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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이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다

[프로골퍼의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 6] 끙끙거리며 완성한 사업계획서

등록 2021.06.21 07:33수정 2021.06.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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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예비 마을기업 사업신청서의 '2. 신청법인·단체 소개'까지는 인터넷으로 모은 정보와 빈약한 상상력을 토대로 엉성하게라도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3.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를 둘러보는 순간, 우리 팔자에 무슨 마을기업···, 이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경솔의 아이콘' 남편, 이번엔 갈팡질팡

마을기업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었다고 내 앞에서 전문가처럼 잘난 체하던 남편도, 이 대목에 와서는 꼬리를 말고 내 눈치를 보며 낑낑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남편의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어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꼬리를 사타구니에 말아 넣은 채 남편은 옹색하게 짖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사업신청서 벌써 절반은 채웠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봐야지. 안 그래?"
"시작이 반이면, 절반을 채워도 시작이라는 거잖아. 나는 죽도 싫고 밥도 싫다고."

 
2020년 10월 28일, 새벽부터 고구마를 심어 놓은 밭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농부에겐 사업계획서 따위보다는 고구마가 더 중요한 법, 이라고 되뇌면서. 다락방에서는 키보드 자판이 남편의 수면 무호흡증에 버금갈 정도로 간신히, 타닥타닥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단어 하나하나를 아주 오래 머릿속에 품고 있는 듯했다. 주변에서 경솔한 언행으로 유명한 남편이라, 키보드를 눌러 대는 속도도 늘 방정맞았건만, 그 새벽엔 웬일인지 자음과 모음이 눌러지는 시간적 간격에서마저도 신중함이 느껴졌다. 덧붙이자면, 남편은 아직도 자신의 별명이 '경솔의 아이콘'이란 걸 모른다.

어쨌든 신중이라는 단어는 평소의 남편과 어울리지 않기에 다른 낱말을 선택해야겠다. 갈팡질팡 혹은 우왕좌왕이 좋겠다. 자음과 모음이 눌러지는 시간적 간격에서마저도 갈팡질팡 혹은 우왕좌왕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엄청난 일에 나를 끌어들이더니, 잘 됐다, 개고생 한번 해봐라, 이런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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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손으로 모내기 하는 모습. 이젠 시골에서 누구도 손으로 모내기를 하지 않는다. ⓒ 노일영

 
그날따라 고구마는 자석처럼 호미를 끌어당겼다. 캐어 놓은 고구마들은 모두 호미에 찍혀서 상처투성이였다. 상품으로 팔 것이 거의 없었다. 계속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죽도 싫고 밥도 싫으니, 겨우내 고구마만 먹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구마를 캤다. 흙을 박차고 나온 고구마들은 호미에 찍혀 거의 다 허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갇힌 방에 걸려 있던 그림 속의 두 문장,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그렇다, 고구마들은 매몰된 탄광에서 구조된 광부들처럼 함께 웃고 있었으나, 밭에서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점심이나 새참을 들고 올 거라 기대했건만,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남편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강호의 도리를 안다면, 최소한 군만두 정도는 배달해 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남편은 제 코가 석 자인 듯했고, 강호의 도리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남편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 33.33%의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 중에서, 그날의 남편은 나쁜 놈이 99%를 차지하고, 이상한 놈이 0.9%, 좋은 놈이 0.1%였다.

맙소사. 남편은 다락방에서 술에 쩔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꼬리를 사타구니에 말아 넣고 주둥아리에선 침까지 흘렀다. 측은하지만 냉정해야 한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휘둘려선 안 된다, 제 점수는요, 10점 만점에 1점을 주기도 아깝습니다. 이놈은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다.

그 남자는 댄디했고, 지적이었고, 유머가 있었으며, 다정다감했고, 항상 멋있었다. 아내가 하루 종일 고구마를 캐는 동안, 낮술에 취해 다락방에서 침이나 질질 흘리며 처자빠져 자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남편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3-1.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 개요'가 그래도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자, 잠깐, 잠깐만요, 심사위원의 권한으로 '슈퍼패스 카드'를 쓰겠습니다, 그냥 탈락시키기엔 그래도 좀 아까운 구석이 있는 남자로 판단됩니다. 다음 라운드에서 한 번 더 지켜보는 걸로···.
 
갑자기 떠오른 기발한 아이디어

사업이라고 해봤자, 고등학교 때 '일일 찻집'을 한 번 해 본 경험밖에 없는 남편이 만든 사업계획서 개요를 보자. 참고로, 그 '일일 찻집'은 바글바글 인파로 북적였지만, 적자였고 끝내 파산의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게 되면, 남편이 작성한 개요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게 정상인의 사고 패턴이지만, 정성이 갸륵해서 '슈퍼패스 카드'를 사용해버리고 말았다.
 
