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본문듣기

"여자는 얼씬대지마" 네 명의 삶을 바꿔놓은 '사이버 범죄'

[넘버링 무비 290] EIDF 2023 상영작 <백래시 : 디지털 시대의 여성혐오>

23.08.25 17:11최종업데이트23.08.25 17:11
원고료로 응원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백래시 : 디지털 시대의 여성혐오>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사전적으로 반동, 반발의 뜻을 가지고 있는 백래시(Backlash)는 사회적, 정치적 변화로 인해 대중의 반발 심리나 행동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주로 진보적인 사회 변화에 따라 기득권층의 영향력이 약화될 때, 이에 대한 반발이나 권력의 유지를 위해 나타나는데, 시대에 따라 백래시 현상이 일어나는 위치는 조금씩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1년 미국의 언론인 수전 팔루디(Susan Faludi)가 동명의 서적을 출간하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1980년대 미국에서 일어났던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의 흐름과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는데, 저자인 팔루디는 여성의 권리가 확산되는 것을 사회적 위협으로 느끼는 일부 남성들에 의한 과격한 움직임을 백래시라고 규정하였다.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비방을 성평등을 향한 진보적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해석한 것이다.

레아 클레르몽 디온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백래시 : 디지털 시대의 여성 혐오>는 온라인 협박과 괴롭힘의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가상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유럽과 북미 지역의 네 여성을 중심에 놓고 그들의 일상을 추적하며 그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네 여성이 특정 계층이나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장소, 또 서로 다른 위치에 머물며 그저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일반적인 이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사이버 범죄(Cyber crime)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때로는 좁고 집요한 공간 속에서, 또 때로는 넓고 과격한 커뮤니티 안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02.
"여성들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니 일부 남성들이 제동을 걸려고 하는 거예요."

이탈리아 로마에서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인 '라우라 볼드리니'는 여성혐오를 향한 백래시에 대해 이처럼 말한다. 2013년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의정을 이끌게 된 그녀 역시 사이버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인물이다. 첫 의회 연설 이후가 그 시작이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을 담은 연설에 대해 보수당의 정치적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을 지지하는 우파 대중들로부터 폭력성 댓글과 살해 위협, 강간 협박이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심지어 정치인 가운데는 공기 주입식 섹스 인형을 단상 위로 들고 올라와 라우라를 직접적으로 모욕하고 강간범들을 집으로 보내자는 식의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남자들의 일인 정치판에 여성은 얼씬대지 말라'는 일종의 메시지와도 같았다. 그녀에게 보내는 아주 치졸하고 더러운 위협 말이다.

미국 버몬트 주의 베닝턴에서 하원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카이아 모리스' 역시 마찬가지의 일을 겪은 바 있다. 그녀는 여성이 공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회 프로그램 훈련을 받은 1기 수료생으로, 그 후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 하원에 당선되었다. 카이아는 의원 활동을 하는 동안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섰으며 편견과 맞서 진실만을 이야기해 왔다. 특히 노동과 평등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공격이 대상이 된 계기는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본격화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혐오의 분위기는 더 과열되기 시작했다. 카이아의 신상을 파악한 극우 웹사이트에서 시작된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과 무자비한 공격은 그녀의 삶을 난도질하기에 이른다. 증오로 가득한 온갖 언어로 그녀가 묘사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그녀가 안전하게 살 곳은 아프리카뿐이라는 직접적인 공격에 대한 위협도 가해졌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백래시 : 디지털 시대의 여성혐오>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3.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퀘벡주에 위치한 몬트리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로랭스 그라통'도 대학 시절 온라인 폭력을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아무 문제 없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던 시절,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한 여학생으로부터 SNS 친구 신청을 받으며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업로드하는 모든 사진에 '창녀', '걸레'와 같은 모욕적인 단어들을 달기 시작하던 가해자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도 모습을 감춘 채 지속적인 폭력을 가해왔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로랭스는 교실의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점차 위축되어 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여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가해자는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남학생이었고 교내의 많은 여학생이 동일한 괴롭힘을 받으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영상 제작자 겸 연기자로 활동하는 '마리옹 세클랑'은 2016년 TED X 샹젤리제위민 사이버불링 피해 부문 프랑스 챔피언에 오른 당사자다. 재미있는 페미니즘 영상을 만들고 싶어 온라인 사이트에 페미니즘 관련 영상을 올리며 주목을 받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그해에만 4만 건이 넘는 모욕과 살해, 강간 협박을 받아야 했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괴로워해야 했다. 공개적으로 지속되던 온라인상의 괴롭힘으로 인해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활동 범위가 줄고 심리적인 위축을 당했던 것이다. 마리옹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 알았으면 결코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자신감을 잃었다.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04.
이 다큐멘터리는 영상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앞서 설명한 네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짧은 요약만으로도 그들이 겪어야 했을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이 여실히 전해지는 듯하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피해가 산정되지 않는다는 점과 가해자를 특정하고 휘발하는 증거를 수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현실 사건에 비해 가볍게 다뤄지는 가상 혐오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온라인상의 여성혐오가 여성의 발언 기회를 제한하여 길거리에서 몰아내려는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20년 동안 모욕에 관해 연구해 온 언어학자 로렝스 로지에 교수에 따르면 이미 SNS 상에서 여성에 대한 모욕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 분석되어 있다고 한다. 19세기 산업 혁명 시대에도 공장과 식당에서만 일하던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면서 참정권과 같은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던 때에 성차별적 괴롭힘이 존재했지만, 최근의 SNS 플랫폼을 통한 폭력은 훨씬 더 빠르고 과격하게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개적으로 발언을 하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 많은 공격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놀라운 정도다.

