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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과 영암을 잇는 이 다리가 상징하는 것

[세상을 잇는 다리] 심오한 지혜와 학문 요람에 놓인 무영대교(務靈大橋)

등록 2021.03.10 11:19수정 2021.03.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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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도즈드(ED)교는 1980년대 일반화된 기술이다. 가장 젊은 다리다. 형교 경간을 늘이기 위해 사장교(斜張橋) 기술과 공법을 빌려 쓴 융·복합형 다리다. 사장교보다는 연속보의 형교(桁橋)에 가깝다.
  

무영대교 연속 5주탑 엑스트라-도즈드교인 무영대교 모습이다. 남으로 흐르는 영산강을 빗각으로 건너, 무안 일로읍과 영암 학산면을 잇는 다리다. ⓒ 이영천

 
무영대교는 1면식 연속 5주탑 ED교다. 전남 무안 일로읍과 영암 학산면을 잇는 다리다. 곡류하는 영산강을 빗각으로 횡단한다. 무안(務安)과 영암(靈巖)에서 각 한 글자씩 가져와 '무영(務靈)' 대교라 이름 지었다. 연속 주탑을 채용한 ED교론 우리나라 최초다.

주탑 간 경간은 165m, 양 끝은 교대에서 100m로 총길이 860m다. 주탑 5개가 연속되어, 보여지는 모습에선 형교 연속보가 잘 느껴지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얼핏 보아선 작은 사장교 주탑 5개가 연속하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초의선사, 차(茶)를 철학의 경지로
  

초의선사 태생지 무안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있는 초의선사 태생지다. 선사는 시·서·화에 두루 능한 달인삼절(達人三絶)로 추앙 받는다. 사진 중앙 왼편에 선사 동상이 살짝 보인다. ⓒ 이영천

 
일로읍에서 가까운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 자락은 '초의(艸衣)선사' 태생지다. 시대의 천재이자 대선사라 칭송받는 초의는, 살아서 호남팔고(湖南八高)로 추앙받는다.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한 달인삼절(達人三絶)이기도 하다.

향기로운 우리 차(茶)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 세운다. 중국 〈다경요채〉를 초록,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다신전(茶神傳)〉을 쓴다. 이 책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풍토와 기후에 맞게 쓴 글(頌)을 추가해 〈동다송(東茶頌)〉을 짓는다.

우리 차를 찬하는 노래이자 서사이며, 철학서다. 차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차의 효능과 얽힌 이야기, 생산지, 보관과 품질, 사용하는 물, 차 만드는 법 등을 고루 담아낸다.

초의는 차를 통해 하나의 그윽한 철학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일여(一如)의 미(美)'라 했다. '禪茶一如(선다일여)'다. 선과 차가 하나로 귀결된다 했다. 참선을 모르면 은은한 다향(茶香)의 맛도 모른다. 차 맛을 제대로 알려면 참선을 통해 깊은 수행의 경계에 들어야한다. 차로 마음을 씻어내어,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선(禪)의 경지에 이른다.

이는 곧 삶과 죽음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귀결되는 '生死一如(생사일여)'의 세계관이다.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고해(苦海)의 바다다. 죽음의 길도 다르지 않다. 생사가 결코 다른 길이 아닌, 하나의 과정 안에 놓여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일에 이르렀다. 이는 중생들 삶과 연결되어 있다. 중생의 고통을 같이하는 길이다. 차의 깊은 맛과 향이, 삶과 죽음을 올곧게 규정하는 길이 되어 준다. 오묘하고 심오한 철학의 경지다.

시대의 천재들과 함께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20대 때 만난다. 다산의 오랜 지기다. 다산은 물론 자제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그의 초당에서 백성들 삶을 바꿀 일들을 고심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현실에 적용시킨다.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에서 신음하는 중생을 벗으로 삼는다. 중생과 같이 하는 일은, 관세음보살처럼 천개의 손과 눈을 갖는 일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와도 필생의 벗이다.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나, 10년 전후로 세상과 하직한다. 추사는 귀족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학문에서는 무척 오만하고 콧대가 세다. 따라서 사방이 적이다.

하지만 초의는 달랐다. 추사를 만난 초기에는 굳이 맞서 대적하지 않는다. 추사의 고집과 오만, 당당함을 다 품고 안아 준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인가? 추사는 초의의 깊은 학문을 알아본다. 권력에서 멀어져 제주도 대정으로 귀양 간다. 귀양길에도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대표적인 피해자다. 대체로 추사의 태도가 그러했다.
  

초의선사 태생지 홍매화 추사가 초의선사를 노래한 게송(偈頌) 마지막 구절에 ‘봄바람 한 소식에 온갖 꽃이 피어(春風百花放), 밝고 밝음이 오늘에 이르렀구려.(明明到如今)’라고 노래한 풍경에 어울리듯, 선사 태생지에 2월 홍매화가 한창이다. ⓒ 이영천

 
초의는 이런 추사를 격의 없는 벗으로 대해 준다. 추사 적거지 대정으로 가, 같이 생활하기도 한다. 추사는 초의에게 수시로 향기로운 차를 보내 달라 떼를 쓴다. 하지만 선(禪)에 대한 논쟁이 붙으면, 둘의 쟁론은 끝이 날 줄 모르곤 했다.

남종화(南宗畵) 대가 소치(小癡)와 초의

남종화 대가로 알려진 소치 허련(許鍊)이 초의 제자다. 진도에서 나고 자란 소치가 그림공부를 하고 싶어 초의를 찾는다. 초의는 남도 명문가인 해남윤씨 그림책을 빌어다 공부시킨다. 윤선도와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 집안이다. 소치는 그림에는 재주가 있으나, 서권기(書卷氣,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가 부족해 보인다.