3-1.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 개요
1. 사업명 : 밤·산수유 등 농·임산물을 이용한 마을 자립 사업
2. 사업 목적 :
➀ 알밤을 수매업체에 출하하지 않고 직접 판매
➁ 밤 가공식품 개발
➂ 산수유 공동 관리·생산·판매
3. 사업 내용 :
➀ 알밤 직접 판매를 위한 모델 개발 사업
➁ 밤 가공식품 개발을 위한 사업
➂ 산수유 상품화 사업

 

하루 종일 내가 밭에서 고구마를 캘 때, 남편이 작성한 서류 한 장 ⓒ 노일영

 
내가 새벽부터 밤까지 끼니도 거르고 밭에서 고구마를 캘 때, 남편이 작성한 내용은 이게 전부다. 밭에서 홀로 고구마를 캐며 남편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지만, 남편이 쓴 이 7개의 문장을 보고 나는 남편의 모든 잘못과 실수를 용서하며 감격했다. 단지 7개의 문장인데 말이다. 그건 사업계획서와 관련해서 내가 남편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치가 딱 요 정도 수준이란 걸 뜻한다. 이제부터 죽도 싫고 밥도 싫은 내가 매 끼니 고구마를 먹으며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잠깐 살펴보자.
 
3-2. 예비 마을기업 세부사업 계획
■ 세부사업 1 : 알밤 직접 판매를 위한 모델 개발 사업


우리 조합이 앞으로 진행해야 할 세부사업은, 남편이 개요에서 적은 사업 내용 3가지다. 일단 화면의 제일 위쪽에다 세부사업 1 : 알밤 직접 판매를 위한 모델 개발 사업이라고 적었다. 그러곤 제목 아래에 있는 세 가지 항목을 채워야 했다. ➀ 세부사업 내용 ➁ 추진 일정 ➂ 세부사업 비목별 예산. 2시간이 흘러도 배만 부르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락방에서 낑낑대고 있는 남편을 불렀다.
 
"왜 굳이 밤톨을 판매해야 해? 요즘은 시골 체험 이런 게 대세잖아, 그렇지?"
"응, 그런데?"

"그러니까 알밤이 아니라 밤송이를 통째로 판매를 하자고."
"밤송이를? 가시가 촘촘하게 박힌 그대로?"

"그래, 밤송이 그대로. 이걸 받아서 구매자가 직접 밤송이를 까는 거지, 어때? 이건 완벽한 농촌 체험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니까. 고리타분하게 알밤이 뭐냐고."
"검게 변하고 있는 밤송이를 택배로 받으면, 구매자들이 판매처를 우리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전환하지 않을까?"
 
 

내가 밤송이 판매 모델 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세부사업 1 ⓒ 노일영

 
평소에 이심전심이라 믿었던 남편은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6차 산업을 선도해야 할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이 남자는 이런 최첨단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 세부사업 2 : 밤 가공식품 개발을 위한 사업

이 부분은 주로 밤잼에 관한 내용이었다. '➀ 세부사업' 내용은 다시 4가지의 하위 단위로 나눠진다. 온갖 장황한 이야기들을 펼쳤지만, 핵심만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1) 사업 필요성
밤잼을 개발하려면 잼 전문가인 배필성 선생님이 꼭 필요하다.
2) 사업 내용
배필성 선생님에게 맛있는 밤잼을 만들기 위한 레시피를 개발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3) 사업운영체계
배필성 선생님에게 용역을 의뢰해서 함께 개발할 예정이다.
4) 사업전략
잼 전문가인 배필성 선생님이 개발한 비법으로 만든 밤잼이라고 홍보할 것이다.
 

내가 쓴 '세부사업 2'를 읽고 남편은 배필성 선생님에게 너무 의존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내용을 수정했다.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지닌 남편은 심지어 질투심까지 강했다. 우리를 도와줄지 말지 아직 결정도 안 된 분에게 질투부터 느끼다니. 어이가 없어서, ➁ 추진 일정과 ➂ 세부사업 비목별 예산은 남편과 마을기업을 제안한 분에게 맡겨버렸다.
 
■ 세부사업 3 : 산수유 상품화 사업

여기에는 마을 앞의 가로수인 500여 그루의 산수유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마른 산수유와 산수유 식초를 만들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쓰다 보니, 20년 전, 우리 마을 출신 독지가 한 분이 산수유나무를 심은 경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한 편의 잔잔한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는 일기는 일기장에, 라는 문장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3-3. 연간 수입 및 지출계획서,

였다. 수입, 지출, 순이익을 적어야 했는데, 각 세부사업의 비목별 예산을 함께 뭉뚱그려서 계산하니, 대강 칸들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회의록과 마을기업 회원명단, 개인정보활용 동의서, 자부담 통장(예비 마을기업은 보조금 1000만 원에 자부담 200만 원이다), 사업장 임대 계약서, 사업장 토지 및 건축물대장 등을 첨부해서 이메일로 담당자에게 보냈다. 그날이 접수 마감일인 2020년 11월 3일 오후 4시쯤이었다.
덧붙이는 글 노일영 기자는 프로 골퍼로 KLPGA 정회원입니다. 현재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이사장과 마을기업 대표, 함양군 백전면 음천마을 이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을기업 #함양군 #협동조합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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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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