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2 08:42최종 업데이트 20.10.2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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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작가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을 듣고 있다. 2020.10.12 ⓒ 연합뉴스

 
지난 12일 기자간담회 때 소설가 조정래는 소위 '토착왜구'들을 비판하면서 "민족정기를 다시 세우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특위는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다"라고 한 뒤 "일본의 죄악을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반역자들에 맞서는 운동에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려 합니다"라며 친일청산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바로 옆에서 일본 우익이 자꾸 꿈틀대고, 안에서는 그들과 보조를 맞추는 친일파나 토착왜구들이 지난 75년간 과거사 정리를 저지하며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조정래가 10월에 쏟아낸 이 한(恨)은 75년간 축적된 우리 사회 전체의 한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한은 71년 전 이맘때 특히 많이 생성됐다. 조정래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949년 10월, 이 땅에서는 역사를 퇴행시키는 죄악이 벌어졌다. 조정래가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 바로 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이 해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반민특위는 이때 갑자기 해체된 게 아니라 지속적인 공격을 받다가 해체됐다. '마침내'를 뜻하는 한자 수(遂)를 써서 반민특위 해체를 보도하는 기사들이 나온 것은 그것 때문이다. 1949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반민법개정법 등 4일부 수(遂) 공포'는 반민특위의 최후를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아래 기사 속의 급(及)은 '~와, ~과'를 의미하고, '계속(繫屬)'은 사건이 법원의 재판 대상이 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과반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중 개정법률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 급(及)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부속기관조직법 폐지에 관한 법률이 지난 4일부로 공포되었다. 이 법률은 모두 공포일로부터 실시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반민 재판은 단심제로 대법원에서 하게 되었으며, 범죄 수사와 소송절차 급(及) 형의 집행은 일반 형사소송법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사 및 기소는 대검찰청 검찰관이 이것을 하게 되었고, 이 개정법 시행 당시 수사 혹은 심의 중의 사건도 모두 대검찰청 또는 대법원에 계속(繫屬)하게 되었다. 이로써 금후로는 수사·기소 등 수속이 완결되지 못한 것은 대검찰청에서 행할 것이며, 이미 기소되어 있는 사건은 대법원에서 심판을 하게 된 것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은 국회에 설치된 반민특위의 세부 조직에 관한 법률이고,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부속기관조직법은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및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의 세부 조직에 관한 법률이다.

10월 4일자로 반민특위·재판부·검찰부가 사라지지만,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지 않고 개정만 됐다고 했다.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이 반민족행위처벌법만큼은 남겨놓은 것을 놓고, 이들이 최소한의 양심은 갖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본문 3개 장과 총 32개조(부칙 포함)로 돼 있었다. 제1장은 '죄', 제2장은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은 '특별재판부 구성과 절차'였다. 제2장과 제3장은 친일파 처벌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한 부분으로 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1949년 10월 4일 개정 때 제2장과 제3장이 없어졌다. 법의 '액기스'가 사라진 것이다. 이로 인해 32개 조문 중에서 8개만 남게 됐다. 친일청산을 위한 특별기구들을 없애고 이 법을 일반 법원의 관할로 넘길 목적으로 이렇게 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을 상대로 '특'별히 파워를 보여준 기구가 아니었다. 친일파들한테 '특'별히 당한 기구였다. 친일파 시위대가 반민특위 본부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해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일까지 있었다(6·6 사건). 이런 사건들은 '친일파 처벌을 시도하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를 법원과 검찰에 던지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개정되어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일반 법원·검찰로 사건이 넘어갔기 때문에, 일반 판검사들이 친일파 사건을 철저히 다루기는 힘들었다. 10월 4일의 개정을 주도한 세력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인한 사형집행은 단 1건도 없었고, 감옥에 갇혔던 친일파들도 특위 해체 뒤 전부 다 감옥 문을 열고 햇빛을 보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8개월도 안 됐을 때인 1951년 2월 14일이었다. 이날 법률 하나가 통과됐다. 조문도 없이 본문 1개 문장으로 구성된 법률이었다.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동(同)개정법률 제13호, 제34호 및 제54호는 폐지한다"라는 반민족행위처벌법 폐지법률이었다.

1949년 10월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완전히 폐지하지 못한 친일파 세력은 1·4후퇴로 서울을 빼앗겨 국민들이 정신없을 때를 틈타 이렇게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 전쟁 와중에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마음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김종인의 조부, 김병로
 

김병로 전 대법원장과 함께한 이승만 대통령 ⓒ e영상역사관

 
반민특위가 법적으로 와해된 71년 전 이맘때를 가장 힘들게 보냈을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장이다. 대법원장으로서 특별재판부장을 겸했던 김병로(1887~1964)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의 손자다.

