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6 09:27최종 업데이트 21.04.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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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그의 3주기에 즈음하여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함께 공동기획으로, 4월 16일부터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우리 시대 '6411 투명인간'과 '약자들의 벗 노회찬'의 정치실천: 기록으로 기억하다] 기록 연재를 시작한다.[편집자말]
 

2007년 7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예비후보. 노 의원 뒤로 신영복 선생의 '함께 맞는 비'가 보인다. ⓒ 이종호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진보정의당 당대표 취임사(2012.10.21.), 그리고 당대표 퇴임 고별사(2013.7.21.)에서 노회찬은 '6411번 버스'를 통해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투명인간'들을 불러낸다. 그리고는 진보정당의 현주소를 진단한 뒤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노회찬은 묻고 답한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분들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노회찬과 함께 꿈꾸는 사람들 노회찬재단 창립기념공연 <노회찬, 함께 꾸는 꿈>(2019.1.24.)에 축하공연으로 올라온 <작은 뮤지컬 6411>의 한 장면. ‘투명인간’ 취급받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고 노회찬 의원을 추모했다. ⓒ 곽우신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의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강물은 아래로 흘러 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 우리가 바라는 모든 투명인간들의 당으로 이 진보정의당을 세우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넣겠습니다."

"진보정의당의 앞길에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철로는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진보정의당의 앞길에는 이정표도 신작로도 없습니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선 우리는 더 바뀌고 더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혁신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혁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정의당 혁신당원대회 당시 모습(사진 윗줄). 같은 날 고별사를 한 노회찬 의원(아랫줄 왼쪽). 정의당 신임 당대표로 선출된 천호선 최고위원(아랫줄 오른쪽). ⓒ 정의당

 
'6411 정신'과 '함께맞는 비'

노회찬이 떠난 뒤 많은 사람들이 '6411 연설'을 기억해내며 노회찬 정신을 6411 정신으로 직접 호명하거나, 아니면 둘을 이어낸다. 노회찬 정신은 '6411 정신'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그랬을 때 그것은 두 개의 날개로 이뤄진다. 하나가 '함께맞는 비'라면, 다른 하나는 '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실천'이다.

노회찬이 '6411 투명인간'을 호명한 문제의식을 들여다보면 그의 가슴 속 깊이 간직돼 있는 '함께맞는 비'와 직접 통한다. 

'내 인생의 한마디'를 꼽으라면 노회찬은 주저없이 대답한다. "함께맞는 비"라고.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인 2005년 2월 15일 '마음의 스승' 신영복 선생이 서화 에세이집 <처음처럼>과 함께 건네준 것이 바로 '함께맞는 비'였다. 서화집에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함께 있다. 신영복의 '함께맞는 비'는 노회찬이 일하는 공간에서 늘 그와 함께 했다. 그가 떠난 뒤 그것은 노회찬재단의 '노회찬의 서재, 봄'에 자리잡았다.   
 

노회찬 의원실에 걸려 있던 '함께 맞는 비'(신영복). ⓒ 노회찬재단


20년 20일의 감옥생활(1968.7.~1988.8.)에서, 그리고 출소한 뒤 신영복은 '함께맞는 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1983. 3. 29.)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스승'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은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왜 제게 이 글을 주셨을까 생각해보았지요.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할 때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절절한 아픔까지도 함께 느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제가 국회의원으로 갖고 있는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스승 신영복, 함께 맞는 비의 의미를 배우다 - 노회찬 의원, <국회보 국회의원 25시> 2013년 1월호)


노회찬이 떠난 뒤 그의 길동무들은 '함께맞는 비'를 통해 노회찬을 호명한다.

노회찬재단 창립에 즈음하여 출간된 <노회찬, 함께 꾸는 꿈>(후마니타스, 2019.1.)의 '여는 글: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꿈'을 통해 조현연은 "그는 여성, 노동자,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비를 맞고, 또 함께 눈물을 흘리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정치가였습니다"고 회고한다. 

1주기에 즈음해 '방송작가유니온'의 작가들은 마음을 담아 <함께 맞는 비, 함께 꾸는 꿈>(2019.7.16.)이라는 제목의 작은 추모집을 만든 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작가들이 방송 안팎에서 노회찬 의원님을 만나며 생각했던 것들, 의원님을 기리는 마음을 글로 엮었습니다. 의원님께서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식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저희 방송작가유니온과 함께 비를 맞겠다고 해주셨던 그 말씀, 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 말씀을 따와 방송작가유니온의 노 의원님 추모집 제목을 <함께 맞는 비, 함께 꾸는 꿈>이라고 지어보았습니다. 오늘 인쇄본을 노회찬재단에 전달하고 왔습니다."


