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명치를 두드리는 아포리즘, 이 노래가 주는 위로

날 위로해주는 최고의 노래, 가수 김민기의 <봉우리>

21.04.16 15:23최종업데이트21.04.1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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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들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내뱉었을 이 말, '사는 게 힘들어서'. 어쩐지 요즘은 의도치 않게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이제나저제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줄 알았던 감염병의 공포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우릴 짓누르고 버티자는, 잘 견뎌보자는 다짐도 일 년을 넘기니 자꾸만 희미해져 간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도 한계에 가 닿은 것 같아서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릴 때가 많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끝도 보이지 않는 시련의 연속성 안에서 그래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 이럴 때 나는 노래를 듣는다. 워낙에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노래가 가진 힘은 우리 생각보다 참 크고 놀라운 것이어서 그렇다.

노래로 할 수 있는 위로의 최대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이후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우리 가요가 하나 있다. 바로 '걱정 말아요, 그대' 다. 원곡은 전인권의 노래지만 이적이 특유의 울림을 담아 리메이크 한 OST가 드라마의 내용과 기가 막히게 맞물리면서 보는 이들 마음을 찌르르~감전시켰던 거 같다.

이후 우리 가요의 최고 위로 송으로 '걱정 말아요 그대'를 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좋은 노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전에 이 숨은 명곡. 봉우리가 있다.
가히 20세기 최고의 국민 송이라 해도 무방한 '아침이슬'을 만든 김민기의 노래다.

김민기의 곡들은 대부분 양희은을 비롯해 다른 가수들이 불렀지만, 김민기 자신이 부른 노래로 만든 앨범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귀한 앨범에 수록돼 있는 이 노래 '봉우리'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들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같이 프로그램을 했던 젊은 신참 PD가 나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작가님, 우리 가요 중에 듣기만 해도 막 위안이 되고 마음이 몽글몽글 편안해지는, 그런 노래 없을까요?"

아마, 금융위기로 전 국민이 힘들고 지쳐있을 때였던 거 같다. 검은 장막이 온 나라에 드리운 듯한 나날들을 헤쳐나가는 그 힘겨움의 순간, 선곡을 부탁한 PD의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 왜 없어요. 김민기의 봉우리지!"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하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 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한 편의 시 같은, 명치를 두드리는 아포리즘 같은

조금 긴 듯한 가사인데 다 실어 보았다. 가사 자체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들어보신 분은 익히 알겠지만 김민기의 목소리는 바닥에 깔리는 것 같은 저음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주목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의 낮은 음역대를 갖고 있다. 그 스스로 가수라 생각하지 않기에 노래에 어떤 기교나 테크닉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심혈을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부른 것 같지도 않은 노래, 거기에 김민기가 부른 노래의 매력이 있다. 어쩌면 김민기가 쓴 놀라운 가사들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스스로의 포석일지도 모르겠지만.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찬찬히 따라 읽어본다. 이 노래를 수천 번 이상 들었지만 매번 마음을 고요한 숲으로 데려다주는 것 같다. 마치 산상수훈을 받아 든 어느 선지자이거나, 속세를 떠난 현자의 모습을 빌어 얘기하듯 들려주는 노래다. 그는 이 노래에서 가수라기보다는 내레이터에 가깝다. 실제로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면서 시작하기에 더 그러하다. 눈 앞에 진경 산수화가 펼쳐지는 것처럼 다분히 회화적인 가사들이고. 이는 어쩌면 그의 전공이 미학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사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눈 앞에 아주 낮은 봉우리 하나가 그려지거나, 사실적이고도 세밀한 봉우리들이 성큼 곁에 다가와 앉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노래는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공감각의 힘을 빌어 절로 스며든다. 특히 '봉우리'는 김민기의 목소리를 통해 그만큼 노래의 내러티브도 노래를 이끄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래의 고졸미, 소박하지만 은은하고도 아름답게 퍼지는 향기! 김민기의 노래들, 특히 '봉우리'가 가지는 특징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올라가고자 했던 봉우리는 어디에?

김민기는 시대의 아픔이나 사회상을 외면하지 않은 예술가의 자세로 가요사에서 높이 평가받지만 그는 투사보다, 작가 혹은 프로듀서의 위치가 훨씬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직접 부른 노래는 다른 가수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노래의 힘을 극대화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과 동요를 일으키는 것임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민기의 목소리에는 두툼하고 따뜻한 손이 하나 숨어 있다. 굉장히 어색한 듯하지만 가장 힘들 때 내미는 우리네 아버지의 손길을 닮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손. 바로 그 손이다.

그의 노래를 통한 위로는 색채를 띠지 않는다. 너무도 담담해서 무채색에 가깝다. 아니, 먹의 농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묵담채화일까? 그래서 더욱 천천히 그러나 오랫동안 스며들어 온다. 하루하루 어딘가에 있을 정체불명의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올라가야 할 봉우리는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준다.

그저 누가 등 뒤에서 떠미는 기척을 느꼈으니 오르기를 작정했고, 이어 발걸음을 옮긴 건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자고 얘기해준다. 어떤 강제도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여준다.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봉우리에 올라 늘어지게 한 숨 잘 텐데 뭐' 하고 말이다.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은 요즘, 우리가 김민기의 봉우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제 개인 브런치에 글을 실어 두었습니다.
위로의 음악 공감의 노래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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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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