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벨자>에는 대학 졸업을 앞둔 에스더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학생이던 시절을 지나 이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앞둔 여느 인물들처럼 그녀 역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원하는 일은 할 수 있을까 초조함에 휩싸인다.

눈에 띄는 구절은 그런 자신을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은 사람으로 비유하는 부분이었다. 그 나무에는 행복한 아내, 훌륭한 편집자, 뛰어난 교수라는 무화과가 달려 있다. 하나를 가지면 나머지는 버려야 하지만 에스더는 모든 열매를 가지고 싶어 한다. 어떤 것이 최선의 선택인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탐스럽던 그 열매들은 하나씩 검게 쪼그라들더니 그녀의 눈앞으로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10대 시절을 성장기 혹은 무궁한 가능성이 피어나는 시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좌절과 절망의 시기에 가까웠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기 자식은 특별하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재능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아이가 뭐가 돼도 될 거란 희망을 품곤 한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학교는 잔혹한 공간이다. 점수와 등수가 아이들의 위치와 가능성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도달하지 못한 목표를 앞에 두고 실패는 반복되지만 멈출 수도 없다. 청소년기가 끝나지 않는 한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고 여겨지기에.

 여전히 '매력적인 악당' 마릴린 맨슨.

여전히 '매력적인 악당' 마릴린 맨슨. ⓒ 라이브네이션코리아


답답하던 10대 시절, 처음 만난 마릴린 맨슨의 노래

부모도 선생님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접거나 낮출 때까지 이 같은 고행은 반복된다. 수능 시험지의 마지막 답안을 쓰는 순간 이 모든 악순환이 종결되리라는 걸 알지만 그 시기는 정말 멀게만 느껴진다. 당장 코앞의 참고서를 한 장이라도 더 뒤적여야 하기에 이 모든 고통이 어떤 부조리로 인해 발생하는지도 파악하기도 힘들다.

어른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 '그래도 너희 때가 편하다'는 무시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거 다 거짓말이다) 더딘 성취에 쏟아지는 질책도 자기 탓이라 생각하기에 부푼 불만을 되돌려 줄 생각도 못 한다. 그래서인지 세상의 끔찍한 면을 더 많이 알아버린 지금보다도, 나는 10대 시절에 반항심이 더 심했다. 억하심정을 어디로 표출해야 할지 모르니 그냥 세상 자체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런 반발심을 흔히 말하는 '비행'으로 해소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아이도 아니었다. 단지 주말이면 홀로 방에 앉아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어 나가는 호러 영화를 보거나, 부모님을 졸라서 산 MP3 플레이어에 록 음악을 가득 담고 다니곤 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지르는지 모를 괴성을 토해내는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가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공감도 가고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가수 마릴린 맨슨과 나의 만남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실패한 호러물인 <북 오브 섀도우>의 오프닝 곡 'Disposable Teens'를 불렀고, 영화를 보다 노래를 들은 즉시 나는 맨슨에게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Disposable Teens'가 던진 메시지

기괴한 분장에 엽기적인 퍼포먼스, 정부·기성 세대 심지어 북미에서는 금기라고 할 만한 기독교까지도 조롱하고 비판하던 가수. 마릴린 맨슨은 그야말로 반골과 반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던 대부분의 록스타들과는 달리 비쩍 마른 몸에 시스루에 가까운 의상을 걸치며 젠더 규범을 은근슬쩍 위반하던 그의 모습은 내 마음에 쏙 들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피골이 상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폭력성과 광기를 분출하는 마릴린 맨슨을 보고 있자면 묘한 동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푹 빠진 건 단지 외적인 스타일이나 음악 장르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령 내가 처음 맨슨을 접한 노래 'Disposable Teens'의 가사를 살펴보자.

이 노래에서 그는 '우리는 일회용인 10대들이야(We're disposable teens)'라는 후렴을 반복한다. 일회용, 말 그대로 재활용이 불가능한 존재들. 눈에 띄는 점은 이 노래에서 맨슨이 '너희'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나는 그 가사가 10대들에 대한 냉소적인 조롱이 아니라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쓰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

또 그는 진화를 원한다는 사람에게 '유인원이 큰 히트를 치긴 했지(The ape was a great big hit)'라고 조롱하고, 혁명을 원한다고 말한 이에게는 '난 네가 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거야(And I say that you're full of shit)'라고 일갈한다. 그렇게 그는 성장과 진화와 혁명을 포함한 모든 발전에 비웃음을 날린다.

 마릴린 맨슨의 'Disposable Teens'

마릴린 맨슨의 'Disposable Teens' ⓒ 마릴린맨슨VEVO


 마릴린 맨슨의 'Disposable Teens'

마릴린 맨슨의 'Disposable Teens' ⓒ 마릴린맨슨VEVO


유일한 출구가 되어 주었던 노래

어찌 보면 정말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심사가 비비 꼬인 노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 나는 이 곡을 들으며 숨이 트이는 느낌을 받곤 했다. 모든 어른이 내가 앞으로 뭔가 이루어야 하고 이를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와중에, '너나 나나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못 해!'라고 말하는 노래는 마치 그 무엇도 되기를 거부하는 파업 선언과도 같았다.

즉 맨슨의 위악적인 가사는 지쳐 있던 내가 당장 원하던 것이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내가 충족할 수 없는 헛된 기대를 던져 버리고 그것을 부수어 버리는 것. 모든 이들이 나의 등을 떠밀 때 못 해 먹겠다고 드러누워 버리는, 언뜻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적극적인 거부를 하는 것 말이다.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때, 하지만 주변의 어른들은 그런 세상에 너무도 잘 적응해 버려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내 말에 힘을 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던 때, 마릴린 맨슨은 '그래, 이 세상은 정말 맛이 갔어'라고 말해준 유일한 예술가였다. 그의 노래가 특별한 위로를 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안심은 되었다. 마릴린 맨슨은 문제는 내가 아님을 유일하게 이야기해준 사람이었기에.

사실 맨슨은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들이 그의 음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10대들의 폭력을 조장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하지만 맨슨은 폭력의 주동자라기보다는 진솔한 증언자였고 그렇기에 유일한 출구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거위의 꿈' 같은 노래보다 그의 노래가 정신 건강엔 훨씬 좋았다.

세월이 흘러 마릴린 맨슨의 전성기라 할 시기는 지나갔다. 솔직히 이제는 발매하는 음반도 예전만 못하고 나이 탓인지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도 얌전해진 느낌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세상과 격렬하게 부대끼던 시절을 지나, 어린 시절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순과 불합리함 앞에서도 어느 정도 무표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 도무지 이해할 수도 닮고 싶지도 않았던 어른들에 가까워졌고 그만큼 마릴린 맨슨의 노래를 찾는 일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에 일상이 휘청거릴 때, 이제는 알겠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또 다른 이면 앞에서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 때, 그의 노래를 다시 찾곤 한다. 슬픈 사실은 특히나 요즘 그의 노래를 찾는 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BGM' 공모글입니다.
마릴린 맨슨 DISPOSABLE TEENS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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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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