이에 경학과 선(禪)을 초의가 손수 가르친다. 그림이 어느 수준에 이르자, 소치를 추사에게 보내 그림과 글씨를 동시에 공부시킨다. 추사는 초의의 뜻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소치에게 추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소치라는 호(號)도 추사가 지어준다. 소치는 이렇게 하여, 우리 그림에 큰 획을 그은 대 화가가 되었다.
  

태생지에 본 떠 재현된 일지암 해남 대흥사에 있는 일지암을 본 떠, 태생지에 재현해 놓았다. ‘풀 옷’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검소함과 간결함, 선사의 깊은 삶의 자세 까지 배어 있는 암자다. ⓒ 이영천

 
초의(艸衣)는 '풀 옷'의 다른 이름이다. 선사는 평생을 헤진 옷을 입고 살았다. 검소함의 일면을 넘어, 삶 자체가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一枝菴)은 초의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초라한 작은 오두막이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70년대 복원한다. 다도(茶道)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성지(聖地)같은 곳이다.

왕인박사, 일본으로

무영대교가 지나는 영산강 건너 영암은, 왕인(王仁)박사 고장이다. 월출산 북서측 군서면 동(東)구림리가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박사는 이곳 월출산 책 굴(冊 屈)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인박사 유적지 신령스런 산, 월출산을 뒤로 보인다. 왕인박사는 유적지가 있는 곳 인근 책굴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로 출입이 통제되어,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없어 안타깝다. ⓒ 이영천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 문화는 매우 융성했다. 일본(倭)은 백제에 의존하는 처지로, 뛰어난 학자를 보내줄 것을 간절하고 끈질기게 요청한다. 태자 '전지(腆支)'가 일본으로 간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친교 및 동맹사절 임무를 겸한다. 일본 태자 스승이나, 볼모신세다(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辛王條 : 六年(397년)夏五月王與倭國結好以太子腆支爲質). 전지 태자가 현인이자 대학자인 아직기(阿直岐)라는 설(說)도 있다.

백제 아신왕이 병들어 위급에 처한다. 백제는 태자를 데려와야 한다. 그래야 왕권이 안정되고 나라가 평안해진다. 따라서 일본이 백제 태자를 순순히 내어줄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이른 학자가 필요하다. 일본 응신(應神)천황은 애가 탄다. 태자 전지는 왕인박사를 추천하고, 왕인박사는 이를 수락한다.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뜻을 이해하고, 왕인박사는 도일(渡日)을 결심한다.

일본을 개명(開明)시키다

왕인박사는 영암 군서면 서(西)구림리 상대포에서 도공(陶工), 와공(瓦工), 야공(冶工, 대장장이) 등 기술자 45명과 함께 범선 5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상대포에서 학산천으로 나와 북으로 영암천에 이른다. 다시 서쪽으로 나와 무영대교가 지나는 영산강을 따라 남쪽으로 빠져 서해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남해안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왕인박사가 떠난 상대포 영암 군서면 서구림리에 위치한 상대포다. 이곳에서 각 분야 기술자 45명과 함께 범선 5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미개한 왜(倭)를 일깨워 준 시작점이다. ⓒ 이영천

 
경사(經史, 사서오경 등 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문학, 음양오행, 번역서, 의학서, 복서(卜筮, 길흉을 점침) 등을 싣고 간다. 이로써 일본이 눈을 뜬다. 각종 문물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왕인박사 일행의 도착으로, 미개한 일본이 드디어 문자를 깨치기 시작한다. 특히 한자(漢字)의 전래는, 일본에겐 혁명적인 일이다.

일본은 왕인박사 일행이 들고 온 문물로 인해 눈부시게 발달하고, 6세기 중반 백제 성왕이 전해 준 불교 전래로 이윽고 고대국가로써 틀을 잡게 된다. 비로소 '아스카문화(飛鳥文化)'가 시작된다. 왕인박사가 가져간 문물이, 궁극에선 일본의 아스카문화 원류(源流)가 되었다.

영산강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선진 백제문물이 그들의 눈과 입, 머리와 옷으로 변화했다. 일본이 가까스로 야만을 벗어났다. 왕인박사 선조는 멸망한 한(漢)나라 왕실의 후손이라는 설(說)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중·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가문이다.

일본의 메시아

한반도에서 3국 대립시기를 전후, 왜로 건너가 일본화한 '도래인(渡來人, 4∼7세기 주로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없었다면, 일본 고대문화가 발원할 수 있었을까? 도래인은 혹시 한반도에서 밀려난 세력은 아니었을까? 일본인 머릿속에 도래인이 심어놓은 한반도를 향한 끊임없는 도발 DNA가, 그들 무의식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영대교 연속 5주탑 엑스트라-도즈드교 연속 5주탑이, 백제 오경박사(五經博士)인 왕인을 상징하는 의미로 읽혀진다. ⓒ 이영천

 
왕인박사는 일본에게 어쩌면 메시아(구세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었고, 그들의 아둔한 머리를 깨뜨려 주었으며, 벌거벗은 맨몸에 옷을 입혀 준 존재였다. 영산(靈山) 월출산의 왕인박사 '책 굴'에선, 지금도 지혜의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왕인박사의 밝은 생각이 오늘도 동북아시아에 밝은 빛을 보내고 있다. 오경박사(五經博士) 왕인을 상징하는 것인가? 다섯 개 우뚝 솟은 무영대교 주탑이, 영산강 물길을 가로 지른다. 이 물길을 타고 바다를 건너갔을 깊은 지혜가, 그 위용을 늠름하게 드리우고 있다.
#무영대교 #엑스트라-도즈드교 #초의선사 #왕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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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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