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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의 삶 거부하고 홀로 하와이에 남은 여성의 선택

[서평]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

등록 2021.04.14 11:09수정 2021.04.1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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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5년을 살았다. 남편의 주재 발령으로 막내의 돌잔치를 단출하게 치르고 바로 떠났다. 스페인어라고는 'Hola!' 인사 한마디 알고 비행기에 오른 거였다. 용기라기보다는 무지에서 오는 무모함이었다. 말을 못 하니 전화를 받지 못하고, 글을 모르니 고지서가 와도 읽지 못해 가스도 여러 번 끊겼다. 오로지 퇴근하는 남편만을 구세주인 양 기다리며 그렇게 첫해를 보냈다.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가면서 아이와 비슷한 또래가 있는 한국 가족들을 소개받았다. 주로 주재원이나 대사관 직원 가족으로 적금 만기일처럼 귀임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연결해주고, 살 수 있도록 생활 인프라를 구축해준 이들은 교민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 식당에 한식 재료를 납품하는 상인이 왔다. 그러면 식당 사장님의 전화 한 통이 점조직 라인을 타고 나에게까지 연락이 닿았고 배추, 무를 사러 득달같이 달려갔다. 또 한국 식료품 가게 할머니 사장님은 병원, 미용실 같은 깨알 정보를 공유해주셨다.

타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

교민들은 무슨 사연으로 삶의 터전을 찾아 지구 반대편인 그곳까지 왔을까. 돌밭 길을 걷는 것처럼 불편하고 쓰라린 나의 일상은 그들의 과거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는 남대문 같이 큰 시장에 옷가게를 여러 개 가지고 있었고 그 집에는 가사도우미만 여럿이라 했다. 또 식료품 가게 사장님은 고향에서 지역 명문 여고를 졸업했다며 늘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김치는 전라도식으로 자부심 가득한 젓갈 냄새가 가게 밖에서도 진동했다.

반면 사기 결혼으로 그곳까지 와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한국으로 차마 돌아가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회사 일로 왔다가 좋아서 정착하게 되었지만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도 많았다. 꿈을 이룬 이들은 극소수였고 묻혀있듯이 사는 교민들이 대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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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 창비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나의 옛 추억을 소환했다. 이 책은 1917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에게 시집간 버들, 홍주 그리고 송화 세 여성의 이야기다. 내가 만났던 교민들의 이주 시기와 60~70년의 시차가 있지만, 그들이 뿌리내리기까지의 험난함은 매한가지였을 거다.

돈을 쓰레받기로 쓸어 담고 나무에는 옷과 신발이 주렁주렁 달려있다는 포와(하와이)처럼 콜롬비아도 낙원으로 소개되었을까. 눈곱만치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고향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사탕수수 농장처럼 채찍을 휘두르는 하올레(백인)는 없어도 콜롬비아인들의 텃새와 이질적 문화는 그들에게 채찍질만큼이나 가혹했을 것이다. 15년 전만 해도 300달러면 청부살인도 가능한 곳이라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바라는 건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것

버들의 삶은 참으로 가혹하다. 의병으로 싸우다 목숨을 잃은 그녀의 아버지, 먼 이국땅에서도 오매불망 조선의 독립만을 염원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몸과 마음을 다친 그녀의 남편. 그리고 진정한 미국 시민으로 거듭나겠다며 전쟁터로 향하는 그녀의 아들, 데이비드.

나는 인간이 능동적이며 독립적인 존재고 굳건한 의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대단한 용기와 패기로 세상을 바꾸기보다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범인의 인생이다. 세상이 변한다고 인간의 본질이 변할까. 주먹도끼로 사냥하던 구석기 시대에도 로봇이 거실을 돌며 청소하는 지금도 오늘 하루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을 거다. 이 하나를 이루기 위해 어떤 삶도 받아들이고 버텨낸다.

사진만 보고 먼 하와이의 노동자에게 시집간 사진 신부들. 거짓으로 가득한 이민 생활의 시작이었지만 그들이야말로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살아냈다. 마흔아홉의 노동자에게 시집간 열여덟의 홍주는 아들을 낳고서야 조선에 남편의 본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들과 남편을 조선으로 떠나보내며 첩으로 사는 삶을 거부한다. 혼자가 된 그녀는 원피스를 입고 늘어뜨린 파마머리로 자전거를 타며 새 삶을 열었다.

늘 넋이 나간 듯 초점 잃은 눈을 하고 살았던 송화는 무병(巫病)을 받아들이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할머니를 이어 무당의 삶을 시작한다. 그녀의 선택이 안타깝기보다는 대단하게 여겨진다. 바람직한 것보다 '원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진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이다.

오늘도 알로하!

하와이 인사말 '알로하'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하와이 원주민의 정신이 담겨있다고 한다. 그들은 매일 수시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삶의 의미를 확인하고 매 순간의 행복에 최선을 다했나 보다. 어느 철학자의 명언보다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 인사다.

코로나19로 작년부터 세상은 시끄럽고 불안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에 익숙해져 더 별다른 것 없어진 나의 일상이 참 무료했다. 그런데 알로하, 이 인사말이 그 무료함을 평온함, 소중함으로 바꾸어 놓는다. 백신만 기다리며 전 세계가 바이러스 공포에 떨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며 기억하게 될 오늘, 이렇게 나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은이),
창비, 2020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작가 #하와이 #콜롬비아 #한인 미주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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