페이스북을 창립한 마크 저커버그의 여동생인 도나 저커버그 또한 SNS가 여성 혐오를 새로운 차원의 폭력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동의한다. 여성들이 활약하고 목소리를 내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성들이 지속적으로 증오를 표현해서 영원한 해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지 시키려는 움직임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녀가 가장 우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여성 혐오가 정상적이고 당연하다는 사상과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남성 우월 의식의 확산이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백래시 : 디지털 시대의 여성혐오>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5.
여성혐오를 향한 백래시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큰 두려움은 온라인상의 폭력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실제 폭력 사건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사이버 폭력 초기 단계에서 경찰이나 수사 기관에 고발을 해봐도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이 사실이 가해자의 귀에 들어가 보복 가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다크 웹에서 생산되는 포르노 사진에 얼굴과 이름을 합성해 채팅 앱의 가짜 계정으로 개인 정보가 노출되기도 한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직접 집을 찾아와 테러를 가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우편물을 통해 총알이나 칼과 같은 흉기가 전달되며 심리적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있으니 일상 속에서의 안전과 보호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영국의 하원 의원이었던 '조 콕스'는 SNS 상의 협박이 실제 범죄로까지 이어져 결국 살해당하기도 했다.

사이버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어린 여성들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것 역시 또 하나의 큰 문제다. 끝내 스스로 삶을 마감한 '레테이 파슨스'의 아버지 '글렌 캐닝'은 강간 문화와 여성혐오 문화로 인해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늘 공격에 노출되어 있고 괴롭힘과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동체 최악의 인간들이 목소리를 갖고 낼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치명타라고 말이다. 결국 SNS 플랫폼 기업들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하라고 말하고, 어떤 언어적 폭력이나 사이버 증오도 자신들의 규칙 속에서는 일단 범죄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06.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에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여성혐오를 가하는 이들이 남성 전체 집단이 아니라 일부에 해당한다고 정확히 말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수많은 여성이 무분별한 공격과 협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우리의 어머니이며, 형제자매이며, 다시 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저 타인이 처한 안타까운 사연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에 그 어떤 누구가 자신의 꿈을 향해 올바른 길을 걷는다고 해서, 또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인격을 요구한다고 해서 위험에 놓일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를 규제하고 모니터링하기 위한 입법들이 각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혐오 발언과 가짜 뉴스를 처벌하고 플랫폼 기업의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페이스북이 메시지를 직접 모니터링하고, 폭력성 메시지의 경우 24시간 내에 삭제하도록 하는 법안이 만들어져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되고 난 이후,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는 5000만 유로(약 700억)의 벌금이 부과될 예정이다. 여성혐오를 향한 백래시,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사회에서 지워야 할 행동이자 단어다.
영화 다큐멘터리 백래시 여성 혐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