 진흥왕은 법흥왕의 성과를 발판으로 신라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켰다. 경상도 창녕, 충청도 단양, 수도권 북한산, 함경도 황초령·마운령에 그가 지나갔다는 증표로 순수비들이 세워졌다.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명령으로 1778년 편찬된 만주 역사서인 <만주원류고>는 발해 건국(698년) 이전에 계림 즉 신라가 길림 지역을 지배한 적이 있다고 서술했다. "계(鷄)와 길(吉)은 음이 서로 부합되며, 여러 지리적 관계를 조사해봐도 역시 딱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중국어에서 '계'와 '길'은 똑같이 '지'로 발음된다. 신라의 지배로 인해 '계림'으로 표기됐던 곳이 나중에 발음이 똑같은 '길림'으로 표기됐다는 게 <만주원류고>의 설명이다.
 
589년에 초강력 통일 국가가 등장했으므로, 신라 군대가 길림 지역을 밟을 기회는 그 이전에 더 많을 수밖에 없다. 589년 이전에 신라의 정복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기간은 진흥왕 때였으므로 진흥왕의 군대가 황초령·마운령뿐 아니라 압록강까지 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실현 가능성 낮았던 온달의 장담
 
 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갈>의 한 장면

KBS2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갈>의 한 장면 ⓒ KBS2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만주원류고> 및 <길림유력기>에 따르면, 길림은 본래 신라의 땅"이라고 한 뒤 "이것은 진흥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강토를 개척하고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 보유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길림 지배가 진흥왕 때든 아니든, 진흥왕 이후의 신라는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었다. 물론 진흥왕 이후에도 고구려·백제가 더 강력했지만, 신라 역시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조령·죽령 라인까지 확장시키겠다는 온달의 장담은 실현 가능성이 낮았다. 군사력 상당부분을 수나라 방어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서 신라와의 전쟁에 역량을 과도하게 소비할 수는 없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온달의 출정은 어느 정도는 도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성 몇 개를 빼앗아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신라 영토를 예전의 약체 시절로 축소시키겠다고 공언하고 떠났으니, 온달은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부마인 그가 신변 안전을 개의치 않고 화살이 쏟아지는 현장에 뛰어든 것은 그런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마음 자세로 임했다가 전사해서인지, 온달이 죽어서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시신이 들어간 관이 전투 현장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온달 열전에 따르면, 관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가 전투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이에 의하면, 공주는 관에 대고 "죽고 사는 일이 결판났으니, 아아 돌아가시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신채호는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비현실적인 부분 때문이다. 그는 운구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온달의 다짐이 생각나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
 
그러면서 신채호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사략>에 따르면 공주는 '국토를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시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며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온달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공주가 전투 현장에서 졸도해 온달과 함께 그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사략>은 시간적인 거리로 보면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낮지만, 위의 문구만큼은 전쟁시대의 분위기에 부합하므로 이 책에서는 <조선사략>을 채택하기로 한다"고 신채호는 말했다.
 
전사한 직후에 관한 온달 열전의 서술이 비사실적이라서 그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신채호의 견해도 아직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온달의 등장만큼이나 그의 최후도 매우 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온달은 굳이 안 가도 되는 전쟁을 자원하면서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배수의 진까지 쳐놓고 일대 모험에 뛰어들었다. 고구려 부마가 되는 과정도 극적이었지만, 세상을 떠나는 과정도 극적이었던 것이다.
달이 뜨는 강 바보 온달 온달 장군 평강공주 아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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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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