김병로는 김옥균 갑신정변 3년 뒤인 1887년 지금의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의심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18세 때인 1905년에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되자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1913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김병로는 경성법전 조교수 등을 거쳐 1919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광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원산파업사건, 단천노조사건 등의 무료 변론을 맡았고, 40세 때인 1927년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런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반민족특별재판부장을 겸하는 것은 매우 든든해 보이는 일이었다.

든든하게 보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든든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 반민특위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2016년에 <서울대학교 법학> 제57권 제2호에 실린 한인섭 서울대 교수의 논문 '반민족행위자의 처벌과 김병로 -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의 역할을 중심으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약화 및 와해를 위해 갖가지 수단을 구사하였다. 처음엔 권력분립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위헌론을 제기하고 특별담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해 김병로는 위헌 시비는 헌법위원회에서 판정할 일이고, 법률에 따른 반민특위의 행동 역시 불법이 아니며, 문제가 있다면 입법 개정안을 제출해야 할 것이라고 깨끗이 정리하였다.
 
김병로의 대응에 대해 이승만 정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심지어 무력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위 글의 이어지는 대목이다. 인용문 속의 '검찰총장'은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장을 겸한 권승렬 검찰총장이다.
 
이렇게 법리 논쟁이 정리되자 이승만 정권은 아예 노골적인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경찰 간부가 체포되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검찰총장이 휴대한 권총까지 탈취할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이 사건은 6·6 사건 혹은 경찰 쿠데타로 불렸다.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이를 비호하는 데 이르자, 김병로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이와 같은 조치는 '직무를 초월한 과오로서 불법'이고 가차 없는 법적 심판을 받아야 함을 명언하였다.
  

가인 김병로. ⓒ EBS

 
김병로는 법률가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이승만 정권의 무력 공격에 맞서 이 정도라도 대응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런 그가 1949년 10월 4일의 반민특위 해체를 어떤 심정으로 지켜봤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 해체에 관한 입법 조치가 9월 22일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10월 4일의 공식 해체가 임박해진 9월 하순에, 그는 대법원장으로서 소극적인 유감 표명밖에 할 수 없었다. 그해 9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 '사전연락 없어 유감'에 따르면, 김병로는 9월 23일 다음과 같은 유감 표명을 내놓았다.
 
"우리로선 국회에서 통과한 법을 충실히 실행할 의무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킴에 하등의 사전 연락이 없었으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특수한 사무처리규정을 삽입할 수 없었으며, 다만 사무처리를 대법원에서 하라고 규정지었으니 현재도 대법원의 인원과 기타 문제로 그를 원만히 처리함에 곤란한 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병로는 친일청산을 열렬히 응원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체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상황의 불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전 연락도 없이 이런 식으로 대법원에 사건을 떠넘기면 어쩌란 말이냐? 대법원 인력으로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식의 소극적인 유감 표명밖에 할 수 없었다. 가슴 속 분노를 억누르면서 극도로 절제해서 유감 표명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대법원장 김병로도 소설가 조정래가 품은 것과 동일한 한을 품었을 것이다. 김병로가 품은 한은 1949년을 살았던 사람들의 대부분과 2020년을 사는 사람들의 상당부분이 품은 한과 동일할 것이다. 21세기판 반민특위가 부활해 친일청산을 마무리하기 전까지 이런 한은 우리의 가슴에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 민족적으로 한이 켜켜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일본을 노골적으로 편들며 친일청산을 대놓고 훼방하고 있다. 그들은 동족의 한을 '반일 종족주의'로 폄하하는 책까지 펴내고 있다. 그런 책을 쓰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는다. <반일 종족주의> 제2탄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서문에서 공동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2019년 7월에 출간된 <반일 종족주의>는 공저자의 한 사람인 저에게는 자유인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종족주의가 강요한 자기 검열에 걸려 실로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한 편, 두 편 글을 쓰면서 어떠한 터부도 두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선 큰 해방감을 맛보았습니다. 대학에서 33년간 교수 생활을 하며 이 사회로부터 큰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을 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적 한이 맺힌 친일청산 노력을 비하하는 글을 쓰면서 '자유인의 선언을 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해방감을 맛보았다', '33년간 받은 혜택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을 했다' 등등의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반민특위를 반드시 부활해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들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를 갖게 만드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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