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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지금의 10대를 단순 비교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유관순'이 발단이 된 세대 논쟁, 아이들이 이겼다

등록 2021.04.28 15:22수정 2021.04.2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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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게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다."

발단은 유관순이었다.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우뚝한 그가 옥중에서 순국할 때 남겼다는 이 유언을 아이들은 당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작 자기 또래인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거다. 뒷날 호사가들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단정했다.

그가 고향인 아우내 장터로 내려가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는 것 역시 과장되었을 거라 말했다. 남존여비의 문화가 남아있던 당시에 고작 열일곱 살 여자아이의 말을 마을 사람들이 귀담아들었을 리가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나댄다'고 혼쭐이 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키득거렸다.

3.1운동 당시 시위대의 주축이 10대 후반의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조차 반신반의했다. 교과서에 기록된 내용인데도 설마 하는 눈치였다. 이후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또한 학생들이 '동원된' 독립운동으로 여기는 듯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2.28 민주화 운동과 4.19 혁명, 나아가 5.18 민주화 운동까지도 10대 중고등학생이 주도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그저 수험용 지식으로 여겼다. 지금 그들의 인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10대는 요즘 10대와 아예 다른 인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6.10 만세운동의 주동자가 중앙고보(현 중앙고) 학생들이었고, 광주학생항일운동 역시 10대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학생들이 주축이었다. 2.28은 학생들이 야당 대통령 후보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정부가 막은 게 화근이 됐다. 그만큼 당시 학생들의 정치의식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4.19의 도화선이 된 마산 3.15 의거도 중고등학생들이 이끌었다. 이승만 정권과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김주열은 당시 나이 만 16세의 마산상고 1학년 재학생이었다. 그의 참혹한 죽음은 대학생은 물론, 보수적인 대학교수들까지 동참하도록 이끌었고, 끝내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5.18 역시 중고등학생들의 참여를 빼놓고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당시 18명의 학생이 희생되었는데, 계엄군의 무차별 총기 난사로 학살된 이들도 있지만,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고 총을 든 학생 시민군도 있다. 해마다 5월을 이곳 광주의 청소년들이 각별하게 느끼는 이유다.

유관순처럼 살겠다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선생님, 당시 그들의 삶과 지금 저희의 삶을 단순 비교하지 마세요. 그들의 숭고한 행동은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그건 타고난 게 아니라 정의로운 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지금 그런 학생들이 나오기 힘들다면, 그건 교육이 잘못돼서지, 애먼 저희를 탓할 건 아니라고 봐요."

순간 아차 싶었다. 역사의 주역 운운하며 당시 학생들의 사례를 열거한 게 듣기 거북했던 모양이다. 목숨 걸고 조국의 독립과 부패 정권 타도, 민주주의를 외쳤던 과거의 10대와는 달리 명문대 진학이 유일한 목표인, 사회에 무관심한 요즘 10대라고 한 강퍅한 대조가 반발을 부른 셈이다.

그에게 곧장 사과했다. 본의가 왜곡됐다는 식의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특히 그의 대꾸 가운데 '정의로운 교육'이라는 말은 가슴에 꽂히는 비수였다. 그의 말은 정의를 말하지 않는 교육이 정의로운 인간을 기대한다는 건 연목구어라는 일갈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세대라는 세간의 지적엔 동의한다. 그러나 그건, 그의 말마따나 그들 탓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의(義)'를 따르기보다 '이(利)'를 챙기는 것이 낫다는 걸 가정과 학교에서 충실히 교육해온 결과일 뿐이다.

'착한' 사람보다 '영민한' 사람이 성공하고 우대받는 사회라는 걸 모르는 아이는 없다. 여기서 착하다는 건 정의롭다는 말과 바꿔쓸 수 있고, 영민하다는 건 잇속에 밝고 영악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착한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늘 손해만 본다는 말이, 마치 경험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 입에서 무시로 튀어나온다.

수업 시간 꼭 기억해야 할 핵심 내용이라며 유관순의 생애에 대해 배우지만 그것을 통해 교훈이나 깨달음을 얻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핵심 내용이란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작 수험용 지식으로 전락한 유관순의 삶은 껍데기만 남았다.

단지 '유관순'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욱여넣는 고문이 됐다. 기술이나 과학 교과라면 기능적인 측면에서 써먹을 곳이라도 있지만, 역사 인물의 행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맹목적 암기 대상일 뿐이라고 선선히 말한다.

유관순의 숭고한 삶에 대해서 배웠지만, 유관순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아무리 후세가 추앙한다고 해도 고작 19년밖에 살지 못하고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참담한 삶은 본받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구동성 되레 그의 삶이 가엾다고 했다.

학교 교육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한국사 교사로서,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 첫 수업 시간에 가장 먼저 아이들 앞에서 건네는 말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합류했으며, 해방 후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맞선 교육자 김준엽 선생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에게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하는 금언이다.

비장하게 아이들 앞에 서지만, 그들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하다. 금과옥조 같은 말 같긴 한데,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피할 수 없는 건 즐기라'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참고 견디라는 것처럼 느껴져 불쾌하다는 아이도 더러 있다.

한국사 교과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학교 교육의 방향은 철저히 아이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가 수업의 질을 평가하고 교과를 선택하는 데 절대적 기준이다. 정의로움 등은 계량화할 수 없어 애초 교육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이태 전 우리 사회에 '공정성'이 화두로 등장한 뒤, 학교 교육은 더욱 획일화되고 형해화하는 모양새다. 착함과 정의로움, 자상함과 성실함 등 정성 평가는 불공정의 대표적 항목으로 죄악시됐다. 인성조차 계량화된 지표로 증명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는 식이다.

정확한 순위를 매길 수 없다는 이유로 절대평가조차 믿지 못하는 현실에서, 성적에 섣불리 정성 평가 항목을 반영했다간 곤욕을 치를 게 뻔하다. 교사의 주관이 개입되는 걸 아이들도, 학부모도 용납하지 못한다.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기꺼이 교사의 편에 선다.

결국, 교사들은 '긁어 부스럼 내는' 일을 피하게 된다. 평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수업 때조차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내용은 철저히 경계한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수업을 준비한다는 교사가 많다. 아무리 교육적인 일이라도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는 이유다.

'좋은' 수업이란 '안전한' 수업이다. 실력이 없다는 조롱을 들을지언정 불공정하다는 비판이나 민원이 제기되면 교사로서 버텨내기 힘들다. 교사에겐 교과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공평무사하게'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만 남았다. 우리 사회는 교사더러 '영혼 없는 교육용 기계'가 되라고 요구한다.

온갖 부작용에도 지난 20년 동안 꿋꿋하게 시행되고 있는 성과급제를 통해 알 수 있듯, 교육자적 열정 역시 계량화된 지표로 평가되고 서열이 매겨진다. 성과급제로 인한 가장 큰 폐해는 교사 집단의 분열이지만, 점수, 고과 등에 연연하는 교사들이 늘어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아이들 앞에서 강조하는 건, 당연히 성과와 효율이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교육에 정의로움을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공정성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지만, 학교 교육은 되레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다.

'사표'라는 말이 '사어'가 된 세상에서, 교과서 내용에 감화된 아이들을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다. 한 아이가 웃자고 던진 농담 같은 이야기가 결코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학교 교육이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지적하는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처럼 만약 지금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우리나라가 침탈된다면,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할 사람은 우리 중에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제 목을 걸게요."
#독립운동 #학생운동 #공정성 논쟁 #유관순 #김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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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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