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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마산 민간인학살 유족 노상도 노현섭 형제의 고난기

등록 2020.11.30 08:40수정 2020.11.3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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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 위키백과

  
'따르릉'

"예, 마산유족회입니더." "지는 부산기지사령관 박정희라 캅니더." "그런데예?" "내도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동래유족회'가 결성되던 1960년 8월 25일 오전 마산유족회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였다. 당시 마산유족회는 마산 중앙동 부두노조 사무실에 공간을 마련해 사용하고 있었다. 마산유족회의 노현섭은 자유노련 소속 부두노조 위원장이었다.

유족회로서는 군인이, 더군다나 고위 장성이 관심을 갖고 식사를 하자고 하니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의도가 있는가 하는 의심에 실제로 식사에는 응하지 않았다.

노현섭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2일 마산유족회를 결성했다. 그는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한껏 고무됐다. 박정희는 대구 10월 항쟁 사건으로 희생된 박상희의 친동생이었다.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은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조귀분은 경북 지역 유족회 활동에 적극 발품을 팔았다. "내 시동생이 부산기지사령관이라예. 울산에서 유해 발굴할 때 트럭도 내줬다 아입니꺼." 조귀분은 동네방네 다니며 자신의 시동생 박정희를 칭찬했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박정희

노현섭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족회 임원들은 박정희를 같은 유족이자 한 식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전국유족회장 노현섭(1921년생)은 영장도 없이 202방첩대에 다짜고짜 연행됐다. 그는 마산교도소와 육군교도소를 거쳐 1961년 8월 23일 서울 서대문교도소로 이감됐다. 이후 그는 '혁명재판부'로부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2년 4월 11일 가석방될 때까지 1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박정희는 4.19 혁명 이후에는 민주화세력이 대세라고 판단하고 '피학살자유족회'에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에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1의 국시로 '반공(反共)'을 내걸었다. 그런 연유로 피학살자유족회 임원들을 반국가행위로 전부 구속해 사형부터 7년까지 골고루 선고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리고, 형은 괭이바다서 수장
 

일본 유학시절의 노상도 형제. 오른쪽 앉은 이가 노현섭, 그 뒤가 노상도. ⓒ 박만순

 
"면사무소로 부역하러 나오시오"라는 전갈을 받은 노상도는 삽과 소쿠리를 들고 면사무소로 갔다. 하지만 면사무소에는 구산지서 경찰들이 대기시켜 놓은 트럭만 있었다.

경남 창원군 구산면 일대의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소집되자 구산지서 지서장은 '출발' 신호를 내렸다. 보도연맹원들을 태운 GMC 트럭이 움직이자 노현섭의 마음도 출렁거렸다.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 때였다. "저 놈 잡아라!" "탕탕탕" 트럭에서 뛰어내린 노현섭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경찰들은 그를 쫓지 않았다.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을 데려가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당시 트럭에 같이 탔던 노상도는 동생의 탈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집안에 한 명은 살아남아야 했다. 트럭은 마산시내 강남극장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6.25가 발발한 지 20일 만인 1950년 7월 15일의 일이었다.

마산형무소는 나무로 된 단층 건물로 기결수를 수용하는 1사와 결핵환자를 수용하는 병사인 2사 등을 모두 합쳐 수용 인원이 300명밖에 되지 않았다. 보도연맹원들이 몰려들어 형무소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대다수 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노숙을 했다. 이날부터 특무대(CLC) 대원들의 심사가 진행되었다. '골'로 갈 사람과 '석방' 될 사람의 분류작업이었다.(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1~2주일간 형무소에서 진행된 분류작업 이후 전차상륙함(LST)에 실려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마산시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재소자들은 모두 1681명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겁할 일이 발생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에는 여성이 50명이었다. 이들을 심사하던 CLC 대원 4~5명이 이들을 강간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47명은 석방됐지만 완강히 거부한 3명은 형무소 인근에서 사살되었다. 이는 1960년 4.19 혁명 후 제4대 국회 '양민학살특위 경남반'이 경남도청에서 진행한 증언 청취에서 증인 김용국이 진술한 내용이다. 

