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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죽더라도 한 권 책을 지키겠다는 남자

[김성호의 씨네만세 700] <투모로우>

24.04.25 10:24최종업데이트24.04.2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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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서실태가 심각한 수준에 돌입했다는 평가다. 지난 23일 세계 책의 날을 맞아 쏟아진 보도는 각종 실태연구를 근거로 한국인이 더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담하게 일깨운다.
 
한국인 10명 중 6명은 1년 동안 단 1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연간 평균 독서량은 마지노선이라 여겨졌던 4권을 지키지 못하고 3권대로 내려섰다. 대학생 과제 등을 뺀다면 실 독서량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짐작하기 민망할 지경이다.
 
전국단위 독서실태조사가 처음 이뤄진 1994년 한국의 독서인구 비율은 86.8%였다. 매년 꾸준히 하락했다곤 하지만 2011년 73.7%였던 것이 10여년 만에 40% 미만까지 급감했다. 난독이며 이해력과 사고력 부족 문제가 곳곳에서 지적되는 상황에서 독서량 급감과 개인의 역량 하락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투모로우 포스터 ⓒ 20세기폭스코리아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재난을 부른다
 
한국 출판계는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긴 호흡의 글, 깊이 있는 글, 형이상학적 내용을 다루는 글 등은 인기가 없다. 가벼운 감성에세이와 힐링소설, 자기계발 및 재테크 서적을 제한다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소개란은 텅텅 비어버릴 지경이 되고 말 테다. 인류 문명 발달을 선도해온 문자와 서적의 전성시대가 스마트폰과 짤막한 동영상의 범람 가운데서 종말의 위협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투모로우>는 독서인구 급감이란 절망적 소식을 맞아든 2024년 책의 날 즈음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작품이다. 재난 블록버스터 1인자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롤랜드 에머리히의 2004년 작 영화로, 기상이변으로 인한 지구 종말의 위기를 담았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으로 미국 뿐 아니라 북반구 전체가 얼어붙는다는 파격적인 설정 아래 뉴욕 공립도서관에 고립된 아들을 지키려 뉴욕시를 가로지르는 기상학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기상학자 잭 홀 박사(데니스 퀘이드 분)에겐 영특한 아들 샘(제이크 질렌할 분)이 있다. 샘이 퀴즈대회에 참가하러 뉴욕에 가 있던 중 잭 홀 박사가 거듭 경고해왔던 기상이변이 닥친다. 해수온도가 13도나 떨어진 걸 시작으로 급격한 빙하기가 닥쳐온 것이다. 길을 걷던 사람까지 얼어 죽게 만들 만큼 엄청난 추위에 놀란 샘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한다. 성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올 생각 말고 버티라고 말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구하러 갈 테니까. 그리고 그는 온갖 어려움을 넘어 아들이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다.
 
때 아닌 재난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건 <투모로우> 만큼 책의 가치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작품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샘이 갇힌 곳이 어딘가. 바로 뉴욕 공립도서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그것도 공립도서관이다. 뉴욕 도서관이 소장한 어마어마한 장서는 가히 인류의 지성이라 할 만하다. 모든 서버가 얼어붙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그 모든 장서를 무상으로 일반에 개방하는 도서관이란 장소는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발전시켜왔는지를 단적으로 알게 한다. 개체의 지성을 뛰어넘는 지식을 문자를 통해 전하는 것, 그렇게 쌓아올린 지성을 다른 개체들과 나누는 것 말이다.
 

▲ 투모로우 스틸컷 ⓒ 20세기폭스코리아

 
얼어죽을지라도 니체는 안 돼!
 
영화 속 각별히 인상적인 장면이 몇 있다. 그중 하나는 이것이다. 추위가 지속되며 도서관 안도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며 어떻게든 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절하다. 사람들은 조를 이뤄 태울 책을 모으러 다닌다. 그중 한 여자가 두꺼워보이는 책 한 권을 뽑아든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녀의 손에서 그 책을 낚아챈다. 그리고는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 돼. 19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니체에 대해 투닥거리는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때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
 
"잠깐만요. 여기에 세법 관련한 책 잔뜩 있어요."
  

▲ 투모로우 스틸컷 ⓒ 20세기폭스코리아

 
한 권 책이 말하는 독서의 가치

책은 그저 책이기만 한 것일까. 벽난로 안에 던지면 몇 분 활활 타오를 똑같은 책을 두고서 어느 것을 구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안에 든 활자가 담고 있는 것, 철학이라 불리는 것,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그래도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려 분투했던 것을 다른 인간은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여자가 사서가 쥐고 있는 책을 보고 묻는다.
 
"무슨 책이죠?"
 "희귀서적실에 있던 구텐베르크 성경."
 "신이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난 신을 안 믿어."
 "그런데 왜 책을 껴안고 있죠?"
 "지키려고."
 
잠깐의 침묵이 감돈 뒤 사서가 말한다.
 
"이 성경은 최초의 인쇄본이야. 이 책으로 이성의 시대가 열렸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은 문자야."
 
여자가 '훗'하고 웃자 사내가 다시 말한다.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문명이 끝나도 이 책 하나만은 남겨놓고 싶어."
 

▲ 투모로우 스틸컷 ⓒ 20세기폭스코리아

 
책이 가져온 번영, 독서가 지켜져야 하는 이유

역사는 말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적어도 200만 년, 현생 인류라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등장 이래 30만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류의 발전은 최근 수천 년에 집중적이고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이다. 언어, 그리고 문자의 발명이 그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한 인간의 유한한 지성을 넘어 다른 개체와 앎을 공유하고 그로부터 다시 더 높은 경지의 사유를 가능케 한 언어와 문자가 인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다.
 
사서는 뇌 용량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개체와의 지적 교류를 가능케 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 문자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로부터 그가 믿지 않는 신과 종교의 이야기를 담은 두꺼운 책을 단단히 쥐고 지키려 든다. 최초의 인쇄본, 지식이 책이 되어 일반에 그 지식을 널리 퍼뜨렸던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가 지닌 가치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 그 책은 그저 한 권 책에 그치지 않는다. 문자가 탄생하고, 인간이 시공간을 넘어 지식을 전하고, 그로부터 문명이 일어나며, 마침내 그 과실을 모든 인간들과 나누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 의미를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투모로우>를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하여, 또 침몰하고 있는 한국 독서실태에 즈음하여 다시 꺼내 이야기하는 이유다. 모든 지식이 서버 안에 저장되는 시대에도 읽고 쓰는 일의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인류가 오늘의 인류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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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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