2주기 추모주간을 마치며 김형탁(노회찬재단 사무총장)은 <매일노동뉴스> 기고글('노회찬을 다시 만나다', 2020.7.31.)에 "많은 이들이 그를 떠올리는 방식은 한마디로 하자면 함께 비를 맞는 모습이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정치인 중에서 그만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던 정치인으로 꼽히는 이는 드물다. 2주기 온라인 추모관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마음이 560개의 추모글로 표현됐다. 그리워하는 마음과 함께 그를 기억하는 글이 올라왔다. … 추모 글을 읽어 가다 보면 노회찬 의원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했다는 표현보다는 소외된 이들, 마음에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정치에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실로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투사보다는 조용히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했다. 열정적인 말보다는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 거창한 주장보다는 소박한 꿈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정치에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그는 더욱 소중한 사람이었다."


'6411 정신'과 '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실천', 그리고 노회찬의 꿈

1992년 4월 1일 '혁명을 꿈꾼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청주교도소에서 만기출소했다. 이후 눈을 뜨고 있는 그의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노회찬은 "그해 4월 민중당 해산과 함께 진보정당은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 '진보정당추진위'로 남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항해를 떠났다." (노회찬, '후기',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나는 다시 꿈을 꾼다. … 이제까지 적지 않은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든 꿈이 현실로 될 것이라 말할 순 없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회찬, '여는글: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다시, 꿈꾸기 위하여',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노회찬의 간절함이 드러난다. 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정치를 통한 사회 변화,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당이 제 역할을 해야 하고 정당체계가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데, 노회찬은 그것을 선도할 수 있는 것을 진보정당이라고 봤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 그것이 노회찬이 진보정당 활동을 통해 이루려한 삶의 목표였다. 

노회찬은 삶의 궤적을 반추하면서 20대 총선 창원 출마선언문(2016.2.1.)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 새벽 첫 열차를 타고 창원으로 향해오면서 온갖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의 생애 첫 직업은 전기용접사였습니다. 산업용보일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당 5천원을 받는 용접공으로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노동법이 무시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이 강요되던 현실을 고쳐보려고 전기용접 2급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한 것입니다.

그 대가는 3년에 가까운 옥중 생활이었지만 한 번도 이를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 후 10년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진보정당을 만든 것도, 두 차례나 국회의원이 된 것도, 국회의원직 박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삼성X파일을 공개한 것도, 평생 한 우물만 판 것도 모두 한 가지 목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입니다.'"


노회찬의 마지막 정치적 거처였던 정의당 강령(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향하여: "우리는 진보정치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이 강령을 채택한다")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자들의 정당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진보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며, 정당은 시민이 민주정치에 참여하는 최고의 방식이다. 승자 독식을 추구하는 정당과 세력에는 단호히 맞서고, 설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 대한민국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실천'이 노회찬 정신의 한 축을 구성한다는 것과 관련해 박상훈(전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운동보다 정치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민중 권익을 보호·신장하는 최고의 진보적 실천이다. 정치는 이상적 최선을 실현할 수 없고 고통스런 윤리적 도전을 감당해야 하지만 그 길에서 인간미를 잃지 않고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만들며 나날이 전진하는 데 인생 전체를 거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노회찬 정신이다." (노회찬재단, 제1회 노회찬포럼: 노회찬 꿈과 정치, 누가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 토론문, 2019.4.23.)
 

마석 모란공원 노회찬 묘소 옆 6411 버스 ⓒ 조현연

 
이정미(정의당 전 대표)는 2019년 1주기 추모의 글을 통해 "'6411 버스 정신'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배제된 한국 민주주의를 바꾸겠다는 정치적 소명"이라며 이렇게 말한다(노회찬 정신의 양 날개, 6411버스와 진보정당, <프레시안>, 2019.07.23.). 

"'6411 버스 정신'은 우리 정치가 한 번도 제대로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거명하는 것이고 권력 밖으로 밀려난 시민들을 정치의 한복판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6411 버스 정신'은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막연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닙니다. '6411 버스 정신'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배제된 한국 민주주의를 바꾸겠다는 정치적 소명입니다.

그래서 노회찬 정신의 또 다른 한쪽 날개는 '진보정당'입니다. 6411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로 취급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대표할 정당이 필요합니다. 그 정당이 온전히 민주정치의 일원이 될 때, 그들의 삶을 바뀌며 그들의 자존 또한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회찬은 생의 모든 과정을 진보정당 건설에 바쳤고, 정의당의 성공을 위해 분투해 왔습니다."


노회찬은 취임사와 고별사 자리에서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절절한 아픔까지도 함께 느껴야 한다"는 신영복 선생의 가르침을 새기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냈다. 그는 그렇게 '투명인간들'을 위한 정치를 스스로에게 다짐했고 그것을 진보정당을 통해 국회 안팎에서 실천했다. 

기록 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6411 투명인간과 약자들의 벗 노회찬] 여는글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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