노현섭의 형 노상도는 1950년 8월 18일 마산지구계엄사령부고등군법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괭이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았지만, 형은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것이다.

일본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한 형제

"이놈아, 머리가 이기 뭐꼬!" 노상도는 길게 머리를 땋고 "하늘 천 땅 지"를 외는 동생 노현섭에게 꿀밤을 먹였다. 동생보다 열 살이 많은 노상도(1911년생)는 구산국민학교와 부산 동래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풍전중학교를 다니던 그가 방학 때 고향에 왔는데, 동생 현섭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천자문을 외우고 있었다.

상도는 일찌감치 동생을 일본에 데리고 갔다. 형은 와세다대를, 동생은 주오대학에 다녔다. 일제강점기에 형제가 모두 일본 명문대에 다닐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상도·현섭의 아버지 노용환은 구산면에서 대구어장을 해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노용환의 재산 정도로 자식 둘을 일본 유학 보내기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교육만이 민족과 집안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노용환은 자식들을 가르쳤다.

형 노상도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노현섭은 귀국 후 마산부청(馬山府廳)에 근무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몸 담았다.(홍중조·이상용, 『불세출의 노동운동가 소담 노현섭』)

해방 후 형 노상도는 마산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구산면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후에 노상도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1948년 4월에 포고령 2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징역 1년 5개월을 선고받아 만기출소했다.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예비검속되었다.

동생 노현섭은 마산공립상업중학교(현 용마고)에서 교직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직후에는 형 노상도와 함께 구산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노현섭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김용국군과 단 둘이서 침묵의 시위를 온 시내로 하였다. 1,600여 명의 행방불명자의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노현섭 육필일기』)
 
1960년 5월 24일 노현섭과 김용국이 현수막을 들고 한 이날의 시위는 경남 마산 괭이바다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최초의 진실규명 외침이었다.

그는 그해 5월 25일부터 마산시 중앙동 마산자유노조 사무실을 연락사무소로 운영하고 <마산일보>에 광고도 했다. "6.25 사변 당시에 보도연맹 관계자로서 행방불명된 자의 행방과 그의 진상을 알고 관계 당국에 진정하고자 하오니 유가족께옵서는 좌기(左記)에 의하여 연락하여 주시옵기 자이 경망하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민간인학살 피해 유족들은 노현섭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노현섭은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이창현, 『1960년대 초 피학살자유족회 연구』)

1960년 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마산유족회 결성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노현섭은 유족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60년 8월 28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경상남도피학살자유족회연합회(경남유족회)'를 결성했다. 이후 196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경남·북 유족 대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유족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회장은 노현섭이 맡았다. 

아버지는 전쟁 때 수장... 아들도 간첩 누명
 

위령제에서 인사말 하는 노치수 회장 ⓒ 박만순

 
"끽" 지프차에서 헌병들이 후다닥 내렸다. 헌병들은 노치영(1936년생)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와 이러십니꺼?" "너를 간첩죄로 체포한다." 노치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헌병대에 끌려간 노치영은 구타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간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하소연해도 고문관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노치영 스스로도 답답했다. "내가 뭔 죄를 졌는지, 갈차 주이소." 차라리 자신의 간첩죄를 얘기해주면 승복하겠다는 말이었다.

수사관들은 노치영의 먼 친척뻘 아줌마의 남편이 월북해서 교육 후 간첩으로 남파되었는데 그가 "노치영에게 돈을 줬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간첩 혐의자가 된 노치영은 오랜 고문과 수사, 재판 끝에 1962년 무죄석방되었다.

사실 노치영은 6.25 때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노상도의 아들이다. 그러다 보니 노치영은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처리되었다. 그가 간첩으로 내몰린 것은 아버지 노상도 사건과 무관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설움과 국가로부터의 끊임없는 감시는 그를 평생 옥죄었다.(노치수 증언. 74세.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아들의 무죄에 이어 아버지 노상도 역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6.25 때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무죄라는 것이다. 2020년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의 재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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